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인피니티 사가 10년과 대하 서사의 시대
박수민 2019.05.31



엔드게임에 담긴 MCU 10년의 성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의 지난 10년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막을 내렸다. 아이언맨 1편부터 엔드게임까지 22편의 영화를 묶어 공식적으로 ‘인피니티 사가’로 명명하면서 각 히어로들의 탄생과 인피니티 스톤을 둘러싼 모험이 하나의 통일된 서사로 완료된 것이다. 영화역사상 유래가 없을 무모한 기획은 현시대 가장 인기 있는 거대 프랜차이즈로 보란 듯이 성공했고, 그 최종장으로서 2부로 쪼개진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은 MCU의 수장 케빈 파이기 이하 출연진과 제작진은 물론이고 전 세계 관객에게도 일생일대의 이벤트였다.

두 편 러닝타임 합쳐 6시간에 육박하는 영화를 1년간의 인터미션을 두고 보다니, 과거 할리우드 “에픽(Epic)” 서사극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 21세기 유튜브 시대에 재현된 것 같았다. 스포일러를 피하려 첫 상영일자 예매를 경쟁하고 스스로 SNS마저 멀리한 관객들은 영화 내내 MCU가 10년간 구축해놓은 세계관과 캐릭터와 서브텍스트에 정확하게 반응했다.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완전히 정서적으로 공명한 체험이었다. 그동안 착실히 쌓아올린 스토리텔링에 극장 안에서 지극히 정숙한 한국 관객조차 탄성을 내지르고 박수를 보내고 눈물을 글썽였다.


허무맹랑한 슈퍼히어로 장르는 실은 가장 숭고한 주제를 다룬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위해 어느 한계까지 싸우고 희생할 수 있는가? 초인이지만 결국 한낱 인간일 뿐인 영웅들이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동료를, 우주의 이름 모를 절반을 잃고 번민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현실을 사는 관객의 마음까지 건드렸다. 해마다 봄이면 되새기는 아픈 기억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오직 허구에서만 가능한 기적을 위해 불가능한 작전을 시도하는 영웅들이 힘을 모을 때 관객의 가슴은 함께 벅차오른다. 이런 이야기를 3000 만큼 사랑하지 않기란 어렵다.

각자의 시리즈에서 활약하는 온갖 캐릭터가 세계관의 흥망을 건 크로스오버 이벤트에서 만나는 일은 미국 슈퍼히어로 코믹스의 세계 안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는데, MCU는 이걸 실사 영화 시리즈물로 완성해냈다. 기존 영화의 형식과 문법에 맞추기 위해 원작을 개조하던 종래의 방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원작 만화의 본질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화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마니아의 코믹스를 더욱 폭넓은 대중으로 확산하는 매체의 전환일 뿐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결국 라이브 액션으로 다시 보는 마블 코믹스다. 위대한 것은 실사화의 대단함이 아니라 이미 원작 만화에 담긴 정수였고, 만화는 21세기 할리우드를 구원했다.


MCU의 미래와 디즈니 플러스

마블 코믹스의 진정한 가치는 모든 다양한 가능성의 공존이다. 오직 한 명만 독점하지 않는 영웅의 자리는 얼마든지 다른 능력자가 대체할 수 있다. 캐릭터의 선악 포지션은 물론 성별도 바뀔 수 있다. 필요하다면 또 다른 지구까지도 백업하는 세계가 마블이다. 오랜 프랜차이즈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전통의 히어로들을 죽이고 또 되살렸던 결단이 급기야 평행우주, ‘멀티버스’까지 만들어냈는데 공식 세계관으로 굳어졌다. 페이즈 3을 완결하며 인피니티 워의 여진을 다루는 동시에 다음 서사의 연결고리가 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예고편을 보았을 때, 놀랍게도 MCU는 멀티버스를 세계관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것 같다.


인피니티 사가 이후 차원에 구멍이 뚫린 MCU에 이제 다른 우주의 영웅과 악당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이 지점부터는 만화 원작보다 영화로서의 선택이 궁금해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만화보다 엄격한 개연성과 납득 가능한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가능성의 확장은 자칫 플롯과 복선 수습을 번잡하게 할 수 있다. 다중우주 설정이 드래곤볼처럼 써먹히지는 않을 테니 엔드게임을 통해 완벽히 퇴장한 두 영웅이 부활하는 일은 없겠지만, 역시 숭고한 희생으로 영혼을 맞바꾼 그녀는 어쩌면 되돌아오는 방법이 생기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무튼 케빈 파이기는 다음 서사의 비전과 로드맵을 명확히 제어할 테고, MCU 작가진의 무난한 스토리텔링 가운데 허를 찌르는 센스는 건재하지 않을까.

