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전시
만화와 전시, 새로운 세계의 비밀스러운 공유
한상정 2010.06.12

들어가며


만화읽기는 행복하다. 그 즐거운 기억은 어디까지 거슬러갈까. 그래, 잠시 살았던 마당이 있던 집. 주말만 되면 평소 보기 힘들던 아버지의 지휘아래 남동생들과 마당청소를 해야 했던 낡았던 집. 반나절 청소를 하고 나면 상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에 어김없이 아버지는 우리를 만화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각자 취향대로 만화책을 골라 와서 방바닥에 뒹굴면서 책을 보다보면 어느덧 어머니의 밥 짓는 냄새가 났다. 그 날만은 친구들이 바깥에서 놀러가자고 불러도 무시했고, 내일 학교 가는 책가방은 쌌냐하는 어머니의 잔소리와 더불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단발머리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쩌다 귀히 얻은 시간에 만화방으로 뛰어가는 길은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렸던지. 그 수많은 길들의 향기와 소음들, 빛의 색채들은 지금도 소중하게 남아있다. 어찌 이런 사람이 나 뿐이랴. 70년대와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만화가 보여줬던 세계의 흥분과 즐거움은 지금의 내 기억보다 훨씬 더 크고 깊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행복의 근원은. 구체적인 부분들을 제외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만 말하자면 그건 분명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당시의 내가 살고 있던 세상과 어느 정도로 겹쳐 있는지와 상관없이, 여하튼 지금 여기와는 다른 그 어떤 곳. 그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무의식적이 아니라면 그런 욕구가 있는지조차 몰랐을 시절에 만났던,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만화는 그것을 줬었다.


중년에 훌쩍 들어선 지금, 그 행복한 읽기를 다시금 할 수 있을까?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이미 내가 달라졌는데 어린 내가 느꼈던 즐거움을 그대로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 기억조차 다른 것들이 보태지거나 덜어져서 다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은 더 간절하지 않은가.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를 떠올려본다. "역마살은...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나서는 방랑이라는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하늘 높이 바람 찬 연을 띄워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安居)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도리어 방황의 인고 속에 상당한 분량의 꿈이 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헤미아의 맑은 수정(水晶)은 멀고 먼 유랑이 키워낸 열매라고 믿고 싶습니다." 살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점점 더 깨닫게 된다. 비록 한 걸음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에 불과하다해도, 꿈꾸지도 않으며 살고 싶지는 않다. 만화는 그 방랑을 독자들에게 부여할 수 있다. 이 잠재력을 얼마만큼 살릴 수 있는지는 온전히 만화가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만화를 사랑한다.


만화전시 기획자로서, 만화전시도 만화읽기가 주는 즐거움을 주어야한다고 본다. 어떤 전시방법을 쓰느냐 등은 모두 부차적일 뿐. 이 만화가의 한 작품에서, 또는 작품군에서, 또는 하나의 테마에서, 하나의 장르에서, 무어라고 말을 건낼 것인가,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냐고? 하지만 이 원칙은 의외로 쉽게 지켜지지 않으며, 실현하기도 어렵다. 원래가 미술작품의 대중적 공개방식에서 전시가 만들어졌다면, 읽는 방식이기보다는 보는 방식에 집중된 것이다. 우리는 만화를 읽는가? 또는 보는가? 사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만화에서 스토리를 읽어내는데 집중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시 역시 보는 것을 통해 읽어내기를 권유하는 방식일 뿐이다. 만화는 2차원에서 보는 것을 통해 읽어낸다면, 전시는 3차원의 현실 공간 안에서 제시된 모든 것들을 통해 읽어내기를 제안하는 방식이다. 만화가 제시하는 이야기가 독자들이 읽는 과정에서 완성된다면, 전시 역시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이란 결국 대상과 향유자 사이의 즐거운 놀이일 뿐이기 때문이며, 그 역시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탐닉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만화를 원천소스로 하는 전시란, 만화가 보여주는 세계를 또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세계에 초대된 향유자들이 그를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만화전시라고 본다.


수많은 만화전시회들



만화에 대한 학문적 성숙도도, 만화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접근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을 뿐이다. 이 글들은 만화전시에 대한 하나의 시론으로 가능한 한 폭넓게 다양한 영역을 다뤄볼 생각이다. 전시에 대한 일반론에서, 만화를 전시하는 것에 대한 난점들과 그 해결방식들이 어떤 것이 있을지, 또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의미 있었던 몇 가지 전시들을 짚어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현대 전시방법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도입되는 개념들 중 하나인 향유자와 스토리텔링도 다뤄볼까 한다. 그리고 전시의 현실적인 난점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최근에 있었던 만화전시들 몇 가지를 예로 들어서 예산과 조직문제, 컨셉과 전시방법론에 대한 분석을 총체적으로 다뤄보려고 한다. 지금은 크게 부천국제만화축제와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정도에서 만화전시와 만날 수 있지만, 사실상 크고 작은 만화전시는 작은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전시관에서, 그리고 다양한 도서전에서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만화전시의 더 활발한, 더 흥미로운, 더 기발한 기획과 실현을 만나기 위한 또 하나의 더듬거리는 과정의 출발이다. 함께 떠나지 않으려는지.

