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휘의 만화즐기기
만화 속 인간군상 이야기 (5) 이단자
서찬휘 2007.07.10





이단.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흔히 정통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할 수 없는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종교 쪽으로 갈 때엔 교리에 어긋나는 이론이나 주장을 펼치는 이나 종파를 가리킬 때 쓰며, 이 이단으로 몰린 대상은 흔히 매장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때론 추방, 심하면 척살당하기도 합니다. 그 옛날 종교가 권력을 쥐고 온 유럽 정치를 지배했을 당시엔 무수한 목숨이 이단으로 몰려 죽고죽고 또 죽었던 역사가 있죠.
하지만 이단이란 기본적으로 기존에 정설,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것에 반기를 들거나,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단이고 싶어 이단이 된다기보다 기존의 방식과 방향과는 너무도 다른 주장이나 생각을 들고 나오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는 셈이죠. 어찌 보면 현재 위치에서 너무 앞서 나간 것일 수도 있고, 다수의 생각과 동의를 불복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상식이라 생각했던 부분들을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이단은 등장 당시에는 배척당하는 인상이 짙지만 오히려 후세에 와서 역사를 바꾼 인물로 재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같은 인물을 들 수 있겠고, 멀리 볼 것 없이 한국 정치판에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끝도 없이 끌어내고 있는 상황도 기존 문법에 비추어 볼 때엔 이단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표현은 개성이 너무 강해 고립된다는 식의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지만, ‘이단자’가 아니라 ‘이단아’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구습, 세습적 권위, 통념에 맞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들고 나오는 사람을 뜻할 때에도 쓰기도 합니다.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과 다르다는 데에서 오는 충돌이 사회나 세상을 뒤바꾸기도 하고 때론 기존 위치에 놓인 이들을 자극해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며, 때론 충돌 속에서 영향을 받고 끼치기도 합니다. 역사는 그렇게 충돌과 혼돈을 거듭해가면서 진보해가는 법이죠. 앞서 언급한 이단 원숭이의 일화와 같이 ― 저 작품에서는 결속이란 의미로만 쓰이긴 했지만요 ― 이단이란 존재는 당사자들이 피터지게 싸우든 말든 역사가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한 측면에서 볼 때엔 필요한 존재이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어떤 위치에 서고 또 후세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지를 잘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이단자냐 이단아냐, 아니면 박해자냐 체제 수호자냐 같은 것 말이죠.


만화 속에서 이단아 격인 존재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르는 역시 서사물입니다. 반목의 화두를 던지거나 판을 뒤흔드는 역할을 하는 건 역시 이단이죠. 그 피 터지는 막장 닭싸움만큼 독자를 몰입시키는 소재란 드물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그 이단이 주인공 쪽의 역할이라면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뒤집어줄까를 두근대며 기다리게 되죠.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하는 고난의 산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북해의 별, 아라크노아, 비천무
순서대로, 「북해의 별」「아라크노아」「비천무」

우리 작품 가운데에선 서사의 힘을 가장 잘 살리는 순정만화 쪽에 이러한 배치를 즐겨 쓰시는 작가분들이 계십니다. 그 대표 격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은 단연 김혜린 씨. 구체제의 모순을 딛고 민중 혁명을 이끈 유리핀 멤피스의 모습을 그려내 졸지에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한 적도 있는 「북해의 별」 하며 천재 과학자이나 너무나 곧고 곧은 심성과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배척받은 리안 그리피스 프로크너 박사와 ‘절대 자유 추구’ 하나로 끝까지 기타 하나 들고 방랑하다 산화한 블라디미르가 나오는 「아라크노아」하며, ‘공명(功名)대신 고독, 부귀대신 무소유, 야망대신 정리(情理)’의 삶을 산 유진하의 모습을 담은 「비천무」하며 - 작품마다 ‘이단아’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하기 힘든 인물들을 시대를 초월해 그려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김혜린 씨 작품 속에서의 이단아들은 삶과 행동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습니다.

