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모던 배트맨과 프랭크 밀러의 유산 :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이어 원>
박수민 2019.12.20



배트맨 탄생 80주년
2019년은 배트맨 탄생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1939년 5월,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처음 등장한 배트맨은 여러 모로 한해 앞서 탄생한 슈퍼맨의 안티테제(Antithese)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슈퍼맨이 나오는 <액션 코믹스>를 본 만화 콤비 빌 핑거와 밥 케인은 이런 캐릭터는 우리도 만들 수 있다고 의기투합했고, 모든 면에서 슈퍼맨과 반대인 영웅을 구상했다.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가 만든 슈퍼맨은 맨 얼굴을 드러낸 원색의 슈트를 입고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반면 배트맨은 얼굴을 가린 가면과 흑색의 슈트를 입고 어둠 속으로 숨는다. 슈퍼맨은 타고난 초능력을 쓰는 외계인이자 거의 신적인 존재지만, 배트맨은 재력과 지적 사고와 훈련한 냉철함을 바탕으로 직접 고안한 특수 장비를 사용하는 철저한 인간이다.

DC의 간판 히어로로 자리매김한 배트맨은 코믹스, 영화, 게임, 각종 캐릭터 사업을 아우르며 따로 설명이 불필요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80주년 기념 슬로건 “LONG LIVE THE BAT”을 굳이 외치지 않아도, 배트맨의 인기는 앞으로도 오래갈 듯싶다. 드라큘라 같은 코스튬을 입고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이 음울한 갑부에게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멋있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배트맨은 굉장히 복잡한 캐릭터다. 
△ 배트맨 80주년 로고


배트맨 VS 슈퍼맨
슈퍼맨은 몸으로 때우지만, 배트맨은 세계 최고의 탐정이다. 슈퍼맨은 양부모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긍정과 믿음을 배웠지만, 배트맨은 부모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 속에서 고뇌한다. 나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힘을 합하는 것보다 서로 대립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슈퍼맨 입장에서 배트맨은 인간 주제에 지극히 위험한 경계를 오가며 설쳐대는 성가신 존재다. 배트맨에게 슈퍼맨은 애초에 외계인이며, 언제든 자신이 가진 가공할 힘 때문에 절대 권력의 도구로 휘둘리거나 스스로 군림할 위험성이 있어 존재 자체가 문제다.

그래서 나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을 엄청나게 기대했더랬다. 초반부의 정서는 훌륭했지만 중반 이후 전개는 온통 싸움질로 피로했던 전편 <맨 오브 스틸>(2013)에 대한 실망을 이 속편으로 만회하리라 생각했다. 메트로폴리스의 재난 이후 배트맨이 슈퍼맨을 거대한 위험이자 일종의 재앙으로 인식하는 세팅은 지극히 당연했고, 슈퍼 히어로물에서 배경으로만 치부되는 세계를 더욱 현실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흥행은 했지만 작품적으론 한동안 조롱까지 당해야 했을 정도의 실패였다. 

당시 극장에서 나는 클라크와 브루스의 두 어머니가 같은 이름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름 슈퍼맨과 배트맨에 대해서 잘 안다고 믿었지만, 이 사실은 충분히 팬보이의 허를 찌를만한 요소였다. 이후 DC 확장 세계관의 영화들 역시 특이하게도 여전히 부모, 특히 엄마에게 집착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문제는 사실 엄마 타령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히어로가 등장해야 하는 후속편 <저스티스 리그>(2017)로 빨리 전개하려는 욕심에 한 영화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무리하게 담으려 했던 게 근본적인 패착이다. 그래픽 노블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전개일지라도, 영화의 서사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저스티스 리그>가 훨씬 더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아머드(Armored) 배트맨이 슈퍼맨을 때려눕히다 엄마의 이름을 듣고 멈추는 시퀀스까지가 DC 확장 세계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남아있다. 내가 슈퍼 히어로 그래픽 노블 역사상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실사로 가장 가깝게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슈퍼맨에게 펀치와 킥을 날리는 배트맨.


