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문가칼럼] BL 장르와 젠더 감성
정은숙 2019.12.20



오늘날의 콘텐츠들은 모두 장르로 구분되고, 그렇게 구분된 로맨스, 스릴러, 판타지, 액션 등의 장르에는 자연스럽게 여성향과 남성향이라는 젠더가 따라붙는다. 각각의 젠더에 속한 장르들 중 여성이 주체적으로 만들고 소비해온 BL(BOYS LOVE) 장르가 최근 젠더 논란과 함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니 오랜 시간 BL 장르를 접하며 자란 필자에게는 조금 놀라운 상황이다.

지금은 업계에서 각광받는 주요 장르로 떠오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BL은 음지에서 활동하던 소수 여성들의 전유물이었을 텐데. SNS에서 화제가 됐었던 ‘탈 BL ’ 운동은 필자의 최근 1년에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BL이라는 장르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해보자면, BL은 일본의 ‘야오이(남성 동성애를 다루는 2차 창작)’에서 상업성을 목적으로 파생된 장르이다. 과거에는 2차 창작물인 야오이와 오리지널 작품인 BL을 구분 지어 사용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오이가 BL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야오이’ 문화와 남자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팬 픽션’ 문화가 결합하며 여성들의 서브컬처로 자리 잡았다.

‘동인녀’, ‘*후죠시(*腐女子, 썩은 여자라는 의미의 일본어)’라 일컬어지는 BL 창작자 및 소비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활동 양상을 보였지만, 웹소설/웹툰 산업의 발전에 따라 여성들만의 문화였던 BL이 양지로 올라오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위에서 언급한 ‘탈 BL’을 포함,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BL에 대한 비판과 옹호는 모두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속의 여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생물학적 여성’을 중시하면서 ‘탈 BL’을 주장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BL이 남자 주인공만 등장시키는 철저한 남성 중심적 장르라 비판한다. 또한 남-남 주인공 사이에서도 남-여의 섹스처럼 ‘삽입 권력’을 가진 자가 우위를 점하는 구도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탈 BL론자들은 BL을 여성 혐오의 장르로 생각하는 반면 BL 옹호론자들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참여해온, 남성 금역의 거의 유일한 장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필자 또한 BL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거의 대부분의 남성들은 기피하는 장르이자 소수의 남성을 제외하고는 여성들만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대단히 여성 중심적인 장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여성향 이라 불리는 젠더 울타리 안에서도 BL은 조금 특수한 장르라서 흔히들 접하는 로맨스 서사에서의 남-여 관계가 아니라 여성이 배제된 오로지 남-남 관계의 서사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를 소비하는 자들은 *호모섹슈얼(*homosexual, 동성애자)의 남성이 아닌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 이성애자) 의 여성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동성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르지만 헤테로섹슈얼 여성들을 위한 콘텐츠인 만큼 호모섹슈얼의 사랑을 리얼하게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 여성들은 오랜 시간 BL을 소비하고 향유하게 되었을까?

필자가 엄청난 데이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시간 동안 수많은 ‘후죠시’들과 교류하며 BL을 함께 나누고 누렸던 사람으로서 주변의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BL은 ‘남녀 사이의 사랑과 권력, 감정의 문제’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랑과 욕망’만을 그리고 있으니까 좋아.”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맨스는 현대 사회의 남-여 사이에 있는 젠더 위계질서와 그 고정관념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차별과 혐오가 녹아있기도 하지만 BL은 남-남의 관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젠더적 시선에서 빚어질 수 있는 불편함에서 벗어난 서사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 BL 장르 안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겨 기존 사고의 근간을 뒤흔드는 작품들도 다수 선보여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오메가버스(Omegaverse, 남녀 모두 임신이 가능한 세계관)이라고 하는 BL의 하위 장르가 대표적이다. 여성에게 지어지던 젠더적 제약을 남성에게 전가하고, 수동체로서의 위치를 남성 캐릭터에게도 부여하면서 남성성을 유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사고의 전환이자 움직임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녀들의 BL이지만 ‘여성에 의해, 여성을 위해 창작하고 소비되는 장르’인 만큼 앞으로 이 산업의 의미와 방향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탐구와 이해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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