열혈강호의 한비광
「열혈강호」의 한비광

청소년지 『영챔프』의 창간과 함께 시작해 얼마 전 연재 300회라는 금자탑을 세운 무협만화 「열혈강호」의 주인공 한비광은 어떤가요. 무공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는 주제에 도망치는 것만은 어지간한 무공은 수준급이고 한 번 본 것만으로 흡수하는 기괴한 능력을 지녔지만 정작 본인은 무림에 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죠.
하지만 정파 거두 검황과 사파 거두 천마신군의 눈에 띈 이래 졸지에 천마신군의 제자가 된 그는 자기가 생각하든 말든 졸지에 사파 무림의 한 기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말았죠. 그저 주색에나 열을 올릴 뿐이던 그지만 정·사파를 가리지 않는 무공 습득과 이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 사고로 말미암아 정·사 대립이라는 무협의 주요 화두 자체를 무색하게 만들고 맙니다. 본의는 아니지만요. 게다가 이 친구가 사랑하고 있는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검황의 손녀인 남장여인 담화린이니 한 술 더 뜨는 셈이겠지요. 이런 한비광이 단행본 40권 넘어서야 무공을 배우는 데에 제법 진지해지고 있는 판인데다 정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세력이 등장하고 있고 보면 무림에 평화가 찾아올 날은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무협은 그래야 재밌겠습니다만, 이래서야 대본소용 만화도 아닌데 정말 100권 채울지도 모르겠어요.

웨스턴 샷건의 스팅 우드맥
「웨스턴 샷건」의 스팅 우드맥

무협의 코드를 웨스턴으로 옮겨 한 판 난장을 벌이고 있는 「웨스턴 샷건」의 스팅 우드맥도 이단아라면 이단아입니다. 군 최강의 암살자였던 아버지와 느긋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과 범상찮은 친화력을 지닌 어머니를 둔 스팅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쫓아 현상금 사냥꾼으로 시작한 이래 많은 이들을 만나고 싸웁니다. 그 과정에서 주모자에 해당하는 세력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게 되고, 휘말려 드는 사건의 규모는 단순히 복수극을 넘어서 나라 전체가 뒤집힐지도 모르는 사태로 커지고 말지요.
작품이 아메리카 대륙 서부 개척시대 같은 무대에다 무협 코드에 괴도물 등을 몽땅 섞어놓고 있어 재미가 쏠쏠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 있었던 역사 등도 은근슬쩍 건드려놓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북전쟁을 명백하게 패러디한 동서간의 전쟁하며, 인디언들의 자치권 쟁취를 위한 ‘부족연맹’의 존재도 들 수 있겠죠. 현재는 통일된 국가지만 동서간의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스팅과 얽히게 되는 키스케는 스팅과 반대편에 서 있던 서부 쪽 장교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군부 최고의 암살자였던 아버지와 부족연맹의 연계점으로 말미암아 스팅도 이들의 움직임에 조력을 하게 되죠.
반목과 친목(?)을 거듭하며 서로 다른 목적으로 일관된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순간 작품의 흐름은 매우 거대해집니다. 스팅 우드맥이라는 인물은 그 사이에서 얼빵한 얼굴과 기묘한 친화력에 뛰어난 실력으로 졸지에 중심축에 서고 있지요. 마치 정파와 사파의 싸움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또는 어느 쪽에든 모두 속하고 있는) 인물이 역사의 흐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는 양상이 되겠습니다.

