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이웃집의 갈라파고스 (上)
오카와 부쿠부 <팝 팀 에픽>에서 우치다 타츠루 <일본변경론>까지
박수민 2018.07.25



△ 오카와 부쿠부 <팝 팀 에픽> (진종영 옮김, 대원씨아이)
진종영은 만화 번역계의 황석희가 될 것. 대원의 로컬화는 세계 제일.

극한의 내수용 만화 <팝 팀 에픽>

올해 상반기, 나와 주변인들에게서 가장 화제인 만화는 단연 오카와 부쿠부의 <팝 팀 에픽>이다. 나는 이 만화에 빠져 평소 잘 안 보는 애니 버전까지 마라톤을 했고, 초판 한정 부록 ‘완전 맛 간 스티커’를 얻기 위해 서점을 뒤져 같은 단행본을 두 권씩 구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최근 코엑스에서 개최된 ‘2018 캐릭터 라이선싱 페어’에 가서 곧 정식 판매될 팝 팀 에픽 캐릭터 상품까지 살펴보고 왔다. SNS 팔로우 이벤트로 주는 ‘포푸코’와 ‘피피미’ 부채 앞에서 어느 걸 골라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나를 보고 업체 관계자는 친절하게도 유튜브 구독까지 권해 두 부채를 모두 얻게 해주었다. (이 회사는 장사를 할 줄 안다! 당신들 대박날 거야!)

“인류에게 너무 이른 저세상 만화” <팝 팀 에픽>은 ‘쉬르리얼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 계열의 4컷 개그만화’라고 딱 정의하기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다차원 전개에다 온갖 패러디 요소까지 점철되어 전체 내용의 80% 이상 해독이 불가능한 개그를 즐기는 기괴한 만화다. 만화, 영화, 음악, 방송, 게임 등 현대 일본의 서브컬처는 물론 넷 문화까지 통달하지 않은 이상 한국 독자가 이 만화의 패러디를 즉각 알아채는 건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덕후지만, 이정도로 오타쿠는 아니다. 애니는 매회 위키를 뒤져 주석을 봐야 대충 가늠이 될 정도. 대신 가끔 원전을 아는 패러디가 나오면 쾌감이 느껴진다. 한때 70년대 일본 인협(仁俠)물에 심취했던 나는 애니에서 후카사쿠 긴지 스타일 야쿠자 실록 영화 패러디가 나오자 뒤집어졌다.

△ 캐릭터 라이선싱 페어 2018 <팝 팀 에픽> 부스 (필자 촬영)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디자인 제품을 보고 일본 쪽(죽서방?)에서 아주 흡족해 했다고...

애니 최종회, ‘킹레코드’의 수뇌부들은 <에반게리온>의 ‘제레’마냥 등장해서 올 분기 애니메이션의 “하켄(覇權, 패권)”을 논하고, 이딴 허무적 익살 쓰레기 대신 의도대로 풋풋한 미소녀 애니를 관철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보내 포푸코와 피피미를 제거하려 하지만 되려 콤비에게 역습당해 초토화된다. 실제 현실에서 지난 분기의 패권을 잡은 애니는 물론 <팝 팁 에픽>이었다.

작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다차원 ‘병맛’ 만화는 우리 역시 커뮤니티 게시판과 웹툰에서 비범한 작품들을 자주 접하지만, 병맛을 초월해 저세상까지 도달한 <팝 팀 에픽>의 힘은 역시 강력한 캐릭터성이다. <팝 팀 에픽>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독특하게도 제작위원회 방식을 거치지 않고 스폰서 킹 레코드의 단독 제공으로 완성되었다. 시장에서 팔릴만한 캐릭터만 있다면 무슨 만화를 어떤 방식으로 하던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버려둔 자유도의 결과물이 괴작 수준을 넘어 일종의 발작적인 문화 현상까지 일으켰고, 그 여파가 한국까지 넘어온 것이다.

