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전시
전시의 완성 : 관람객
한상정 2010.10.16

미술의 한 유파 중에서 ‘입체파’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니 브라크니 하는 작가들이 이 유파에 속한다. 이들이 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의 대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을 종합하는 것이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생각 아닌가? 예컨대 사람 하나를 보더라도, 정면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다 드러내지 못하니까, 옆면에서도 또 뒷면에서도 바라본 결과들을 한꺼번에 종합해서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림을 보는 일반 관객들은 그 작품이 뭔지 잘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예술작품과 관객간의 소통이 어려운 원인을 말하려는 거냐고? 아니다. 오히려 흥미를 끄는 점은, 정면만이 아니라 다른 면들을 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게 뭐가 재미있냐고? 그럼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자. 필자는 한 때,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또 지금은 만화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주변의 친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당한 적이 꽤 많다. 그건 하나같이, ‘이거는 어떻게 봐야 되는 거야?’ 인데, 대답은 항상 똑같다. ‘마음대로 보세요!’ 사실 이말고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설해주기 싫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다양한 점들을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은 지식의 측면에 속한다. 작품을 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과 관객이 만났을 때,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떨림 같은 것이다. 물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문화라는 것은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이들의 견해나 감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본인보다 좀 더 공부한 사람, 좀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뭔가 본인이 보지 못한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야 어차피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니, 관람객들은 모두 전시공간 안에서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왜냐고? 좋은 전시란, 관객들이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적 경험들을 할 수 있게끔 배려하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아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 전시공간에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뜯어보는 수 밖에. 좋은 전시라면, 전시하고 있는 테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지식이 작품들을 보는데 더 도움이 될 경우도 있고, 방해가 될 경우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원하는 이에게는 원하는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낱낱이 뜯어봐도, 뭔가 해석에 필요한 것들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면? 그렇다면, 이건 ‘재미없는 전시야’라고 평가해도 된다. 왜? 당신이야말로 이 전시의 최종 목적지,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작품 하나를 해석하기 위해 그 작품의 저자를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그 작가의 탄생배경, 시대적 상황, 가족관계, 연애관계, 친구관계 등등, 그 작가의 개인적인 성향과 성격과 관계들 등 모두가 그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저자에 대한 연구가 들불처럼 일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점점, 작가와 작품과의 직접적인 관계들이 의문시되고, 그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던 시대가 도래했다. 일반적으로 ‘텍스트 중심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작품이 말하는 모든 것은 이 작품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의 주변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를 ‘맥락(컨텍스트)’을 읽어낸다라고 말하는데, 작품이 형성된 시대적 공간적 배경, 주변 작품들과의 관계를 다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정도까지가 나름, 전문가들의 권위가 높이 인정을 받았던 시기인지도 모른다. 독자나 관객들은 모두 전문가들의 ‘올바른’ 해석들을 주의 깊게 들었고, 그렇게 해석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루브르에 온 만화-국립미술관의 만화붐인가

그러나 서서히, 무게중심은 독자, 관객, 향유자에게로 넘어왔다. 수동적인 향기를 풍기는 ‘수용자’라는 말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동일한 작품이라도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에 읽히면 다르게 해석된다. 어느 해석이 더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어느 해석이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수용미학, 대중문화 분석 등지에서도 폭넓게 나타났었고 현대에서는 수사학적, 기호학적·구조주의적, 현상학적, 주관적·심리학적, 역사적·사회학적, 해석학적 접근 등 다양한 입장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은 영미권 대중문화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1980년 <일상의 발명(L’invention du quotidien)>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부분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인간에게, 즉 평범한 영웅, 흔한 등장인물, 셀 수 없이 걷는 자(...), 이들에게, 우리가 이전에 뮤즈들이나 또는 신성한 이들에게 바쳤던 헌사를 바치려고 한다’. 이런 글들과 더불어 그는 독자를 세입자에 대비시킨다. 비록 빌린 집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 집에 사는 동안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꾸며서 살아가는 전술적인 밀렵꾼(braconner)이다. 비록 집주인이 가끔 일상적인 밀렵의 행위를 방해할 순 있다하더라도, 적어도 세입자가 사는 동안 그 집의 주인은 집주인이 아니다. 세입자가 집을 닦고 청소하고, 안을 거닐고 밥을 차려먹고, 가족들과 삶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달리 말한다면, 전시기획자는, 전시를 기획한 것으로 끝이다. 그 다음은 관람객이 수천의, 수만의 고유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전시를 즐기고 또는 실망하는 것만이 남아있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사실 관람객인 것이다.

