서찬휘의 만화즐기기
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8) 의지박약자
서찬휘 2007.12.07

의지박약자

의지박약. 주변을 돌아보면 한 명쯤은 있죠.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막상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우왕좌왕하거나 어떤 사안이 닥쳤을 때 견뎌내질 못해 쉽게 무너지고 마는 인간형 말입니다.

우유부단하단 인상도 주지만, 심약하기로는 그보다도 한층 더한데다 자기 의지로 무언가를 하려 들기보다 조용히 묻어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자주성이 강한 성격을 지닌 이가 옆에서 보기엔 말 그대로 속이 터집니다. 때론 사회문제화한 지 오래인 집단따돌림(왕따)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ning : 진학도 취업도 않고 직업훈련도 안 받은채 부모 돈으로 놀고먹는 젊은 미혼 무업자를 일컬음)이나 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 : 방구석 페인)가 주인공이지 않고서야 만화에서 이러한 부류를 중심에 놓고 극을 끌고 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만화가 꼭 꿈과 우정과 희망과 정의를 부르짖을 필요는 물론 없습니다만, 내내 조용하기만 하고 반응조차 딱히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하면 극 자체가 재밌지도 않고 흐름을 이어가기도 어렵기 때문이죠. 10년 전부터 쿨데레니 아야나미 레이니 해서 말없는 매력을 풍기는 아이들이 등장하긴 했습니다만 이들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말이 없는 이상으로 그 안에 담은 무언가를 보는 이들에게 노출했기 때문입니다. 양산형 캐릭터들에게선 찾기가 쉽지 않은 덕목이라곤 해도 말이죠.

때문에 만화, 특히 연재물로서 편수를 쌓아가는 종류의 만화는 의지박약아들을 그리는 방법으로 대부분 이러한 나약한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조명하는 쪽을 택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한 결론에 다다르는 방법이 단순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나약한 건 죄야! 강해져!’와 같은 정통(?)소년만화식 전법을 쓰느냐, 아니면 좀 더 섬세하게 자기 자신에게 의지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한 후 그 다음 한 발짝을 내딛게 하느냐 등의 차이를 둠으로써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도식에 개성과 다양성이 생기게 되지요. 주변 인물들의 개성 등도 조미료가 되겠고요.

사실, 요즘은 은근히 암울하고 괴로운 심정에 퐁당 빠져 있는 주인공이 자기에게 감정 이입 좀 해 달라면서 윽박지르는 인상을 주는 작품도 많지요. 시절이 하수선하니 행복보다는 괴로움 쪽이 ‘현실’ 같아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만 역시 읽을 때 힘을 주는 건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그리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작품 속 인물과 함께 성장하는 기분을 맛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겠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랑스런 의지박약자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히토히라

히토히라 - 무기

꿈의 한 조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히토히라」는 자신감이 없어 긴장하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자기 의사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데에 서투르지만 좋은 발성력을 지니고 있는 소녀 무기가 그 목소리를 눈여겨 본 연극연구회에 엉겁결에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연극연구회의 부장인 노노는 똑똑함이 뚝뚝 묻어나는 아가씨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연극부를 나와 부원이 자기를 합쳐 셋 뿐인 연구회를 이끌고 있지요. 노노는 합격자 발표일에 우연찮게 들은 무기의 환호성(?)을 눈여겨보고, 무기가 부원이 된 이후엔 자꾸만 약한 소리를 하는 무기를 무대 앞으로 끌어냅니다. 무기는 그런 부장이 야속하기만 하지만, 여러 일을 겪으며 노노의 비밀과 노노가 자기에게 자신을 겹쳐 보고 있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점차 변하려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연극이란 무대를 통해서 말이지요.
귀여운 미소녀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무기라는 소녀가 자기 의지로 내딛어 가는 과정을 한 치의 오버도 없이 참으로 담백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귀여운 아이가 결심하는 표정을 보고 싶으시다면 추천합니다.

스모모모모모모

스모모모모모모 - 이누즈카

「히토히라」가 담백한 맛이라면 「스모모모모모모」는 그야말로 오버의 극치입니다. 작품 자체가 개그물인데다 무도가들의 싸움질이 주요 내용이니 과장이 연출을 위해선 극에 달할 수밖에 없지요. 그 사이에서 주인공 이누즈카 코우시는 홀로 싸울 줄 모르는 범생이입니다.
만사가 귀찮은 눈을 한 그는 아버지가 정해준 강한 정혼자라는 모모코가 온 몸으로 달려들어도 무관심합니다. 무도가가 아니라 열심히 공부를 해 검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최강’ 이누즈카 일족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사방천지가 괴물이란 표현만으론 부족한 인간들뿐이고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 달려듭니다. 그 앞에서 그는 그냥 약해빠진 애송이고, 그저 잔머리를 좀 굴려 볼 따름이죠.
웃으며 넘길 수 있을 만한 분위기를 애저녁에 넘어서면서 모모코와 코우시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치에서 정작 코우시는 이 괴물들 사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념에 몸을 던진 모모코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 지점에서 코우시에게 소년 만화 주인공의 정석이자 최대 목표,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게 되지요.
공부를 해 검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실은 그 조차도 강요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실은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자신도 모릅니다)이고 그 이상의 의지도 없이 보낼 뿐이었던 그에게 싹튼 강렬한 감정. 소년 만화에서 소년들이 ‘강해지고 싶다’라는 이유는 다양하고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도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지가 없는 이가 의지를 품게 되는 계기는 시련이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강함이란 주제에 설득력을 부여하게 되지요. 「스모모모모모모」의 의지박약소년 코우시가 그러한 마음을 품게 되는 과정은 소년물이자 개그 격투만화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제법 잘 버무려진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조금은 등 떠밀린 기색이란 게 난감하지만, 그런 만화니까요. 네.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 시나코

