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만화 출판사를 찾아서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10. 우리 만화의 빈 고리를 메우고 있는 보리출판사
홍지민 2014.09.29
“보리에서 만화책을 발간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낯설어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작품수가 많지 않아 만화 출판사로 소개될 수 있을지 조심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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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판도시에 자리 잡은 도서출판 보리의 사옥입니다.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가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외벽 모습이 꼭 책의 옆면을 옮겨다 놓은 것 같지 않나요? 건물 앞에 버티고 있는 나무는 팽나무입니다. 잎이 늦게 맺히지만 빨리 떨어지는 나무라고 합니다.

 
최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도서출판 보리의 사옥에서 만난 편집부 살림꾼(명함의 표현을 그대로 빌렸습니다) 이경희 씨가 던진 말입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보리는 2008년부터 만화 단행본을 본격적으로 선보여 왔습니다. 올해로 7년째입니다. 그런데 권수가 아닌 타이틀로 따졌을 때 지금까지 선보인 작품은 스무 작품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2008년 이희재 작가의 <아이코 악동이>와 올해 박건웅 작가의 <짐승의 시간>으로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부천만화대상에서 최고상인 대상을 두 차례나 거머쥘 정도로 의미 있는 작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양보다는 질로 승부한다고 볼 수 있죠. 더욱 눈여겨 볼 대목은 보리의 단행본들이 국내 만화 생태계의 다양화를 위해 버팀목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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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은 크게 네 개의 공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지하는 어린이를 위한 문화공간, 1층은 카페, 2층은 책방 등 사무실보다는 독자들을 위한 공간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그래서 이곳 이름이 ‘보리 책 놀이터’입니다.
 

우선 국내 어린이 만화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만화는,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만화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 외연을 넓히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죠. 그 노력이 열매를 맺어 이제는 어른이 만화를 보는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반면 이 과정에서 순수한 어린이 만화는 멸종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학습만화가 출판 시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며 어린이 만화의 찬란했던 시절을 대신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린이 만화가 국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인성을 기를 수 있게 했던 점을 돌이키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2005년 12월부터 보리에서 나오고 있는 어린이 종합잡지 <개똥이네 놀이터>는 무척 주목됩니다. 이희재 작가의 <아이코 악동이> 연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어린이 만화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악동이’는 이희재 작가가 1983년 만화잡지 ‘보물섬’에 처음으로 선보인 장난꾸러기 캐릭터를 새롭게 그린 작품으로 ‘악동이’와 단짝인 거울유령 ‘아이코’의 재미있는 모험을 그렸죠. 2007년까지 연재됐던 내용을 묶어 이듬해 3권짜리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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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보리의 출판 정신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낼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는 문장에서 출판사의 기풍이 느껴지네요.

 
그간 보리는 잡지에 연재했던 작품을 묶어 단행본을 발간해 왔습니다. 김홍모 작가의 <두근두근 탐험대>(전 5권), 하민석 작가의 <도깨비가 훔쳐간 옛 이야기>와 <안녕, 전우치?>(전 2권), 김금숙 작가의 <꼬깽이>(2권까지 발간) 등입니다. 현재 <개똥이네 놀이터>에서는 ‘꼬깽이’를 비롯해 김지연·한나빵 작가의 ‘미운 아기 오리 뿡쉬’, 김종현·이종철 작가의 ‘바다 아이 창대’, 김규정 작가의 ‘레드맨, 우리가 도와줄게!’, 신영희 작가의 ‘히히히 우스개’ 등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보리는 리얼리즘 만화가 재도약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오락성·상업성 위주로 성장해온 국내 만화에 예술성을 부여해 만화라는 장르가 다른 예술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 만화계에서는 1980년대 민중 운동의 흐름 속에 노동 만화, 농민 만화, 빈민 만화 등이 꾸준히 등장하며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이희재, 오세영 작가 등이 사회성 짙은 단편 작품들을 쏟아내며 국내 리얼리즘 만화의 이정표를 세우기도 하죠. 시대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녹여내고, 한편으로 새로운 만화 문법을 제시하는 리얼리즘 만화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사실과 허구를 섞은 팩션에서부터 어두운 현대사를 조명하는 작품,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 등 범주도 다양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리는 사회 이슈를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해 만화로 옮기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작품을 내놨습니다. 2010년 선보인 <내가 살던  용산>이 출발점입니다. 용산 참사를 다룬 작품 입니다. 김홍모·김성희·김수박·신성식·앙꼬·유승하 등 모두 6명의 만화가가 참여해 참사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풀어냅니다. 당시 그림책 작가인 이승현이 글 없이 그림으로만 용산 참사를 바라본 <파란집>이 함께 나오기도 했습니다. 2년 뒤 보리는 박건웅 작가의 <나는 공산주의자다>(전 2권)를 내놓습니다. 앞서 2006년 발간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수기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만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그동안 만화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소재였습니다.

