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수민의 탐독의 만화경] 종말과 일상, 만화는 계속된다 :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의 개인적 만화읽기 기록
박수민 2020.10.21



평범한 일상의 종말,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읽은 만화들 
《소녀종말여행》이 그린 세계의 종말, 《연짱 아빠》가 드러낸 인간의 종말 
panpanya의 만화를 통해 되돌아보는 일상의 숨겨진 의미




종말이 일상이 된 2020년의 세계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1989) 스트리밍으로 시작한 2020년은 희망찬 미래는커녕,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창궐하여 인류 역사에 오랫동안 뼈아플 상처만 입힌 최악의 한 해로 남게 생겼다. ‘팬데믹(pandemic,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나 ‘쿼런틴(quarantine, 격리)’같이 재난물 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접하던 단어들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대책 없이 확산하는 바이러스 앞에서 인류와 세계의 종말이란 그렇게 무리한 상상도, 먼 미래의 일도 아니었다.

코로나 발생 초기, 나는 종일 뉴스를 켜놓은 채 컨트롤러를 쥐고 Ubisoft 게임 <더 디비전>에서 바이러스로 멸망한 미국을 거닐었다. 진짜 팬데믹 상황에 이런 게임을 하고 있으니 약간 초현실적인 기분이었을 뿐, 현실의 위기가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다 한 사이비 종교 단체가 국내에서 첫 코로나 대유행을 일으키자 나는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만화, 소설, 영화, 게임을 무색케 만드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 현실 앞에서 한낱 허구의 한계가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픽션에서 납득 가능한 서사를 판단할 때 맥락과 개연성, 즉 인간의 상식 수준을 따진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는 이런 상식을 도통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랍고 무서웠다. 고도로 발달한 소통의 기술도, 투명하게 공개된 정보도 인간의 아집은 막을 수 없다. 특히 지난 8월, 애국의 탈을 쓴 음모론이 가장 기초적인 방역의 상식마저 무시하는 걸 목격했을 때가 정점이었다. 거리 두기의 객관적 지혜가 이기적으로 뭉친 무지 앞에서 허무해졌다.

이런 허탈감에 비해 언택트(untact, 비대면)의 일상이란, 작가가 된 후 지난 10년간 자가 격리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내겐 그다지 충격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표준이 될 노 컨택트(no-contact)의 세상이 대중의 문화 소비 경향에 있어 ‘노 컨텍스트(no-context)’ 즉, ‘맥락 없음’의 가속화에 얼마나 영향을 줄 것인지가 궁금하다. 전체 맥락에 따른 원인과 결과를 위해 동기와 감정과 복선을 심던 과거의 작법은 “고구마”로 남고, 행위의 쾌감을 앞세워 즉각적인 “사이다”만 제공하는 서사가 혹시 대세가 되는 건 아닐까? 뭐, 어찌 되건 간에…

다행히 세상이 종말에 이르진 않았지만, 우리가 살았던 평범한 일상은 종말을 고했다.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누구하고나 만나지 못한다. 고강도의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이젠 작가라서가 아니라 방역의 이유로 집 안에 다시 갇힌 나는 이토록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사로운 종말 속에서 읽을 만한 만화책을 뒤졌다. 감염의 공포에 맞서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모두가 분투하는 시기, 종말적 상황의 삶을 그린 만화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다만 현실이 멘탈을 두들기고 있으니 재난물은 되도록 피했다. 재난물은 평화로운 시기에만 더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


세계의 종말보다 강력한 개인의 종말
2019년 성운상(일본의 SF 문학상)을 수상한 TSUKUMIZU의 만화 《소녀종말여행》(2014)은 뭔가 있었는데 없어져버린, 그래서 멸망한 세계에서 두터운 군복을 입고 독일군 반궤도 짐차를 몰고 다니는 두 소녀의 정처 없는 여행을 그린다. 둘은 하루하루 먹고 씻고 자고 일어나는 단순한 일에 행복을 느끼며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계속 나아간다. 지금 바로 이 때 읽어야할 만화처럼 보였는데, 예쁜 세트의 마지막 6권을 덮자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남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은 종말이다―.”라고 나도 똑같이 말해볼 만큼, 만화가 그린 세계의 종말이 그럴듯하길 바라는 동시에 종말 배경에서도 담백한 일상물의 치유를 기대했지만 양쪽 모두 어정쩡했다. 무언가의 상징이나 은유인 척 공백으로 남겨둔 채 무시된 맥락들만이 신경 쓰였다.

△ 《소녀종말여행》 (TSUKUMIZU 지음, 김시내 옮김, 학산문화사 2020)

“생명이란 끝이 있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게 세상의 전부라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얻고 나서 깨달은 건 정말로 가고 싶은 장소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몇 가지 인상적인 대사는 있었지만, 캐릭터가 서 있는 세계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으니(애니 버전은 다를지 모른다) 자다가 일어나서 하는 말처럼 덧없게 느껴졌다. 마치 전쟁이 없는 전쟁 만화 같았던 것. 나이 들어 이젠 속이 텅 빈 만화에 속지 않게 됐나? 아니면 상을 받고 검증된 만화조차 그 속의 무엇이 새로운 발상과 표현인지 알아채길 거부하는 꼰대일 뿐인가? 이런 ‘별 감흥 없음’이야말로 격리의 시대에 더 어울리는 것일지 모르지만.
종말에 대한 개인의 감각이란 꼭 재난 상황의 세팅이나 장르 세계의 서사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일상적인 삶 도처에 종말의 공포가 도사린다. 별 탈 없이 무난히 먹고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우리의 삶은 언제든 위기에 봉착한다. 문제의 원인이 나 자신이거나, 가까운 동료 친구 형제 가족을 통해 불행의 첫 방아쇠가 당겨질 수 있다. 이런 유의 공포는 너무 현실적이라 그 어떤 재난물이나 우주적 호러 보다도 숨이 턱턱 막힌다. 2.5단계의 사회적 격리 상황에서 입소문, 정확히는 댓글 소문을 타고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통해 뒤늦게 접한 만화가 있다. 아리마 타케시(ありま猛)의 빠칭코 만화 《연짱 아빠》(1994)다.