전시기획자가 전시를 처음 기획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전시내용을 새롭게 해석하는 동시에, 이미 관람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단지 관람객의 주된 타깃이 어디에 있느냐만 설정해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서, 관람객의 입장으로 전시기획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시내용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해석에 너무나 골몰해서, 이를 잘 표현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면 반쪽짜리 기획자이다. 본격적인 포장술은, 자신의 입장을 모두 덮어버리고, 마치 전시장에 처음 들어가는 사람처럼 다시 보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봐도 충분히 설명이 될까, 글자가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을까, 또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읽기에 지쳐버리지 않을까, 캡션은 어느 정도 크기로, 어떻게 위치시키는 것이 가장 좋을까, 이 정도 돌아다니면 휴식공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휴식공간에는 보편적 수준의 지식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좀 더 많은 정보를 포괄하고 있는 다른 자료들을 배치하는 것이 어떨까, 혹시 아이들이 함께 온다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무언가 집중시킬 것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등등 고려해 볼만한 것은 너무나 많다. 물론, 불행히도 이 모든 배려가 예산의 총량에 따라 실행될 수도 못될 수도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관객에게 둘러쌓이면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 모든 것들을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전시회의 주인공이 관객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설사 전시기획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도, 도슨트들이나 전시도우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종종, 미술관이나 전시관이라는 문화적 권위에 도취된 이들은, 관람객보다 전시품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행들을 저지른다.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관에 갔다가, 아이들이 종종 접근하지 말라고 그어놓거나 세워둔 저지선을 밟거나 미는 경우가 생긴다. 심지어 넘어트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럴 때 접하게 되는 이른바 ‘주최자’측의 태도는 이 관람객들이 평생 문화예술적 공간에 대해 가지는 인상을 결정하게 된다. 권위적이고, 무섭고...등등. 이렇게 또 몇 명의 주인들을 문화예술의 장 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아이들이나 청년들, 또는 노인들도 맘에 드는 그림 앞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그 그림을 모사하고 있거나 또는 한없이 쳐다보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테이트모던은 아예 접이식 의자들을 배치해두고, 관람객들이 맘에 드는 그림 앞에 앉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전시공간이 권위적이면 권위적일수록, 일상적 영웅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많은 다양한 전술을 가진 이들은 다른 흥미롭고 재미있는 곳으로 밀렵하러 떠날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미, 이른바 ‘예술’이라는 항목에 포함된 표현양식들은 그 주인들을 많이 잃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고, 어떤 곳들은 정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한번 떠난 이들을 다시 유혹하기엔 불충분한지도 모른다.

부부도, 어린이도, 할머니도, 외국인도, 학생들도, 오덕들도!

다행히도 ‘만화전시’는 ‘미술전시’보다는 엄청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다. 일단 만화라는 대상을, 관람객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친숙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설사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점을 과다하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 모르는거네?’ 하면서 ‘그래도 보니까 재미있는 걸’이라고 그냥 말한다. 또는 어라, 재미없네...하고 발언하기도 한다. 사실상, 보고 있는 대상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렇게 반응하면 되는데, 관습상 그것이 잘 되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는가? 세상 어떤 이도,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다. 모르는데 알고 싶으면 배우는 것이고, 몰라도 별 관심이 안생기면 그만이다. 그러니, 이 ‘알고 싶다’라는 욕구가 생기게 하는 전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전시 아니겠는가. 같은 전시라도, 만화라는 표현양식을 대상으로 하는 전시가 훨씬 더 흥미를 끄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일지도 모른다. 숱한 일상적 영웅들을 가볍게 초대할 수 있다는 점. 일반적인 미술전시 기획자로서는 얼마나 탐나는 부분일까? 자, 그러니, 만화를 대상으로 전시기획을 꿈꾸는 이들이여! 자부심을 가지고 만화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자. 더 흥미로운 해석들을 잔뜩 보여줄 수 있도록, 관람객의 밀렵 네트워크에 오래오래 남아있도록 말이다.

만화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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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전시의 출발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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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은 1974년에 시작했다. 물론 1969년부터 이미 앙굴렘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만화행사들이 벌어진 것은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 앙굴렘의 이 행사들의 기원은 1967년부터 시작한 이탈리아의 <루카(Lucca) 만화페스티벌>이다. 비록 1966년엔 다른 도시에서 열렸었지만, 여튼 지금도 남아있는 행사이니 그냥 루카라고 치자.
만화전시의 주요 대상 또는 만화전시의 특성들
한상정
2010.08.14
만화전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자. 만화작품, 만화 창작자... 설마, 이것이 모두? 뭐 놀랄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니까. 크게 나누면 이 두 가지가 맞을 것이다.
전시의 개념과 전시준비과정
한상정
2010.07.14
명사 ‘전시(Ex-position)’의 동사인 전시하다(ex-poser). 즉, ‘밖으로(ex-) 놓다(poser)’. 숨겨져 있던 것, 안에 있던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꺼내놓는 기술.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즉 전시란 무조건, 안에 있던 것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것. 어떻게 보자면 일종의 ‘선물포장술’이다.
만화와 전시, 새로운 세계의 비밀스러운 공유
한상정
2010.06.12
만화읽기는 행복하다. 그 즐거운 기억은 어디까지 거슬러갈까. 그래, 잠시 살았던 마당이 있던 집. 주말만 되면 평소 보기 힘들던 아버지의 지휘아래 남동생들과 마당청소를 해야 했던 낡았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