2012년 4월 동시에 내놓은 김성희 작가의 <먼지 없는 방>과 김수박 작가의 <사람 냄새>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 문제를 세상에 고발하며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제작입니다. 올해에는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였던 고 김근태 의원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시간을 직시한 <짐승의 시간>으로 다시 한 번 만화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새만화책에서 2006년 발간한 박건웅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1>을 재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정은용 씨가 쓴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이밖에도 보리는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임소희 작가의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와 용산 참사 이후를 다룬 <떠날 수 없는 사람들>까지 벌써 아홉 차례나 묵직한 주제 의식의 만화를 꺼내놓으며 우리 사회에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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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함께 책을 즐길 수 있는 카페 보리와 철새가 문을 연 1층 공간은 원래 직원들을 위한 식당과 작가 작업방, 창고 공간으로 활용됐다고 하네요. 지난해 지하에 있던 카페를 올려 확장했다고 합니다. 주변 출판사 직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자주 찾아오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만화 전문 출판사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는 보리를 ‘만화 출판사’로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요. 그럼, 편집부 살림꾼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보리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Q. 보리는 어린이 출판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A. 1988년 기획집단으로 시작했다. 인쇄, 발행 정도를 제외한 기획 편집까지 담당했다고 보면 된다. 전집 시장이 활황인 시절이었는데 웅진과 함께 <개똥이네 놀이터>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어린이 마을>(전 12권)을 냈다.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꾸민 전집이다. 이후 <올챙이 그림책>(전 60권), <달팽이 과학동화>(전 50권)를 기획, 편집했다. 그러다가 1991년 출판사로, 1995년 주식회사로 등록했다. 그 즈음에는 어린이 책도 어린이 책이지만, 교육서를 중심으로 단행본을 많이 냈다. 교사와 부모를 위한 <살아 있는 교육 시리즈>는 지금까지 31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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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보리책방은 보리에 출간한 책들을 구입할 수 있는 서점입니다. 책만 파는 곳은 아니고요. 차분하게 책을 읽다가 갈 수 있는 도서관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독서 프로그램도 열린다고 하네요. 보리출판사의 또 다른 식구인 변산공동체에서 생산한 농작물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Q. 세밀화 도감이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A. 출판계에서는 세밀화 하면 보리를 떠올린다. <동물도감> <식물도감> 등 각종 도감이 대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올챙이 그림책>과 <달팽이 과학동화>에 참여했던 이태수 화가 등과 작업을 했다. 세밀화는 한 장을 그리는 데 한 달 정도, 도감에 실리는 그림 모두 그리는 데 3~4년이 걸린다. 하나하나가 금방 나오는 그림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해서 출판사 운영이 되겠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곳도 도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20권 가량 나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7년 간 작업을 한 끝에 2008년 기존 국어사전과는 조금 다른 ‘보리국어사전’을 내기도 했다. 한글만 알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했고, 단어와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도록 세밀화를 보태며 기존 사전의 딱딱한 느낌을 없앴다. 예전에는 <올챙이 그림책>, <달팽이 과학동화> 등 전집이, 요즘에는 세밀화 도감과 보리국어사전이 출판사 살림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Q. 보리는 언제부터 만화에 관심을 갖게 됐나.

A. 만화에 대한 관심은 오래 됐다. <어린이 마을>에도 만화가 실렸다. 또 <올챙이 그림책>, <달팽이 과학동화>에서도 민족미술협의회 소속 화가들, 판화가들, 만화가들과 같이 작업을 했었다. 만화가 보리에게 낯선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보리를 이끌고 있는 윤구병 선생님이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선생님께 여쭸더니 언젠가 광화문에서 열린 만화 화형식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와 만화가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공백을 일본 만화가 채워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했다. 윤 선생님은 만화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져오며, 만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점들이 매도당했는데 만화를 통해 감수성과 창의력을 살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5년 12월 <개똥이네 놀이터>를 창간하게 되고 거기에 실렸던 연재 작품들을 단행본으로 내며 자연스럽게 만화 출판을 시작하게 됐다. <달팽이 과학동화>를 활용해 5분짜리 애니메이션 3편 ‘잠꾸러기 불도깨비’ ‘울타리를 없애야 해’ ‘이런 공장은 싫어’ 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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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인 지하의 개똥이네 놀이터는 개장 전이라 아쉽게도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건물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개똥이네 놀이터로 내려가는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 봤습니다. 보리에서 출간한 주요 작품들이 벽에 적혀 있네요.


