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관제 漫步만보_ 원로 만화가 순례 ⑧ 이소풍
‘억세게 재수 좋은 소년’
조관제 2018.01.25




만화가들이 주로 모이는 행사의 뒤풀이 자리는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특히 오랜만에 만난 원로 만화가들은 나름의 상상력과 화려한 수사가 곁들여진 입담으로 그들이 맹활약했던 전성시대를 회상하며 나누는 이야기들로 소란스럽게 이어진다. 그런 왁자지껄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앞에 놓인 술잔만을 벗 삼아 말없이 미소만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이소풍 선생이다.
시시콜콜한 그의 행적을 이끌어내어 ‘조관제 만보’의 독자들을 위한 이야기 거리를 주섬주섬 챙겨야 하는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그의 스타일을 잘 알기에 취재에 꽤나 애 먹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부천에서 그가 거주하고 있는 수원까지 마치 여정(旅程)과도 같은 이동 거리를 배려해서 이소풍 선생은 가산 디지털 역까지 필자를 마중 나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린 훤한 대낮이라 술도 없이 커피를 마시며 취재를 하려니 걱정부터 앞섰지만, 그가 챙겨 온 묵직한 가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귀한 자료들 덕분에 술자리만큼이나 유쾌한 대화가 오고갔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만화계 입문하다

이소풍은 부산에서 줄곧 학교를 다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여느 한국의 여성들처럼 그의 모친은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느라 전문적인 화가의 꿈을 접고 취미로만 그림을 그리셨는데, 지금도 이소풍은 모친의 남다른 그림 실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모친의 영향으로 이소풍의 삼 형제는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형은 서양화가로, 동생도 한 때 만화를 그리기도 했었고, 만화영화계에서도 활동을 했다.


이소풍이 유년 시절을 보낸 부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미국 만화를 볼 기회가 많았는데, 미국 만화를 그대로 옮겨 그리는 모사(模寫)가 소년 이소풍이 즐겨하는 소일거리였다. 막연히 화가 또는 만화가로써의 인생을 고민하던 차에 그는 당시의 인기 만화가 ‘이정민'과의 인연을 통해 본격적인 만화가로써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미국 만화를 보며 여러 화풍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학생 이소풍의 습작 활동을 소개받은 이정민은 그의 실력을 인정, 함께 일을 하자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정민의 연락을 받고 만난 이소풍은 박기정, 박기준, 박부성 등 당시의 인기 만화가들이 활약하고 있었던 출판사 <크로바 문고>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화풍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이소풍에게, 약화체 화풍의 작품을 그리던 이정민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시 인기 작품이었던 <도돔바 행진곡>, <꽃서울 창경원> 등의 작업을 맡겼다. 이정민은 60년대 초에 <크로바 문고>에서 데뷔하여 인기를 얻은 만화가였는데, 작가이면서도 사업가적인 사고를 가졌던 선배였다. 창작 활동보다 출판사 창업을 위해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이정민은 1966년 <진선미> 출판사를 창업하면서 <크로버 문고>와의 관계를 끝내는데, 이소풍도 그를 따라 <진선미> 출판사로 옮긴다.

1967년, 차츰 자신의 팬덤을 확보해가던 이소풍은 갑작스런 입영 통지를 받고 군 입대를 하게 된다. 그동안 힘겹게 구축한 만화가 ‘이소풍’ 이름 석 자가 군 복무 기간 동안 독자들로부터 잊혀 질 것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에 이정민은 ‘이소풍’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출판사에서 끊김 없이 작품 발표를 이어가게 하여 이소풍의 팬덤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군 복무를 마치고 나면 다시 본인이 그 필명을 돌려받으라는 쉽지 않은 배려를 해주었다.
그 당시 출판사에서는 인기 있는 만화가의 비슷한 화풍의 작품을 그리는 신인 만화가를 데뷔시켜 출판사의 외형을 키우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김영총’과 ‘이행남’ 작가도 이런 방법을 통해 데뷔를 시켰지만, 만화가로 성공해서 끝까지 남은 사람은 이소풍 뿐이었다.
이소풍, 이정민은 각자가 팀을 나누지 않고 함께 섞여 바쁜 팀을 서로 도와주도록 하는 스튜디오 방식으로 운영을 했다.어느 듯 이소풍은 그를 이끌어 준 인기 만화가 이정민의 원고료와 차이가 별로 없었을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억세게 재수 좋은 소년>의 빛과 그림자