무책임함장 테일러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저스티 U. 테일러  

일본 작품에서 이단아를 꼽으라고 하면 앞서 대사를 소개했던 「무책임함장 테일러」의 주인공인 저스티 U. 테일러를 빼놓을 수 없겠죠. 만화판으로는 외전 격인 작품만 국내에 소개되어 있고, 원래는 소설이자 애니메이션입니다만 만화판도 캐릭터 디자인만 다를 뿐 성격은 매한가지입니다. 작품 제목 그대로 테일러는 무책임한 함장입니다. 함장 주제에 적을 두고 도망가자고 외치지를 않나, 쏟아지는 포격 속에서도 포격하지 말고 노래를 부르자고 하질 않나.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 익숙해져 있던 승무원들은 날 잡아잡수 하는 듯한 테일러에게 그야말로 아연실색합니다. 늘 엉뚱하기 이를 데 없고 어벙한 표정으로 초지일관하지만 그의 미풍호(혹은 산들바람호)는 위기의 순간을 늘상 거짓말처럼 돌파해냅니다. 운도 실력이라면 실력이지만, 테일러에게는 있는 건 운이라는 허상 같은 개념마저도 자기 것으로 만들만큼 판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종의 통찰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남들이 이것 재고 저것 재느라 골치를 썩히는 시간에 그냥 들입다 들이받는 거지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군 상부의 미프너(미후네)는 애니메이션 진행 내내 그를 말살하려거나 차라리 제 배를 째려고(할복하려고) 하지만 결국 앞서와 같은 말을 내뱉으며 체념 아닌 체념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OVA에 가선 아예 테일러를 적진에 들이밀어 넣지만, 테일러는 여기서도 기대를 저버리고 아예 포로(?)로 잡히는 강수(??)를 두어 사태를 졸지에 미궁으로 빠트리기도 하죠. 또 다른 OVA 시리즈에 가서는 전쟁 상황에서 군 상부의 의중을 오히려 역으로 찔러 자기 손으로 자신들의 배를 장사지네는 장절함까지 선보인데 이어 기세를 몰아 상황을 수습해 나가죠. 기존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상상도 못할 경지에 오른 그를 보다 보면, 미풍호 승무원 하며 다른 장성들처럼 결국은 손 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트라이건
「트라이건」의 밧슈 더 스턴피드

마지막으로 꼽고 싶은 인물은 「트라이건」의 밧슈 더 스턴피드입니다. 얼빠진 표정하며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캐치프레이즈는 무려 러브 앤드 피스!인 인물이지만 그 정체는 최강의 건맨. 그리고 우주의 척박한 별에 떨어져 살게 된 인간들의 생존과 깊은 연관을 지닌 존재. 모든 존재를 말살하고자 하는 ‘형제’ 나이브스에 맞서는 그는 “미래로 가는 차표는 언제나 백지”라는 렘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지표 삼아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는 인물입니다. 언제나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투명하지 않고 마치 모든 색의 파장을 한 데 고르게 비추면 나타나는 흰색처럼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지요.
밧슈는 자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별에 구멍을 내고, 기억에 남아 있진 않지만 자신이 저지른 미증유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해와 멸시를 받기도 하며 급기야는 인간 태풍도 모자라 인간‘재해’ 판정을 받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생명을 해치지 않으려 드는 그는 무슨 대가를 바라거나 인정받으려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생명을 앗아가려는 자신의 형제를 막기 위해, 힘을 쓸수록 점차 수명을 깎아먹게 됨을 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현실에서는 위선이라 불릴 수도 있겠고, 이해받기 힘든 길의 연속입니다. 그저 보험사 직원으로서 그의 행동을 좇다 이제는 깊숙이 관여하게 된 두 아가씨만이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죠. 정작 그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 별의 모든 이는 그저 여흥거리로서 일찌감치 사멸했을 것을.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맨으로서 살아가는 밧슈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사람들 사이에선 이상에 도취한 이단자이자 재앙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 자체가 그에게 일종의 빚을 지는 셈이지요. 악화한 상황에서 오히려 여기 인간 태풍이 왔다고 소리치며 사람들을 도망시키는 장면은 그런 일면을 개그처럼 그려내고 있습니다. 똘똘 뭉쳐 도망치는 사람들과 이윽고 텅 빈 거리는 보고 있기가 좀 서글프지만요.


독자들은 만화 속의 이단아들에게서 시대를 비추어 보기도 하고, 대리 전복을 꿈꾸기도 하며, 때론 고정관념과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일탈하는 쾌감을 얻곤 합니다. 어떤 점에선 이들의 활약은 물론, 존재 자체가 우리가 늘 긋고 있는 구분선을 모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요. 재미도 재미지만 한편으로는 딱딱하게 굳어가는 머리를 망치로 쩌억 깨 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름은 지루하고 고루한 기분에 휩싸이기 쉬운 계절입니다. 작품 속 이단자들의 횡포(?)에 한 번 신나게 휘말려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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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인물의 입체성을 드러내는 특성, 그리고 만화 속 인물이기에 드러나는 속성들을 간단간단하게 짚어나가보고 싶습니다. 물론 그런 부분들을 잘 살린 작품들도 추천하고요. 만화를 이렇게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