Q. 보리가 선보이는 만화 출판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A. 크게 두 가지로 보면 된다. 첫째는 건강한 우리 어린이 만화를 되살리자. 둘째는 만화를 통해 평화 의식을 보다 쉽게 일깨워주자는 것이다. 사회 정의와 반전 등 평화 의식을 담은 만화, 동화책, 그림책들로 구성된 시리즈가 바로 ‘평화 발자국’이다. 2007년 나온 ‘평화 발자국’ 시리즈의 첫 작품은 권정생 선생님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라는 동화를 그림책으로 펴낸 것이다. 6.25전쟁 때 희생당한 어린이와 인민군 병사 이야기를 다뤘다. 나중에 나온 <내가 살던 용산>이나 <나는 공산주의자다> 등도 모두 첫째 권에서 이야기한 평화 의식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된다.


Q. 어린이 만화는 연재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다.

A. 요즘은 어린이 만화를 연재할 만한 매체가 딱히 없다. 만화가도 먹고 살아야 하고, 연재 매체는 그것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만화가들이 만화로 성장하려면 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측면에선 단행본보다 연재가 낫다. 현실적으로 인세는 부족한 편이다. 또 작가 입장에서도 한 번에 200쪽을 그리려고 하면 쉽지 않지만 한 달에 10쪽씩 연재하면 한 달 두 달, 일 년 이렇게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량이 늘어난다. 물론 단행본을 낼 때는 연재했던 내용을 그대로 묶지는 않는다. 앞서 잘못 그렸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다시 그리고 보충하는 등 대부분 수정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Q. 가장 인기 있는 어린이 만화는 무엇인지.
 
A. 어린이 만화는 독자 엽서를 보면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개똥이네 놀이터>는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만든다. 미리 여름, 물놀이, 곤충 등 주제를 제시하고 그림을 받는다. 그런데 아이들은 곤충을 주제로 표지 그림을 그려도 만화 캐릭터를 별도로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 작품에 대한 인기가 반영된다. 그동안 연재했던 작품 중에 최고 인기 캐릭터는 ‘전우치’였다. 요즘 연재되고 있는 ‘꼬깽이’와 ‘뿡쉬’도 인기가 많다.

Q. 어린이 종합 잡지에서는 <고래가 그랬어>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A. 보통 독자들은 <개똥이네 놀이터>는 초등학교 저학년용, <고래가 그랬어>는 고학년용으로 구분한다. <개똥이네 놀이터>는 특히 자연 생태 이야기와 우리 전통 이야기를 되도록 많이 다루려고 하고 있다.

Q. 프랑스 작품인 <꼬마 밤송이 뽀알루의 모험’>시리즈도 눈에 띈다. 해외 작품 출간 계획은 또 없는지.

A. ‘뽀알루’는 윤구병 선생님이 프랑스에 출장을 갔다가 그곳 서점에서 재미있게 읽고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며 들여온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자는 주의다. 독자 수가 작다 보니까 출판사들이 해외 작품 수입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는 국내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화 쪽도 마찬가지다. 좋은 해외 작품이 있다면 들여오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만 앞으로도 국내 작가 작품이 중심일 것 같다. 어린이 만화도 그렇다. 학습만화는 많아도 순수한 어린이 창작 만화는 없으니까 그 빈 고리를 채우는 쪽으로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Q. 만화 관련 시리즈가 다양하다. 최근에는 ‘보리 만화밥’을 시작했는데.