만화와 전시
전시의 종류
한상정
2015.01.07
지금까지 우리가 공통적인 관점으로 만화전시를 분석해왔다면, 이젠 만화전시의 차별점들을 드러내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만화관련 전시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테일이 강한 전시, ‘만화, 신과 만나다’전
한상정
2014.12.01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의 흥미로움은 전시기획 자체라기보다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공동기획을 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좀 맛없는 뷔페 - 제 17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전시들에 대한 단상
한상정
2014.10.28
비코프의 프로그램은 이벤트, 학술행사, 전시, 페어로 분류할 수 있다. 이벤트 내부에 개폐막식 및 각종 다양한 시민참여행사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과 원칙의 향기 : 프랑스 국립만화박물관(Le musee de la bande dessinee)
한상정
2012.01.02
프랑스의 앙굴렘에는 국립만화진흥기관인 ‘국제만화이미지센터(Cite internationale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 : CIBDI))’ 산하의 ‘(국립)만화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의 분위기는 한국만화박물관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설립배경과 조직체계적인 차이를 한번 살펴보자.
한국만화박물관 상설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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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5
서울근교 부천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화박물관이 있다. 그 이름은, ‘한국만화박물관(이하 ’박물관‘)’. 원래 박물관의 내용설계를 맡았던 시공사의 기획안에 만화가들이 만족하지 못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TF팀이 꾸려졌다. 이 박물관의 상설전시가 어떠한 의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는 어떤 방향의 수정이 진행되어야 할 것인지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라고 본다.
만화전시 케이스 분석 3 : 아르코 미술관의 <고우영, 네버 엔딩 스토리>
한상정
2011.11.01
작은 규모의 인사동 갤러리도 아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르코 미술관. 이곳에서 만화라는 표현형식의 대표적인 작가인 고(故) 고우영(1938-2005)의 전시. 얼마나 기대에 부풀었었는지 모른다. 이 전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만화전시 케이스 분석 2-3 :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박희정 특별전 (3)
한상정
2011.09.30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박희정 특별전, 그 세번째 이야기
만화전시 케이스 분석 2-2 :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박희정 특별전 (2)
한상정
2011.08.29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박희정 특별전 전시 기획!! 그 두번째 이야기
만화전시 케이스 분석 2-1 : 2011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박희정 특별전
한상정
2011.07.27
이번엔 한국만화 백주년처럼 커다란 규모의 전시가 아니라, 단 한 명의 만화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케이스를 들어보자.
만화전시 케이스 분석 1 :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전시
한상정
2011.06.27
2009년 6월 2일, 바로 같은 날 100년 전, 이도영이 <대한민보>에 시사만평을 실었다. 오랜 세월동안 격려보다는 질타를 받아왔던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사라지지 않고, ‘한국만화’라는 이름으로 백수를 누린 것에 대해 2008년 6월, ‘한국만화 100주년 위원회(이하 위원회)’가 문화관광체육부의 5억원이라는 적극적인 예산지원 하에 구성되었다.
전시의 미디어믹스, 만화의 미디어믹스
한상정
2010.12.21
3장에서 전시의 시작을 다루었었다면, 그리고 그 시작으로 다뤄지는 전시가 만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일반적인 경향이 되어버린 전시의 미디어믹스로서의 2003년의 <이미지들의 극장>을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만화 자체의 미디어믹스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의 예로 올해도 발견할 수 있는 <평화의 사진가> 순회 전시를 살펴보자.
전시의 미래 : 전시 ‘서사’에서 전시 ‘스토리텔링’으로
한상정
2010.11.12
이야기, 엄밀하게는 ‘서사’를 다루는 학문을 서사학이라고 한다. 최초로 서사를 다룬 사람을 우리는 종종 아리스트텔레스라고 언급하는데, 그는 ‘시학’이라는 저서에서 다양한 문예학의 기본 개념들을 제시했다. 알다시피, 모든 학문의 유파는 단 하나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동일한 서사학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또는 지역적으로 각기 다르게 발전해오기도 하고 오늘날도 역시 각 연구자별로 입장이 다르다. 최대한 쉽게, 쉽게 설명해보자.
전시의 완성 : 관람객
한상정
2010.10.16
미술의 한 유파 중에서 ‘입체파’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니 브라크니 하는 작가들이 이 유파에 속한다. 이들이 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의 대상을 보는 다양한 시선을 종합하는 것이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생각 아닌가?...
만화전시의 출발과 그 의미
한상정
2010.09.14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은 1974년에 시작했다. 물론 1969년부터 이미 앙굴렘에서 좀 더 작은 규모의 만화행사들이 벌어진 것은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 앙굴렘의 이 행사들의 기원은 1967년부터 시작한 이탈리아의 <루카(Lucca) 만화페스티벌>이다. 비록 1966년엔 다른 도시에서 열렸었지만, 여튼 지금도 남아있는 행사이니 그냥 루카라고 치자.
만화전시의 주요 대상 또는 만화전시의 특성들
한상정
2010.08.14
만화전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자. 만화작품, 만화 창작자... 설마, 이것이 모두? 뭐 놀랄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니까. 크게 나누면 이 두 가지가 맞을 것이다.
전시의 개념과 전시준비과정
한상정
2010.07.14
명사 ‘전시(Ex-position)’의 동사인 전시하다(ex-poser). 즉, ‘밖으로(ex-) 놓다(poser)’. 숨겨져 있던 것, 안에 있던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꺼내놓는 기술.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즉 전시란 무조건, 안에 있던 것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것. 어떻게 보자면 일종의 ‘선물포장술’이다.
만화와 전시, 새로운 세계의 비밀스러운 공유
한상정
2010.06.12
만화읽기는 행복하다. 그 즐거운 기억은 어디까지 거슬러갈까. 그래, 잠시 살았던 마당이 있던 집. 주말만 되면 평소 보기 힘들던 아버지의 지휘아래 남동생들과 마당청소를 해야 했던 낡았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