<팝 팀 에픽> 자체는 철저히 자국 독자 대상으로 그려진 만화이자 일본의 현 세대가 공유하는 작금의 트렌드를 노려 기획된 애니메이션이다. 우선 일본 국내의 수요 즉 내수(內需)를 극한까지 추구한 개그와 패러디는 사실 우리로서는 100% 이해 불가능의 영역. 어쨌든 성공하면 팔리게 되어있는 시장에서, ‘대중성/보편성’이나 ‘글로벌’ 등 최소한의 비즈니스 전략 따위 개나 줘버린 작품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 대중은 기본적으로 모두 고난이도 패러디를 해독하는 중증 오타쿠들이란 말인가? 일단 자기들 입맛에 철저하게 맞추고 보는 일본의 내수 문화 시장은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딴 세상은 진짜 저세상까지 가는 건가?

마블 보다 코난

지난 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10년이 집대성된 이벤트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가 개봉해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했다. 그런데 유독 한 나라에서만 2위에 머물렀으니, 바로 일본이다. 당시 <인피니티 워>를 꺾은 일본 흥행 1위 작품이 뭐였냐면, 극장판 <명탐정 코난 : 제로의 집행인>이었다. 심지어 코난은 개봉 3주차에 접어드는 중이었는데 흥행 기세는 줄어들지 않고 유지되었다. 전 세계 릴리즈는커녕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에만 개봉하는 ‘아니메’에게 마블 프랜차이즈의 10주년 대작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명탐정 코난-제로의 집행인> (국내 8월 8일 개봉 예정) 양측 다 좀 작작 죽여요...

물론 문화적 다양성과 상대주의의 시대에 철지난 사대주의도 아니고, 헐리웃 블록버스터가 무조건 전 세계 흥행 1위를 하란 법은 없다. 그렇지만 좀 유별나긴 하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나와 주변의 반응은,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이라면 그럴 만하다는 것이었다. “걔들은 원래 그래...”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질렸다는 듯 다시 절레절레 흔든다)

아오야마 고쇼의 만화 <명탐정 코난>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이놈의 살인사건은 대체 언제까지 일어날까? 나는 코난보다 (해적판으로 먼저 접했던) 작가의 전작 <야이바>를 더 좋아했다. 추리 만화 취향도 코난보다는 김전일 쪽이었다. (김전일도 결국 지쳐 손을 떼긴 했지만) 단행본을 조금 보다 초반에 그만뒀던 코난은 이제 와서 다시 손대기 힘든 20년의 갭이 생겼다.

말이 20년이지 어마어마한 세월이다. 1994년부터 아직까지 연재 중인 원작 만화는 2017년에 1000화를 달성, 단행본 수가 90권을 넘는다. 96년에 시작한 TV애니메이션 역시 900화 넘게 방영중이고, 극장판도 <제로의 집행인>이 22편째 작품이다. 2018년, 이제 겨우 20번째 작품(<앤트맨과 와스프>)이 나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원작 그래픽노블의 역사를 빼고 영화만 놓고 보았을 때) 일본 입장에서 코난 프랜차이즈에 비교하면 훨씬 후배다. 일본엔 수십 년짜리 프랜차이즈가 차고 넘친다. 2008년 <아이언맨>을 본 소년이 10년이 흘러 성인이 되어 <인피니트 워>를 보는 이미지가 소소한 화제였는데, 코난은 20년이 넘으니 96년생이라면 태어난 이래 그야말로 한 평생을 보고 있을 시리즈인 셈이다. 우리가 아무데나 즐겨 붙여 호들갑떨기 좋아하는 ‘국민’이라는 수사를 진정으로 붙일만한, 일본의 국민 프랜차이즈라 하겠다.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10주년, 코난 애니메이션 20주년 오래 해먹는, 아니 오래 가는 프랜차이즈는 항상 부럽다.