A. ‘개똥이네 만화방’은 잡지에 연재됐던 만화를 단행본으로 묶는 시리즈다. 맹물 명 작가의 <열두 달 토끼 밥상>, 정지윤 작가의 <출동! 약손이네> 등 일부 작품은 ‘개똥이네 책방’ 이름으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이랑 엄마랑 함께 볼 수 있는 <열두 달 토끼 밥상>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인기가 많았다. 성인을 위한 ‘평화 발자국’ 시리즈를 통해서는 주제의식이 명확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르포 만화가 많은 편이다. 만화가들이 작품을 내고 싶기는 한데 국내 만화보다는 외국 수입 만화를 다루는 출판사가 많은 상황이라 보리까지 찾아오곤 한다. 주제의식이 무겁지는 않더라도 좋은 원고라 출판해보고 싶지만 ‘평화 발자국’의 정체성이 약해질 수도 있어 망설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평화 발자국’으로 담길 수 없는 작품을 내기 위해 새롭게 만든 게 ‘보리 만화밥’이다. 만화가의 개성이 담긴 다양한 만화를 담기 위해 마련한 새 그릇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 한 권만 나온 상태다. 우리가 일 년에 서너 권씩 내는 곳은 아니니까 5~6년 정도 지나면 제법 작품들이 쌓여 독자들도 ‘아, 이런 시리즈가 있구나’ 하지 않을까 싶다.


Q. 어린이 출판사의 이미지가 강한데 성인을 겨냥한 만화책, 그것도 사회성 짙은 작품을 내서 독자들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지.

A. 보리를 아는 독자들은 보리에서 내는 책은 좋은 책이라는 믿음을 가져주는 것 같다. 성인이 볼 만한 만화가 별로 없었는데 고맙다고 응원해주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보리에서도 만화책을 내는구나?’ 생경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요즘은 ‘보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구나’로 바뀌고 있다. 성인 만화책을 낸다는 것에 대한 놀람은 없어진 것 같다. 만화 단행본은 일반 단행본보다 힘들다. 만화 장르라는 이유로 독자들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잦다. 여기에 보리에서 나오는 만화책은 주제 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아 선택에 제외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심은 있는데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는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게 해줬다고 생각한다. 용산 같은 경우가 그랬고, 삼성 관련 책도 마찬가지였다. 독자들이 많이 찾아주기도 했다.


Q. 삼성 관련 작품을 준비할 때 이견은 없었는지.

A. 용산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삼성 때도 사실 겁이 나기도 했다. 당시 분위기상 그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어려웠다.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하면 잡혀가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윤구병 선생님이 “다 내가 시켰다고 해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용산 같은 경우는 <두근두근 탐험대>를 함께 작업했던 김홍모 작가가 기획을 갖고 찾아온 경우다. 보리라면 이 이야기를 내 줄 수 있을 것 같았단다. 삼성은 윤 선생님이 김성희, 김수박 작가에게 제안한 프로젝트다. 작가분들이 나중에 한 인터뷰를 보면 제안을 받고 3개월 정도 고민했다고 한다. 누가 뒤따라 오고 감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있었는데 막상 작품을 해보니 신경 쓸 것이 전혀 없더라는 것이다. 삼성 같은 경우는 작가 분들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몇몇 소수를 제외하고 비밀로 유지했다. 캔디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Q. 사회성 짙은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이 어린이 만화 영역까지 오가는 게 이채로운데. 

A. 작가들을 만나보면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 분들이다. 영화도 하고 싶고, 그림책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어디에 한정지을 수 없는 게 바로 작가가 아닐까 싶다. 성인 만화 작업을 함께한 작가 중에서도 어린이 만화를 하고 싶다는 작가가 적지 않다. 잡지 팀에서 <개똥이네 놀이터>에 열 두 명의 작가가 한 달에 한 차례씩 단편을 게재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작가군을 발굴하고 넓혀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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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과 4층이 보리 출판사이구요. 편집부 풍경을 두루두루 살펴봤습니다. ‘평화 발자국’ 시리즈는 물론, 책장 한 가득한 <개똥이네 놀이터>도 눈에 띄네요. 한쪽 구석에는 참고 도서가 가득한 서가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슈퍼히어로 같은 캐릭터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앞장서는 어린이 만화 ‘레드맨 우리가 도와줄게’의 주인공 레드맨입니다.