△ 《연짱 아빠》 (아리마 타케시 지음, 카도카와 2020) 종이책 단행본으로 발매되면서 mangaz.com 사이트에서는 내려갔다. 국내 정발을 염원한다.

20년 전 어느 빠칭코 잡지에 연재된 이 작품은 당시 주목은커녕 책으로 발간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한 격리 중 일본 네티즌들이 무료 만화 사이트를 통해 발굴, 재발견한 여파가 한국에까지 이른 것이다. 빠칭코에 빠진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빚만 남기고 가출한다. 가정에 무심했던 남편은 순진무구한 아들과 함께 삶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직업과 집을 잃은 아빠는 먹고 살고자 사채와 빠찡코를 선택한 결과, 한줌의 인간성마저 날마다 상실해간다. 이후 이 가족이 걷는 길은 ‘생지옥’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악마도 울고 갈 만화라는 인터넷의 평은 지나치지 않았다. 이 막장 중의 막장 서사가 그럴듯함을 넘어 현실적인 공포로 느껴진 이유는 핵심에 돈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돈은 곧 생사의 문제다.

도박 중독의 극단적 상황을 개그만화체로 그린 작품이 하필 이런 팬데믹 상황에 강렬하게 다가왔던 건,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나고 있는 개개인의 종말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 타인과 대면 없이 매일의 이동 없이 노동할 수 없는 우리 이웃들은 당장의 먹고 사는 위기에 직면했다. 얼마든지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몇 달 쉬더라도 괜찮을 만큼 잔고가 충분한 직업이 전체 노동 인구 중 몇 퍼센트나 될까? 오늘의 노동 없이는 당장 내일의 삶을 알 수 없다. 나 역시 코로나 사태가 장기간 이어질 전망에 덜컥 겁이 났다. 프리랜서란 안정성하고는 애초 거리가 먼 직업이다. 내 역량이 메꿀 수 있는 작업인지, 제대로 기간 내 완료 가능한지의 숙고 따위는 무시한 채 허겁지겁 무리하게 일거리를 늘려야만 했다. 바이러스, 전쟁, 경제 파탄 그 어떤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살기 위해선 일상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일상의 종말로 그리워진 내일의 환상
국내에 소개가 안 된 만화가 개인 번역으로 인터넷을 통해 먼저 알려진 이후 출판사에서 정식 발매가 되는, 소개와 전파의 주체는 역전되었다고 이미 몇 년 전에 칼럼1)을 쓴 적이 있다. 이제 이야기할 작가와 작품도 역시 처음 접한 것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서였다. 기묘하지만 이상한 친숙함이 있는 스토리와 그림체로 정식 출간 이전에 어느 정도 팬을 확보한 panpanya의 만화다. 그의 단편집 《침어》와 《게에게 홀려서》가 지난 3월 동시 발행한 이후로 《동물들》, 《두 번째 금붕어》, 《구야바노 홀리데이》가 거의 매달 나오더니, 초기작 모음인 《아시즈리 수족관》까지 9월에 발간되었다.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의 유일한 외출은 만화책 사러가는 일이었고, 달마다 나오는 panpanya의 만화책을 읽는 즐거움으로 버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정발된 panpanya 월드 (panpanya 지음, 장지연 옮김, 대원씨아이 2020)

panpanya의 세계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나는 ‘동네’, 또는 ‘골목’이라 하고 싶다.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이야기를 위해 그가 가는 곳은 이세계나 먼 우주가 아니라 바로 내 집이 있는 우리 동네의 어느 골목이다. ‘구야바노’라는 과일을 찾아 멀리 떠나가 본 필리핀에서조차 그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골목을 돌아다닌다. ‘어딘지 모르지만 익숙한’ 이 감각이 신비와 환상의 열쇠다. 가까운 장소의 어딘가에 내가 몰랐던 세상이 존재한다. 모르는 골목에 들어섰더니 이상한 세계가 펼쳐져있다. 동네 공터에 새로 생긴 집, 뒷산에 버려져 있던 건물, 온갖 잡다한 것들을 파는 시장과 상가 아케이드, 멀리 눈에는 보이지만 직접 찾아 가보진 않았던 장소에 도달하자 모험이 시작된다. 어린 아이가 매일 학교와 집을 오가는 똑같은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순간에 느끼는 호기심, 두려움과 경이가 panpanya 만화의 근간이다. 처음 가본 미지의 공간에는 알 수 없는 죽음이 배어있지만, 그는 매번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한 세계의 공포를 물리친 보상은 한 마리 물고기, 즉 생(生)이다.

이 여섯 권의 만화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의 세계, 위대하고 대체 불가능한 모로호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郞)를 떠올리게 했다. 만화사상 최고의 콤비 시오리와 시미코가 사는 이노아타마 마을, 온갖 고서와 기서가 가득한 헌책방 ‘우론당’이 있는 그곳이 그리워졌다. 그리움은 잊었던 소중함을 일깨운다. 내가 사는 마을 망원에서 홍대로 신촌으로 종로로, 친구와 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유로이 거닐던 동네 골목과 가게들, 그곳의 새로운 만남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 평범한 일상의 여행에는 만화 같은 기묘함과 경이와 발견과 집으로 돌아오는 안도까지 모두 있었다. 바이러스로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일상이란, 반복되는 매일의 현실이 아니라 오늘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되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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