이소풍은 군 제대를 앞둔 1967년, <한국아동만화가협회> 정회원 입회 심사에 통과되어 정식 만화가협회 회원이 된다. 그 당시 자신의 이름으로 만화가로 데뷔하기 위해서는 한국아동만화가협회 회원이 아니면 출판사에서 작품 발표를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중반, 청계천에 있던 ‘청소년 회관’에서 치루었던 신입회원 시험에서 이소풍과 함께 합격을 했던 이로는 순정만화가 ‘이해경’과 지금은 <대원미디어> 회장인 ‘정욱’ 등 몇 사람뿐이었을 정도로 그 당시는 신인 작가들이 만화가협회에 가입하기에는 꽤나 어려웠던 관문이었다, 이후에는 회원 가입 심사는 없어지고,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여 추천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간접심사 제도로 바뀌었다.소셜네트워크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즈음의 젊은 만화가들에게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가 데뷔 조건이었던 것이다.

만화가협회 정회원으로 인정받은 이소풍은 제대 후 본격적으로 ‘이정민’ 이름 대신 ‘이소풍’ 이름으로 ‘진동일 시리즈’, ‘5소년의 모험’, ‘어느 추운 겨울밤의 여행’ 등 많은 인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군소 출판사들을 대상으로 집요한 수단과 방법으로 M&A에 나선 <합동>출판사가 만화 출판계를 장악하기 시작했었지만, <크로버 문고>와 <진선미 문고>는 끝까지 버티었다. 그러자 <합동>은 전국 만화 대본소에 압력을 행사하여 경쟁 출판사의 유통을 방해하였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진선미 문고>는 폐업을 하게 된다.
거래처는 비록 폐업을 했지만, 그의 실력을 아는 출판사에서 청탁을 받고 문하생들과 함께 <부엉이 시리즈>, <우주문고>, <상록문화사>, <칠성문화사> 등에서 작품을 하다가 1972년에 <소년한국일보사>에서 설립한 <한국일보 도서>로 옮긴다. 그 해에 <한국일보>와 <합동>출판사의 독점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이정민, 하영조, 하고명, 하정균, 하룡, 강철수 등 다수의 작가가 참여한 작가출판사 <동진사>가 출범하기도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했다.


80년대 대중문화 개방이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고우영의 ‘수호지’ 등과 같은 성인 만화 장르의 약진이 시작되고, 아동 만화는 차츰 침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성인 만화의 붐에 편승한 출판사에서는 오등신 ‘만화체 화풍’의 어린이 만화보다 팔등신 ‘극화체 화풍’을 더 원했는데 이소풍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아동만화 출판계의 어려움으로 이소풍의 작품도 차츰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한다. 수익이 줄어드니 작품 제작 권수도 줄어들고, 그 여파로 함께 일하던 팀원들의 생계 보장이 어려울 정도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인기 만화가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크로바 문고>에서 데뷔할 때부터 알게 된 <두통이> ‘박기준’의 소개로 청소년 잡지로 인기 높았던 <여학생> 부록에 만평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을 본 <여학생> ‘박석준’ 주간이 여성월간지 <여원>에 소개를 해서 잡지 만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중학생> 편집실에 근무 했던 만화가 ‘이행남’이 연재만화를 부탁해서 연재를 했었는데, 인기가 있어 연재를 끝낸 다음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양계협회> 회지에 32년간 연재를 하고 있는 ‘달띠 부부’는 잡지 <여학생>의 미술부 기자였던 ‘박석규’의 소개로 시작 했다. 처음 청탁 할 때는 ‘닭’과 관련된 소재로만 해 달라고 했지만, 아이디어 도출에 한계가 있어 담당자와 협의를 거쳐 작품 소재 결정에 대한 폭넓은 권한을 인정받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연재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연재를 한 이소풍의 저력도 대단하지만, 변덕 심한 ‘회사 회보’의 환경에서 32년이란 긴 기간 동안 연재를 하도록 지면을 할애 해준 양계협회지 편집진의 만화가에 대한 존중에 찬사를 보낸다.