프랭크 밀러가 제시한 모던 배트맨
나는 지금 우리가 보고 읽고 즐기는 현대 배트맨 프랜차이즈의 캐릭터와 이야기가 30년 전 한 작가의 파격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신 코믹스와 게임은 물론,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역시 이 작가의 작품 없이는 애초에 성립하지 못했다. 바로 전설적인 작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1986)다. 최신작 <조커>(2019)마저 이 작품의 자장 아래 있다. 조커가 청중 앞에 나서는 토크쇼 장면은 이 만화에서 먼저 본 것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50이 넘은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은 오랜 시간 배트맨 활동을 그만 둔 상태다. 미디어의 왜곡과 정치인의 선동이 지배하는 미국은 냉전 체제 아래 국민들의 자유를 속박한다. 최악의 범죄도시 고담은 신세대 악당 뮤턴트 갱단이 점거했고, 성형수술을 한 투 페이스와 숙적 조커까지 풀려난다. 이제 쇠락한 배트맨은 전보다 훨씬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실행하고 관철시키려 한다. 그것은 폭력과 무정부주의다. 여기에 치장은 없다. 

슈퍼 히어로는 영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허가 받지 않은 자경단 활동을 하는 범죄자라는 것. 그래서 배트맨은 공권력에 쫓기는 흑기사여야만 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프랭크 밀러는 이 만화에서 확립했다. 배트맨은 고담의 수호자가 아니다. 배트맨은 고담 그 자체다. 이 도시는 그의 것이다. 노쇠한 흑기사는 배트 탱크를 타고 청소년 범죄자들에게 고무탄을 쏘아댄다. 뮤턴트 갱의 보스를 맨주먹으로 쓰러트리고, 우두머리를 잃은 그들을 ‘배트맨의 아들’들로 포섭한다. 자경단은 이제 군대다. 미국이 국가로서 기능을 상실한다면, 적어도 고담은 배트맨이 지키기로 한 것이다. 배트맨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국가 권력은 결국 슈퍼맨을 부른다. 

슈퍼맨과 싸우는 배트맨은 죽을 각오를 했다. 거의 자살에 가까운 싸움. 브루스는 클라크를 두들겨 패며 뇌까린다. “넌 우릴 팔아넘겼다, 클라크. 놈들에게 우리가 가졌어야 할 힘을 넘겼다. 네 부모에게 배운 대로. 내 부모는 다른 교훈을 가르쳤다. 길바닥에 누워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면서, 내 부모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런데 우리를 봐. 나는 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됐지, 그리고 자네는… 그냥 농담거리야.” 한낱 인간이 신의 뺨을 때리며 오늘을 절대 잊지 말라고 전한다.

늙은 영웅의 최후로 슈퍼 히어로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프랭크 밀러는 이어서 아마추어 자경단으로서 배트맨의 첫 해를 그린 <배트맨: 이어 원>(1987)을 통해 현대적인 영웅 서사의 기준을 확립한다. 이 만화를 보고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 영화가 얼마나 프랭크 밀러의 비전에 충실한 각색을 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슈퍼 히어로에 대한 영화의 실존적 고민은 이미 이 만화 안에 있었다.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 시리즈가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1988)에 힌트를 얻어 빌런의 해석을 통해 우화적인 히어로물을 만들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브루스 웨인의 딜레마와 고담에 집중하면서 현실적인 히어로물을 만든 것이다.

<이어 원>의 작화를 맡은 데이비드 마주켈리가 남긴 만화 후기는 슈퍼 히어로가 결국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한다. 이 황당무계한 장르에서, 슈퍼 영웅은 현실적이 될수록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중간의 미묘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수천억을 들인 영화가 하루아침에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전혀 놀랍지 않다. 슈퍼 히어로의 덕목은 정의를 향한 선한 의지일 것이다. 배트맨은 이 명제가 지극히 위험한 주인공이다. 배트맨은 왜 범죄를 혐오하되 ‘불살’을 추구할까? 부모의 죽음에 집착하는 이 재벌2세는 왜 강박적인 복수에 불탄 이상범죄자가 아닌가? 프랭크 밀러의 대답은 이랬다. “그는 훨씬 고귀합니다. 그는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젊은 브루스가 희생되지 않을 만한… 어떤 면에선, 그는 자신을 필요 없게 만들려고 합니다. 배트맨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영웅입니다.”
△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이어 원> (시공사 2018 개정판)

