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인생의 첫 만화 : 김화섭, 리어카 만화의 비밀
김화섭 (김앤장 법률사무소 전문위원) 2018.07.12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옛날 어린 시절,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는 산골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만화책을 빌려 주는 리어카 상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 1960년대 만화책

그 당시에도 시골 산골마을을 다니던 엿장수들이 낡은 리어카 위에 엿판을 맨 앞에 놓고, 그 뒤로는 온갖 생활용품을 잔뜩 싣고 다니면서 엿가위를 특유의 박자에 맞춰 채쟁챙 거리며 마을의 구석구석에 있었던 뚫어진 고무신, 빈 비료 포대, 못 쓰는 양재기 등 헛간과 뒤꼍의 온갖 잡동사니를 휩쓸어 갔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런 엿장수가 마냥 신기하여 동네 어귀부터 윗말 아랫말 옻나무골을 거쳐 다른 동네로 빠져 나갈 때까지 뒤쫓아 다녔던 기억을 산골출신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자료 : 한국관광공사(2018)

산골마을의 겨울 방학이란 아이들에겐 뚜렷한 일정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릴없이 엿장수의 출몰에도 다함께 눈과 귀를 모아가며 그를 뒤따라 다니기 일쑤였다. 그 뿐만 아니라, 동구 밖 외부세계로부터 소식을 물고 오는 이야기든 물건이든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온갖 것들에 대해 마을사람 모두가 다 같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눈길을 모으며 생활하던 시절이다.

그런 특이한 일이 없는 날에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담벼락 양지쪽에 쭉 늘어앉아서 눈썹위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얼굴만 찡그리면서 무료함을 달래곤 하였다. 그나마 아이들의 놀거리라고는 얼음판에 나가 썰매를 타거나 마당가에 구멍을 파고 구슬치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 썰매를 마련하지 못하였거나 유리구슬을 살 수 없었던 아이들은 남들이 하는 놀이를 도와주거나 이를 지켜보며 비아냥거림이나 훈수를 두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얼음이 꽝꽝 얼지 않거나. 마당 주인 할아버지께서 땅을 파헤친다고 역정 내 쫓겨난 후에는 그마저도 놀지 못하니 풀이 죽는다. 그리되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는 것을 마냥 쳐다보거나 찬바람 스산한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애꿎게 쥐불놀이나 하면서 추위를 쫓는 것이 다반사였다. 읽을거리조차 거의 없어서 기껏 철 지난 저수지에 봄철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신문지 조각들이 빛바랜 채로 저수지 가장자리 땅바닥이나 수풀더미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들을 뒤적이며 귀하게 읽었던 기억도 있다.

산골에서 만나게 되는 만화(漫畵)란 먼저 교과서에 실린 삽화가 떠올려진다. 아이들이 익혀야 할 글자만으로 그 뜻을 제대로 전하기 어려울 때, 독자의 상상력을 돕기 위한 그림들이다.

△ 자료 : 오마이뉴스(2008)

이어서 생각나는 것들은 우선 논마지기나 가졌거나 대처에 나가 공부 했다는 양반들이 가뭄에 콩 나듯이 구독했던 신문에 실린 4칸짜리 연재만화들도 있었으나, 아이들이 눈 여겨 볼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산과 들에 떨어져 있는 북한에서 뿌려진 삐라에 실린 선동적인 만화가 산골아이들이 접할 수 있었던 만화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재미난 저 밖 세상의 이야깃거리에 목말라 있는 아이들은 조각조각 끊어질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쪽 만화들을 보고난 후엔 더욱 더 장편만화에 대한 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 자료 : 소년조선일보(2007)