그렇다면 일본은 내수용 작품만 흥행하는가? 물론 아니다. 신기하게도, 우리로선 이제 정말 보는 사람만 보는 시리즈가 되어버린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는 일본에서 여전히 인기를 끈다. 지난 5월 개봉한 <한 솔로:스타워즈 스토리>가 북미와 국내에선 흥행참패를 면치 못한 반면, 일본에서는 한 달 늦게 개봉하고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던 것이다. <인피니티 워>는 안 되지만 <스타워즈>는 되는 나라? 이쯤 되면 뻔한 국수주의 말고 다른 이유를 찾아봐야 한다.

단순하게 일본인들은 자국 만화/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훨씬 좋아한다고 일반화시키는 건 근거가 없고 의미도 없다. 세계 시장과 따로 노는 일본 시장의 특수함은 물론 대중 취향의 다름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시장 생태계를 그렇게 조성하고 있는 힘의 역학을 들여다봐야 한다. 다른 시장 시스템도 원인이지만, 무엇보다도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보다 오히려 독자/관객이 작품과 공유한 시대다. 코난의 사례를 해석하자면, 일본인이 무려 20년 동안이나 질리지 않은 어떤 익숙함의 벽을 최신의 마블은 넘어설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거대한 섬나라에 살아온 국민들이 시공간을 통해 서로 공유하는 익숙한 공기. 우리 반도의 공기와 이웃 섬의 공기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나는 문득 이 ‘공기’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다.

특이점의 나라

일본만의 특수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의 젊은 층은 해가 갈수록 해외여행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여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96년에 463만 명이었던 20대 일본인 출국자 수는 2016년엔 282만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공항의 국제선 유지가 어려울 지경이 되어 올해 일본 관광청이 청년층 해외여행을 지원하는 정책을 논의 중이라고 하니,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집구석 골방에 틀어박히길 선호하는 모양이다. 하긴 후쿠시마 사토시의 중단편집에 실린 동명의 표제작 <누에의 요새>에선 이런 대사가 나오긴 한다. “동서고금의 아카이브에 이렇게 둘러싸인, 축복받은 시대가 또 있을 줄 알아? 이 많은 책들을 놔두고 시내나 쏘다닐 때가 아니라고.” 그렇다. 볼 만화/애니와 할 게임이 쌓여있는데 어딜 나간단 말인가? 하긴 일본의 어느 연예인이었던가, “집세가 아까우므로 집에서만 지낸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자국 문화와 내수 시장에 집중하는 특수한 현상을 논할 때 우리는 ‘갈라파고스(Galapagos)’라는 섬 무리의 이름을 자주 붙인다. 대륙과 격리된 까닭에 진화를 달리한 고유종이 서식하는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했던 이 제도에서 찰스 다윈이 <진화론>의 단서를 얻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특정한 시장에서 국제 기준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현상을 뜻한 경제학 용어가 요새는 주로 사회, 문화적 고립이나 도태를 논할 때 자주 쓰이는 수사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사용하는 “갈라파고스화(化)”란 부정적 표현 역시 일본과 한국에 국한되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나는 고립이나 도태 보다는 ‘특수한 진화’라는 의미에 주목하고 싶다.

과거 칼럼에서도 밝힌 적 있지만, 내가 특히 망가와 아니메 등 일본 대중문화에 많은 관심을 할애하는 이유는 우리의 미래를 일본의 지금에서 상상하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내수의 극한에 도달한 서브컬처와 경제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표본 사례를 나는 일본에서 찾는다. 마치 스스로 고립되길 원하는 것 같은 일본 대중문화의 특이성 때문이다. 일본은 왜 이렇게 특이한가? 이 막연한 질문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던 중, 나는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가 쓴 책 <일본변경론 日本邊境論>(2009)을 만났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인은 변경인이다”라고 선언해버린다. 일본인들 스스로도 떠들기 좋아하는 자국문화의 특수성은 애초에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팝 팀 에픽> 덕질에서 뜬금없이 시작한 필자의 이상한 탐구는 다음 칼럼에서 이 책 <일본변경론> 이야기로 이어진다. To be continued...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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