만화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소풍은 1985년에 친구이자 동료 만화가인 ‘김준’의 소개로 <신원만화영화사(대표 :유성웅 사장)>에 입사를 한다. 만화 영화도 매체만 다를 뿐 작화에 해당하는 업무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만화영화용 원화 그리기에 새로운 재미를 느낀 이소풍은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그 시대 만화 영화사 작업 환경은, 출근 시간이 비교적 늦어 여유도 있었지만, 바쁠 땐 야근이 다반사였고 밤을 새며 작업하기도 했다. 회사에 소속되어 매일 나가야 하는 것이 불편했던 이소풍은 프리랜스로 감독과 원화를 그렸는데, 그의 실력과 성실함 때문에 작업할 일이 계속 있었다.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감독이 해야 할 일은, 프로젝트를 진행 할 때는 일정을 맞추기 위해 프리랜스들을 모아 작업을 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다. 애니메이션 회사마다 작업에 필요한 절대 인원인 소수의 고정 멤버가 있었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함께 할 프리랜스 애니메이터들을 구하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프리랜스 애니메이터들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나는데, 작품에 수정이 나오면 납품 일정은 촉박하고 손은 모자라 다급해지면 감독인 이소풍이 모두 책임지고 해결을 해야만 했다. 참여했던 이들이 함께 작업을 해서 고쳐야 하지만, 프리랜서들은 여러 회사 작업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돈 벌이 좋은 것’부터 먼저 작업을 하느라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신원영화사>에서 <국제 영화사>를 거쳐 일본 만화영화가 시들해지고 미국 만화 영화 붐이 일어나던 1988년에 미국 애니메이션계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넬슨 신(신능파)’ 회장이 설립한 회사 <에이 콤>에서 근무를 했다.
1996년에 극장용 만화영화 이현세 원작의 <아마겟돈>을 제작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회사를 설립할 때 이소풍은 초빙을 받는다. 콘티는 이현세가, 감독은 이소풍이 맡아 작업을 했던 이 작품은 만화영화계 환경이 막바지 호황에서 한 풀 꺾일 때였지만 흥행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당시 인기 만화가의 단행본 뒷면에는 만화가를 지망하는 독자들의 투고 작품을 게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때 이정민의 작품에 독자 투고와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만화계에 입문한 이들 중에 제일 성공한 사람이 바로 ‘이현세’이다. 이현세는 이정민의 팀원이었던 ‘하영조’의 눈에 띄어 그의 문하로 갔는데, 하영조 역시 이소풍과 같은 이정민과 한 팀이기 때문에 족보로 따지자면 같은 계열의 직속 후배인 셈이다.
애니메이션 <아마겟돈>이 마무리 되면서 이소풍은 다시 넬슨 신 회장의 부름을 받아 A파트 ‘여영욱 감독’과 함께 송파에 새로 사옥을 지어 옮긴 <에이 콤>에서 작업을 했다.

그 시절 그 사람들

이소풍은 만화가협회 이사회 때나 만화가협회 회장 선거 때 만나 서로 인사를 해서 웬만한 만화가는 다 볼 수 있어 아는 이들이 많다. 대선배 ‘이상호’ 선생을 비롯하여 ‘손의성’, ‘백산’, ‘토니장(장병욱)’ 그리고 하씨 형제 만화가인 ‘하영조’, ‘하고명’과는 합동에서 같이 거래를 해서 각별하다고 한다. 특히 ‘임웅순’, ‘한희작’은 오랜 친구로 지냈던 이였고, ‘김태곤’과 ‘김준’ 은 한 동네에서 살며 자주 만나 이야기 나누던 술친구이다.

1972년, 박기준이 주도하여 ‘만필회’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는데, 14명의 회원이 함께 활동을 시작하였다. 박기준을 비롯하여 정훈, 이우봉, 심명섭, 최정수, 여태수, 차형, 천광석, 계월회, 박부길, 박수산, 김태곤, 김준 등 당대 인기 만화가들이 주요 멤버였다. 주로 문광부(지금의 문체부)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한 산업 현장 견학도 가고, 봄, 가을에 야유회도 다니며 끈끈한 정으로 서로의 애환을 나누었던 모임이다.
‘만필회’ 멤버는 거의 이소풍의 선배였는데. 특히 최정수, 이우헌은 같은 동네에서 살아 자주 만났다. 그 때 만났던 회원들 중, 당대 호러 만화의 대가였던 ‘계월희’는 브라질로 이민을 갔고, 선배 황장우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외 이제는 고인이 되었거나 병석에 누워있는 선배들도 많아 마음 아파했다.

잃어버린 이소풍의 시간을 위하여

이소풍은 1973년에 ‘이상호’ 선생의 주례로 많은 만화가 동료들의 축하 속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애틋한 부부의 인연도 잠시, 지병으로 오랜 세월동안 병석에서 투병하던 아내는 이소풍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2005년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고 홀로 남은 이소풍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학창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유화와 수채화 공부를 시작한다. 보문동에 있는 <가톨릭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3년 만에 수료를 하고, 살고 있는 수원과 가까운 <홍익대학교 미술디자인 교육원> 화성 캠퍼스에 등록하여 2년을 순수회화 공부를 했다.