그러던 산골 아이들에게 만화책을 빌려주겠다는 리어카상인의 출현은 그야말로 눈과 귀가 번쩍이고 코가 벌렁댈 만한 대사건이었다. 리어카 좌판에 가득 찬 형형색색 만화책들이 제각기 폼을 내며 산골 아이들을 유혹하였다. 전쟁만화, 스포츠만화, 순정만화, 전설만화, 역사만화, 우주만화 등 그야말로 산골 밖 세상소식 뿐만 아니라 저 우주 멀리 천왕성 해왕성 등을 포함한 태양계 그 넘어 은하계에 걸쳐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밤하늘별처럼 반짝거리며 우리들 마음속에 알알이 박혀 들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판도라 상자를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현실이 안타까워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빌려 주는 것이라 설명하였지만, 지금처럼 대여하는 방식이 아니고, 일종의 선구매한 후 물물교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읽은 만화책을 주고 새로운 만화책을 교환할 수 있는 방식이라 선전하고 다녔지만, 미리 만화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아이들에겐 맨 처음부터 만화책을 사야만 했던 것이다. 설령 만화책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단행본인 경우 여러 권이 시리즈로 구성된 재미있는 만화를 볼라치면, 추가되는 권수만큼 더 많은 만화책을 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값이 만만치 않았으니 부모님들께서 이를 쉽사리 구입해 줄 여력이 마땅치 않은 처지였다. 그러니 만화는 나쁜 것이라고 이를 에둘러댔으며 오히려 아이들을 질책하면서 사 줄 수 없는 미안함을 감추기 일쑤였다. 즉,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이 만화타령이나 하냐면서 곧바로 꾸중만 듣게 되었다. 실은 부모님께서 ‘하라는 공부’는 조선조 선비들이 사서삼경을 외우듯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어 대면서 구구단을 포함한 각종 공식을 달달 외워대는 것을 의미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그 잘난 재미없는 학교공부와 저절로 마음이 이끌리는 만화책 보기를 비교하시면서 만화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 책망만 하시면서 혀끝을 끌끌 차는 부모님 태도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부모님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던 만화책을 어떻게 하든 사서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 만큼 절실하였기에 정말로 간이 밖으로 나왔어야 가능했던 일들도 서슴없이 저질렀던 아픈 추억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곳간문의 열쇠를 손아귀에 넣고 뒤주의 쌀을 훔쳐서 만화책을 사기도 했으며,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산속에 몰래 숨겨 두고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아이들은 부모님들께 죄를 지었으니 제 발이 저려왔고, 숨겨놓은 만화책이 간밤에 쏟아졌던 장대비에 성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겹쳐 가슴을 짓눌러 와 참기 어려웠다. 마침내 이실직고하기에 이르렀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눈을 꽉 감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는데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삼촌이 알밤을 때려서 눈을 떠보니, 부모님들께서 실소를 금치 못하시면서 어이없어 웃고 계셨는데, 또 삼촌이 정수리에 알밤을 때리면서 “다음에 또 그러면, 크게 혼 구멍을 낼 것이야” 라고 야단쳤다. 그리곤 우리를 끌어 당겨 부여안으셨다.

비로소 억누르고 있었던 죄의식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겨우 내내 리어카에 넘쳐나는 판도라 상자들을 과감하게 열어젖힐 수 있었다. 이 상상력이 넘쳐나는 세상을 알아 가면서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날아다니는 양탄자를 타고 다니면서 우주와 지구를 넘나들고 과거와 미래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고, 괴뢰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할 것이며 밝은 미래를 여는 과학자도 되고 싶었으며, 스위스 산골의 노랑머리 소녀와 함께 아름다운 꽃밭에서 춤을 추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진정 교과서만으로 찾을 수 없었던 소중한 꿈들이 마음속에 자라는 아이로 커 갔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교과서 공부, 학교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었으니, 스스로가 평생 누려야 할 행운을 드디어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아이들이 ‘해야 할 공부’에는 만화를 보는 것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린 시절 반드시 익혀야 했던 역사, 스포츠 등에 관한 이야기, 나아가 우주현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온통 만화책을 통하여 쉽게 앎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상상을 쫓아가는 과정에서 인생의 꿈이란 것이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생 기억에 남아 있어 머리가 하얗게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아이들이 반드시 ‘해야 할 공부’로 좋은 만화책 보는 것은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만화책 삽화가 공부를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편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화는 한 컷의 내용과 그림이 모두 일치하기 때문에 인지가 조화되어 이해력을 높일 수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만화의 교육적 가치가 새로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만화책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안타까움이 있지만,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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