토우메 케이의 팬들이라면 언제 다음 권 나오나를 눈에 불 켜고 기다리는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이 작품엔 죽은 옛 연인을 향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여성, 시나코가 나옵니다.
선생님으로 고교에 근무 중인 시나코는 소꿉친구 정도로만 여겼던 옛 연인의 동생 로우가 어느 새 훌쩍 자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한편으로 차였음에도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마음을 써 주고 있는 우오즈미에게 어느 순간 상담하기도 하며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애를 먹습니다.
형을 좋아하는 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로우,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관계에서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우오즈미. 어떻게 보면 꽤 행복해 보이는 구도지만 시나코는 그저 상냥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감춘 채 여전히 죽은 연인의 무덤 앞에 서 있을 따름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온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어찌해야 할지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아니,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한계가 오면서 시나코도 점차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아갑니다. 앞을 향해 걸어가고 싶지만, 실은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죽은 연인의 그늘을 벗어나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인 자신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도망칠 구석을 만들고 그 이외의 방향으로 나아갈 의지를 상실한 채 시간을 보내는 건 자신에게도 고통이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려야 하는 이들에겐 그야말로 지옥같은 시간입니다. 단행본 5권 분량을 돌고 돌아 이제 시나코 주변이 정리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네요. 과연 이 의지박약 아가씨가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지 궁금합니다.

크게 휘두르며

크게 휘두르며 - 미하시

의지박약이란 주제를 꺼내들었을 때 사실 가장 적임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바로 이 「크게 휘두르며」의 미하시입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울보에 찌질이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한 가지 마음만은 강하게 불태우는 소년입니다. “던지고 싶어!”
중학시절, 3년 내내 팀의 투수였던 미하시는 에이스임에도 느린 구속으로 팀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자신 때문에 팀이 진다는 자격지심과 나약함, 끊이지 않는 질타에 야구를 포기합니다. 하지만 기껏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고교에 올라왔건만 오자마자 야구부의 왕가슴 감독님에게 끌려 들어가 야구부원이 되고 말지요.
선배도 후배도 없이 자기와 같은 1학년 뿐인 신생 야구팀에서 미하시는 다시 에이스로 마운드에 서게 됩니다. 여전히 느린 자신의 공, 자신감 없는 모습에 질책 당할거라 생각하지만 이 팀에는 느리지만 제구력이 좋은 미하시의 장점을 정확하게 꿰뚫은 포수 아베가 있었습니다. 어린애처럼 그저 그를 믿고 던지면서 동료들에게 질타가 아닌 신뢰를 받는다는 감정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 끝에 다가올 승리를 향한 염원을 담고, 질책이 무서워 도망가는 모습이 아닌 믿고 던진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지요.

「크게 휘두르며」는 큰 오버 없는 성장 스포츠 드라마고 작화력이 아주 좋은 편인 작품도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고교 야구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섬세한 심리묘사와 야구 그 자체의 재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 구성 때문이겠지요. 여전히 찌질하지만 뒤는 걱정 말고 맘껏 던지라 말해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한 미하시 소년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꽤 흐뭇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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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찬휘
2007.12.07
의지박약. 주변을 돌아보면 한 명쯤은 있죠.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막상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우왕좌왕하거나 어떤 사안이 닥쳤을 때 견뎌내질 못해 쉽게 무너지고 마는 인간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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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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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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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4) 스승
서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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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3) 노인
서찬휘
2007.05.07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국민연금 같은 걸로도 말이 많고, 정년을 어디까지 두어야 하느냐 같은 문제로도 가끔 신문 사회면이 시끌시끌하죠. 평균 수명이 홱 늘어나 이젠 70세 정도로도 아직 정정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요즘 같아서는 어느 정도를 ‘노인’이라 이야기해야 할 지 가끔은 좀 막막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노인이라는 화두가 사회 전반에 떠오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서찬휘의 만화 즐기기 : 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2) 학생
서찬휘
2007.04.10
성인도 즐기는 문화다, 제9의 예술이다 같은 소리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중문화이자 상업예술로서의 만화를 찾는 주 소비 계층은 단연 학생계층입니다. 덕분에 만화에는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이 보는 이들을 직접 화자로 만드는 편이 몰입도도 높을 테고요...
서찬휘의 만화 즐기기 : 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1)
서찬휘
2007.03.07
만화 속 인물의 입체성을 드러내는 특성, 그리고 만화 속 인물이기에 드러나는 속성들을 간단간단하게 짚어나가보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부분들을 잘 살린 작품들도 추천하고요. 만화를 이렇게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