프랭크 밀러의 유산, 배트맨의 미래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미국 코믹스와 슈퍼 히어로 그래픽 노블의 문외한이 보아도 걸작임을 의심하지 않는 작품이지만, 후속편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2001)은 평가가 크게 갈린다. 프랭크 밀러의 스토리텔링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절제할 때(<씬 시티>, <300>)와 완전히 폭주할 때(<로닌>, <프랭크 밀러의 로보캅>)의 격차가 널뛰는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수려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의 그림체가 날림이 되면 정말 보기 힘들어지곤 하는데 이 작품은 정도가 심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배트맨 서사에 있어서 <스트라이크 어게인>만큼 작정하고 멀리 나아간 작품은 없고, 포스트 모던 배트맨마저 프랭크 밀러가 이미 그렸다고 생각한다.

프랭크 밀러를 이제 시대착오적인 늙은 보수 우익 마초 만화가로 보는 시선에도 그렇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리턴즈>에서 새로운 로빈으로 소녀 캐리 켈리를 영입하고, <스트라이크 어게인>에서 그녀를 캣걸로서 액션의 주역으로 내세우며 1세대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딸들 이야기로까지 확장해나가는 균형감각 정도는 있는 사람이다. 고든의 뒤를 이어 서장이 된 여성 엘렌 인들은 배트맨을 범죄자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훨씬 강직한 기준의 소유자였다.

그의 흑기사 이야기는 최신작 <다크 나이트 마스터 레이스>(2015)로 마무리되었다. 아직 국내에 발매되지 않은 프랭크 밀러의 마지막 배트맨 서사를 얼른 정식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배트맨 프랜차이즈의 미래에도, 프랭크 밀러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서 이 독특한 자경단 영웅에 대한 흥미진진한 기대를 오랫동안 품고 싶다.
△ <배트맨: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 (세미콜론 구판 절판), <배트맨: 다크 나이트 마스터 레이스> (국내 미정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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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포트] 호주 만화 시장에 관하여 - 만화 활용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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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0
호주에는 OZ 코믹콘과 슈파노바(Supernova) 등 다양한 대중문화 행사가 있다. 슈퍼노바는 시드니, 브리즈번, 멜버른 퍼스, 애들레이드, 골드 코스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다. 200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이 행사는 호주에서 진행되는 문화 행사 중 가장 눈에 띄고 참석자가 많은 행사 중 하나다.
[글로벌리포트] 호주 만화 시장에 관하여 - 자가출판 시장과 디지털만화의 유입
Brian Yecies/Riley Jones
2019.12.20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주 실무자들과 디지털 유통관행은 아직 한국과 세계의 추세를 따라잡지 못했다. 호주 만화가들은 코믹솔로지(ComiXolgy)같은 플랫폼에서 자신의 디지털콘텐츠를 홍보할 뿐만 아니라 개인 웹 페이지를 활용한다. 그러나 콘텐츠가 국가별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수집, 확인하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많은 호주 만화가들이 디지털 도구를 이용해 만화를 만들고 있지만 2019년 현재 호주에서 디지털콘텐츠와 디지털 유통에 초점을 맞춘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문가칼럼] BL 장르와 젠더 감성
정은숙
2019.12.20
 오늘날의 콘텐츠들은 모두 장르로 구분되고, 그렇게 구분된 로맨스, 스릴러, 판타지, 액션 등의 장르에는 자연스럽게 여성향과 남성향이라는 젠더가 따라붙는다. 각각의 젠더에 속한 장르들 중 여성이 주체적으로 만들고 소비해온 BL(BOYS LOVE) 장르가 최근 젠더 논란과 함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니 오랜 시간 BL 장르를 접하며 자란 필자에게는 조금 놀라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