Q. 보통 만화 작품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획하게 되나.

A. 우선 작가들이 먼저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살던 용산>이나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 같은 책인데, 작가들이 기획을 해서 보리와 색깔이 맞을 것 같다며 찾아왔다. 내부에서 기획을 해서 작가에게 제안을 하기도 한다. 삼성 만화책, <나는 공산주의자다> <짐승의 시간>은 그렇게 작업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작업을 처음에 박건웅 작가에게 제안했을 때 향후 10년 간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허영철 선생님의 책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작가들 입장에선 여러 제안이 들어와도 먼저 마음이 가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성인 만화 같은 경우는 내부에서 기획을 하더라도 큰 주제만 제시하고 세부 구성이나 그림 등은 대부분 작가 역량에 맡기는 편이다. 하지만 어린이 만화는 다르다. 편집자가 세세하게 관여하는 경우가 잦다. 어린이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 거를 수 있는 눈이 아직까지는 여물지 않았으니까 좋은 것만 선별해서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Q. 세월호 참사 관련 기획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A. 현재 사회 이슈와 맞닿은 작품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빨간 약>(가제)이 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전교조도 종북,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종북 등 무슨 이야기만 하면 종북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가 있다. 김홍모, 김성희, 김수박, 권용득 작가 등이 전교조, 부정선거, 일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남파간첩 등 다양한 소재를 갖고 작업을 하고 있다. 단행본 한 권만으로 소화하기 힘든 주제인 것 같다. 목표는 오는 11월 발간인데 잘 마무리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취재가 녹록하지 않다. 또 준비할 때는 각각 테마가 그렇게 큰 이슈가 아니었는데 한 번씩 이슈가 되는 문제가 생긴다. 작업을 마무리를 하려고 하면 새로운 사건이 터지고 해서 작가 분들이 애를 먹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제안이 오간 것은 없다. 사석에서 이야기해보면 세월호에 관한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분도 있고 힘들겠다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세월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야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테마가 아닌가? <빨간 약> 같은 경우에도 전면적이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Q. 출간 준비 중인 또 다른 단행본은 어떤 것이 있나.
 
A. 가장 최근에는 박건웅 작가의 <노근리 이야기1>도 냈다. 새만화책에서 나왔던 작품인데 최근 재출간했다. 박 작가와는 작업을 계속 이어갈 것 같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제주 4.3 항쟁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우리 쪽에서 제안한 것도 있고 해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짐승의 시간>도 2년 정도 걸렸으니까 시간은 좀 걸릴 것 같다. <짐승의 시간>의 경우 처음에는 250쪽 정도로 생각했는데 작업을 하며 560쪽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학생운동으로 인한 투옥 경험을 만화로 담은 김홍모 작가의 작품을 선보일 것 같다. 휴머니스트에서 나왔던 다큐멘터리 만화 잡지 <사람 사는 이야기>에 ‘좁은 방’이라는 제목으로 한 회가 실렸던 작품이다. ‘평화 발자국’보다는 ‘만화 밥’ 시리즈로 나올 것 같다.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된 윤승운 선생님의 ‘청개구리 글방’도 내년 상반기 중에 단행본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원로 작가 선생님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선생님들 작품을 계속 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밖에도 몇몇 준비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기는 한데 삼성 때처럼 작가들이 편하게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금은 오픈 단계는 아니다.