<가톨릭 미술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교우의 권유로 경희대 ‘미술전문 지도자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대학원에 원서를 내게 된다. 서예 초대 작가이며 인덕대학교 외래교수, 그리고 홍대 교육원을 수료한 이소풍의경력 덕분에 경희대학교 교육 대학원에 입학 할 수 있는 요건이 되어 합격을 했다.
중국어에도 관심이 있어 중국어 선생의 소개로 서예까지 배우게 되었다. 서예는 동네 주민센터에서 국전 심사위원 경력의 선생에게 10년째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문의 7가지 서체 중 지금은 4번째 서체 공부를 하고 있다. 이소풍의 실력을 눈여겨 본 선생이 서예전에 작품을 내 보라는 권유로 출품을 하기 시작했는데 출품한 작품마다 입선과 특선을 하게 된다. 그 누적 수상 경력이 쌓여 이소풍은 현재 서예초대작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소풍은 그 동안 함께 공부를 했던 교우들과 봄, 가을에 몇 차례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그의 다채로운 장르는 만화에서부터 서예, 순수미술까지 더 하면 2개월에 한 번씩 전시를 하는 셈이다. 순수 미술 공부를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만화도 충분히 훌륭한 팝 아트로 확장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이라고 한다.
작품 타이틀이 몇 백 개가 되니까, 시리즈로 출간한 만화책 권수로는 몇 천권을 발표했던 이소풍이지만, 지금은 원고 100권 정도와 아동만화 몇 십 권만 보관하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출간된 만화 단행본을 만화가에게 증정을 했는데, 단행본은 보관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대다수의 만화가들은 고물 장사들에게 무게로 팔아먹은 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작품을 하면서 겪은 모멸감이 생각나서인지, 자신의 만화 단행본을 받는 즉시 많은 이들이 보는 면전에서 찢어 버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풍은 나름 열심히 모아 둔 단행본 만화를 필요로 하는 기관에 기증하기도 하고 동네 꼬마들에게 다 나눠 주느라 많이 없어졌다고 했다. 거래 초창기 때 만화 출판사에서는 만화원고를 만화가들에게 돌려주지 않으려고 했었다. 출판사에서는 나름대로 꿍꿍이속으로 그런 횡포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만화가들 역시 원고에 대한 귀함이나 애착 같은 것이 없어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출판사에서 만화가들에게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원고들을 찾아 가라고 했다. 이소풍도 오랫동안 발표했던 원고가 용달차로 가져와야 할 정도로 많은 분량으로 출판사 창고 안에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원고들만 대충 챙겨 들고 나왔던 일을 돌이켜보니 아쉬움 마음이 크다고 한다.


술자리였었더라면 이소풍의 힘들었던 가족사와 인기 만화가로써 살아 온 수많은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벌건 대낮에 맨숭맨숭한 얼굴로 마주 보면서 더 이상 무거운 입을 열 재간이 없어 아쉬웠다. 많은 시간을 자신을 돌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소풍은 70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투자로 한가할 틈이 없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익힌 만화와 순수 미술을 접목시킨 이소풍의 근사한 작품 전시회를 기대하며 찻집을 나섰다.

이소풍(본명 : 이현식)

1946년 생
1965년 만화 '억세게 재수 좋은 소년'(크로버 문고)으로 데뷔
1970년 진동일과 4차원 정보부 시리즈 / 진동일과 마술등잔 시리즈 / 진동일과 도깨비 시리즈 발표.
1980년 청소년 만화 시리즈 / 5소년의 모험 / 어느 추운 겨울밤의 여행 외 다수발표.
1985년 성난 해바라기(성심도서)
1983~1985년 월간 잡지 연재
드라큐라 성의 비밀(여학생) / 파도여 말하라(중학생) / 별난이네(여원)
닭띠 부부(월간 양계) 32년 연재.

만화영화 작품
1985년 신원 만화영화사 근무.
일본, 미국, 캐나다, 프랑스 작품과 국내 만화영화 원화와 감독
국내작품 : 떠돌이 까치, 아리수 변덕 꿈나무, 머털도사. 아마겟돈(감독)
외국작품 : 리틀 포니, 트랜스포머(감독),
글레이더, 배트 맨, 심슨 가족, 실버 서퍼(공동감독)

인덕대학교 외래교수 역임.
2007년~2009년 네이버 블로그 인도 신화 1, 2, 3편 연재.

현재
월간 양계 닭띠 부부 32년 째 연재
카툰 전시 및 네이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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