마블 엔터테인먼트와 스튜디오의 주인이자 현실세계의 타노스로서 끝내 20세기 폭스까지 인수 합병한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의 런칭을 준비 중이다. 폭스를 인수한 이유가 라이브러리 확보를 위해서라고 했듯, 디즈니가 소유한 계열사들과 IP를 볼 때 스트리밍 강자 넷플릭스를 위협하고 그 대척점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다. 폭스의 <아바타>, <에일리언>, <심슨 가족> 등은 물론이고 <스타워즈> 등 세계적으로 충성도 높은 팬덤을 보유한 오랜 IP들이 디즈니 플러스의 강점이다. MCU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독점으로 제공되고, 넷플릭스에 작품 공급 계약이 만료되면 머지않아 마블 작품을 보기 위해선 디즈니 플러스 가입 구독이 필수인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유튜버가 수익을 위해 늘 요청하는 구독과 좋아요 클릭처럼, 독점 컨텐츠와 구독형 서비스는 현재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수익 창출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기존 극장 체인까지 감소하는 관객을 붙잡기 위해 구독형 기간제 티켓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MCU 작품의 가장 시네마틱한 체험은 물론 극장 스크린이고, 마블 스튜디오는 페이즈로 구분되며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어지는 전례 없는 영화 시리즈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디즈니 플러스 구독을 위한 인질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시리즈물의 상호연계성이야말로 구독을 필수로 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가장 적합한 컨텐츠 요소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미래의 서사는 대하 시리즈

성공한 영화의 무조건적인 속편은 블록버스터를 발명한 할리우드가 손쉬운 기획으로 흥행을 이어가는 방법이었다. 각 편의 서사와 전편을 아우르는 일관된 캐릭터가 존재하는 시리즈물인 <007 제임스 본드>나 <스타워즈>, <해리포터> 정도를 제외하면 서사가 아무리 길어도 주로 트릴로지(3부작)가 많았고, 속편의 기대치가 떨어진 IP는 리부트시키곤 했다. 처음부터 다양한 캐릭터와 거대 서사를 표방한 MCU 프랜차이즈의 성공은 기존 영화 시리즈물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러닝타임 2시간 내외의 서사를 가지고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승부를 거는 정통 극영화가 아니라면, 지속적 이윤 창출을 위해선 캐릭터 시리즈화 가능성이 필수로 고려된다.

통상 90분 정도의 장편영화에 장편소설 한 권의 분량이 오롯이 담긴다. 처음 시나리오 작가로서 ‘장편’의 매체 변환이 거의 동일한 분량인 것에 신기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만약 작가나 기획자가 롱런할 시리즈물을 원한다면 이제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의 서사로는 부족하다. <왕좌의 게임>의 원작인 <얼음과 불의 노래> 같은 ‘대하소설(大河小說)’을 써야 한다. 인피니티 사가의 ‘사가(Saga)’는 앞에서 말한 ‘에픽’과 비슷한 뜻이다. 장편 대하소설을 영어로 옮기면 사가 또는 에픽 노블이라고 쓴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두 편의 러닝타임을 합쳐 드라마에 대입하면 50분 짜리 에피소드 7편 가량을 몰아서 본 셈이 된다. 즉, 분량 상으로는 한 시즌을 몰아서 본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거다. 그냥 드라마가 아니다. 일상 묘사와 대사 위주의 에피소드 전개가 아닌, 다채로운 플롯과 내러티브가 탄탄한 대서사시로서의 드라마를 의미한다. 

세계의 스토리텔링 거장들은 시리즈물의 인기에서 문학으로의 회귀를 보는 것 같다. 작년 한 인터뷰에서 “극장영화(Cinema)는 이미 죽었다”고 선언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소설을 시네마틱하게 변형한 것이 바로 몇 년간 이어지는 넷플릭스 시리즈”라며 미래의 소설을 곧 시리즈물로 규정하는 말을 했다. 영화 <헤이트풀 8>의 삭제장면을 추가한 일종의 확장판을 4개 에피소드의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로 내놓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소설에서의 ‘장(章)’, 즉 챕터를 열고 닫는 이야기의 맛을 시리즈로 구현한 새로운 방식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가까운 미래, 시리즈가 상업적 서사의 기준이 된다면, 영화는 하나의 매체 규격화된 전통적인 예술형식으로 굳어지고, 분초 단위의 짧은 서사는 유튜브를 통해서만 소비될지 모른다. 소설, 만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대하 서사의 인기는 당면한 과제다. 계속해서 재미를 원하는 시장과 소비자에게, 끝없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21세기 ‘셰에라자드’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것이다.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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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 작가 개인 홈페이지나 커뮤니티를 통해서 초기적인 모습을 드러냈던 한국의 ‘온라인 만화’는 2004년을 전후로 다음, 네이버, 파란 등 포털 사이트들의 ‘서비스’로 재편되며 ‘웹툰’이라는 이름이 부여되고 초기적인 틀을 형성했다. 이후 2013년 레진코믹스, 탑툰을 비롯한 본격적인 유료 웹툰 플랫폼의 등장이 겹쳐지며 2019년 현재의 웹툰 환경을 형성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비교적 그리기 간편했던 ‘에세이툰’이 대세를 이뤘다면 2000년대 중후반 네이버의 ‘도전 만화가’나 다음의 ‘웹툰리그’(구, 나도 만화가)를 비롯한 아마추어 활동 공간 및 발굴 플랫폼의 등장, 디시인사이드나 루리웹을 비롯한 만화 연재 커뮤니티의 활성화, 그리고 ‘아마추어 작가’나 ‘지망생’들을 열심히 섭외하며 작가의 풀을 채운 신생 웹툰 플랫폼의 등장은 표면적으로는 이전보다 한국 웹툰의 ‘장르 다양성’을 대폭 신장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일상툰’을 비롯해 에세이 만화의 성격을 지닌 만화는 물론 액션이나 스릴러 같이 고도의 기획력이 필요한 작품, 이성애는 물론 다양한 성적 취향을 반영하는 작품도 속속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