Q. 성인 만화, 특히 르포 만화 독자층이 많이 늘었는지.

A. ‘내가 살던 용산’이나 ‘먼지 없는 방’ 등은 반향이 컸다. 얼마 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섬과 섬을 잇다>도 독자들이 많이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짐승의 시간>의 박건웅 작가의 경우 ‘만화, 시대의 울림’을 주제로 열린 부천만화축제에서 윤태호 작가와 나란히 사인회를 열었는데 박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만화 팬들도 적지 않아 아쉬웠다. 며칠 뒤에는 <섬과 섬을 잇다> 작가들과도 사인회를 가졌는데 찾아오는 독자들이 적어 박 작가가 속상해 하기도 했다. 프랑스 앙굴렘 만화 축제에서는 오랫동안 줄을 서서 책에 사인을 받아가고, 작가도 정성들여 사인을 해주는 사례를 전해주며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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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보리출판사를 세운 윤구병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전직 대학교수, 철학자, <뿌리 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 농사꾼, 출판사 대표 등 수많은 직함 가운데 농사꾼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는 분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보면 아이들을 정직하게, 참된 삶을 가꾸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는 고 이오덕 선생님의 사상을 기본 정신으로 보리 출판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한국의 만화 출판사를 찾아서
켜켜이 쌓아온 출판사의 전통과 가치를 만화책에도 담아내고 있는 창비
홍지민
2014.12.31
이번에 찾아간 곳은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창비입니다. 문학, 인문, 청소년, 어린이 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책을 선보이는 출판사입니다.
차근차근 의미 있는 울림을 쌓아가고 있는 사계절
홍지민
2014.12.02
이 작품은 달랐습니다. 대학 입시 미술학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씁쓸한 일상을 담았습니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청소년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한 작품이 드물었던 터라 단번에 만화계 안팎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11. 예술 만화 외고집의 길을 가는 미메시스
홍지민
2014.11.02
2000년을 전후로 국내 문학 출판사들은 앞다투어 만화 브랜드를 선보이며 국내 출판 만화 시장에 새 기운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러한 브랜드들은 ‘빅3’인 서울·대원·학산이 대표하는 코믹스와는 달리 품격 높은 만화에 초점을 맞추며 국내 만화 시장의 작품 폭과 독자층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05년 등장한 열린책들의 ‘미메시스’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10. 우리 만화의 빈 고리를 메우고 있는 보리출판사
홍지민
2014.09.29
“보리에서 만화책을 발간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낯설어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작품수가 많지 않아 만화 출판사로 소개될 수 있을지 조심스럽네요.”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9. 한국웹툰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출판사, 재미주의
홍지민
2014.09.03
요즘 우리 만화는 웹툰 시대로 접어든지 오래 입니다.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떤 작품들은 독자들의 사랑을 한껏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들은 쉽게 잊혀 지기도 합니다. 웹툰은 책으로도 만들어져 독자들과 만납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연재됐다고 해서 모두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사들은 소장 가치가 있고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작품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8. 의식과 색깔에 취향을 보태가는 만화 전문 출판사 길찾기(이미지프레임)
홍지민
2014.08.12
뜨거운 여름을 맞아 찾아간 국내 만화 전문 출판사는 색깔 있는, 의식 있는 출판사로 정평이 난 ‘길찾기’입니다. 길찾기의 보금자리는 서울시 관악구와 경기도 과천 사이에 놓인 남태령 고개 너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옆 삼거리로 들어서게 되면 유려한 자연을 벗 삼은 주택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길찾기 사무실도 바깥에서 보면 전원주택에 다름 아닙니다. 무심코 지나가다 보면 출판사가 있는 줄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7. 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거북이 북스
홍지민
2014.06.27
일곱 번째로 탐방하는 만화출판사는 바로 ‘거북이북스’입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며 만화의 영역을 넓혀가는 출판사로 정평이 난 곳입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6.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다 휴머니스트
홍지민
2014.06.10
휴머니스트는 만화 ‘전문’ 출판사는 아닙니다. 10여 년간 세상에 내놓은 만화는 모두 합쳐 100권에 미치지 못합니다. 휴머니스트의 전체 책 가운데 만화는 7분의 1정도에 불과합니다. 절반가량은 어린이 학습만화입니다. 그럼에도 ‘만화 출판사’로서 휴머니스트를 탐방하게 된 까닭은 국내 출판 만화 시장의 새로운 흐름에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5. 다음이 더 기대되는 개념 출판사 세미콜론
홍지민
2014.02.15
2000년 즈음부터 문예출판사들이 새 브랜드를 내세워 만화 출판에 뛰어듭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 2005년 문을 연 두 곳이 있습니다. 민음사의 ‘세미콜론(;)’과 열린책들의 ‘미메시스’입니다. 두 곳 모두 한 때 우리사회에서 사회 악(惡)으로 규정됐던 만화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있는 곳입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4. 만화출판계의 용자 애니북스
홍지민
2014.01.29
‘애니북스’는 바로 그러한 용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장사가 되니까 지금까지도 용자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화 팬들이야 덕택에 그동안 ‘정발’로는 접하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즐길 수 있게 돼 그만입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3. 후발주자지만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학산문화사
홍지민
2013.12.24
국내 만화출판사 빅3의 한 축인 학산문화사는 일본으로 치면 슈에이샤(集英社)와 닮은꼴입니다. 탄생 과정이 그러합니다. 슈에이샤는 쇼가쿠간(小學館)에서 독립해 일본 3대 만화 출판사로 성장한 출판사입니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펴냈던 1980~1990년대가 정점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요즘도 일본 3대 소년 만화로 꼽히는 ‘나루토’와 ‘원피스’, ‘블리치’를 선보이며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2. 1990년대 이후 국내 만화 출판 시장을 움직인 대원씨아이
홍지민
2013.11.27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2. 1990년대 이후 국내 만화 출판 시장을 움직인 대원씨아이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1. 빅3의 맏형 서울문화사
홍지민
2013.10.29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1. 빅3의 맏형 서울문화사
한국의 만화출판사를 찾아서 - 서론
홍지민
2013.09.24
이번 출판사 탐방이 한국 만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또 앞으로 만나는 우리 출판사 가운데 세계 만화 시장에 우리 만화를 널리 알리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름을 떨칠 출판사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