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현실로 돌아온 환상의 극화 : 다쓰미 요시히로 《동경 표류일기》 (상)
박수민 2020.12.16



현실로 돌아온 환상의 극화 : 다쓰미 요시히로 《동경 표류일기》 (상)
- 고전 만화가 인터넷으로 불법 공유되는 시대  
   영문판 스캔본의 중역과 아마추어 번역의 어두운 추억을 지나서, 
    에릭 쿠 감독의 영화와 정발 단행본 《동경 표류일기》로 ‘극화’의 창시자를 다시 만난다


 

박수민



해적질로 고전을 접하는 시대

국내 정식 발매가 안 된 만화가 블로그나 커뮤니티 게시판 등을 통해 개인 번역으로 소개되거나 공유되는 일을 칼럼에서 몇 번 언급했다. 엄연한 불법이나 공공연한 비밀. “어둠의 루트”란 말도 이제 묵은 표현인데, ‘해적질(pirates)’의 양상도 많이 변했다. 과거의 해적질이 기존 제품을 저작권 허락 없이 스캔하고 복제한 사본을 퍼뜨리는, 말 그대로 “불법 다운로드”였다면, 지금의 해적질은 업로더의 코멘트가 가미된 개인적인 큐레이션이 되었다. 겨우 몇 푼 아끼려는 다운로더의 의지보다 개인적 발견을 전하려는 업로더의 안목이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마루마루나 밤토끼 같은 대단위 불법 공유 사이트는 범죄지만, 개인의 공유는 살짝 미묘하다.

 

아마추어 번역 만화와 소설 등에 한정해보면, 예전엔 개인적인 감상 목적으로 번역된 작품이 역시 개인의 블로그에 놓여있는 경우가 중심이었다. 해당 분야 탐구자나 애호가가 원서를 찾아 스스로 번역하는 유의 아카데믹한 성격이 먼저였다고 본다. 내가 보려고 번역했지만, 이왕 한 거 방문객들도 관심 있으면 보라는 듯 은근히 놔두는 식이었다고 할까. 지금은 유튜브나 게시판 같은 플랫폼이 유저의 주요 활동 영역이 되면서 업로드의 의미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이런 (재밌는/놀라운) 게 있는데 내가 번역해 여기 올려둘 테니, 모두들 한번 보라는 식이 되었다. 굳이 다운로드할 필요도 없이, 플랫폼에 올라와 있는 그대로 보고 가면 그만. 구태여 잘 봤다는 댓글은 남기거나 말거나. 옛날처럼 “퍼가요”라는 기괴한 인사말은 이젠 하지 않는다.

 

(저작권의 문제를 조심스레 잠시 미뤄두고) 이런 해적질의 놀랍고 이로운 부작용(?)은, 일반에 고전(classic)을 전하는 통로가 되는 점이다. 만화의 역사엔 중요한 작품으로 남아있으나 정발이 요원하여 일반인은 쉽게 구해 보기 힘든 작품이 인터넷에 그냥 올라온다. 쓰게 요시하루(つげ義春)의 만화를 검색만 하면 개인 번역본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마치 전 작품에 영어 자막이 달린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의 영화 컬렉션 토렌트를 전 세계 시네필이 단결하여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사례들은 원전을 찾아 헤매어본 애호가에겐 당혹감보다 우선 어떤 애틋함마저 느끼게 한다. 누군가 나처럼 이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절박하게 헤매었고,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공명했다는 동질감이다.

 

클릭이 너무 쉬운 한 줄 링크를 두고 불법과 합법이 줄타기하고, 가난한 젊은 애호가에겐 노트북 한 대밖에 없다(고 해두자). 국내외의 영화, 만화, 음악, 문학 등을 물리적 형태로 개인 라이브러리에 아카이빙하는 옛날 애호가란, 오늘날 젊은 애호가들 기준에선 잘난 부자거나 미련한 호더 둘 중 하나일 테다. 나한테 원서가 있다고만 말하는 옛 애호가는 잰 체하는 오타쿠스러운 반면, 현대 애호가는 신념이 모호한 카피레프트 운동가가 되어 자신이 구한 복사본을 공공의 장소에 올려 공유해버린다. 세상에, 이걸 올렸어? 이봐요, 정색하며 저작권을 묻고 싶은 마음이 일단 머뭇거린다. 고전이 접근 불가한 상태로 묻힐 바에야, 이런 불온한 형태로라도 살아서 현세대에게 읽히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작, 이 과정에서 이윤은 광고를 붙인 플랫폼이 가져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번역의 힘과 영어 중역의 추억

문화 전파에서 번역의 힘은 강력하다. 아니, 강력하단 말로는 모자라다. 번역이 전부다. 현세대 시네필에게 가장 공로가 큰 인물은 유명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모 자막 사이트의 ‘태름아버지’ 닉네임을 쓰는 아마추어 번역자일 거란 말을 농담으로 넘기긴 힘들다. 번역이 없으면 아무리 위대한 고전이라도, 까막눈으로 어렴풋이 훑어만 보는 미지의 그림이 되고 만다. 고전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려면, 최소한 언어의 벽을 자기 힘으로든 남의 힘으로든 넘어야 한다.

 

원본은 사라지거나 무시되고, 우리는 조악한 복사본으로 고전을 만난다. 그 출처는 주로 서양이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는데 ‘망가’의 해적질도 그러하여, 양인들은 이미 다 보고 있었다. 전설의 만화 잡지 《가로ガロ》마저 전 호의 스캔을 다 떠 놓은 모양이니 탄식이 나온다. 당신이 지금 정발된 적 없는 옛날 일본 만화 하나를 보고 싶어 현기증이 난다고 가정하자. 원서를 주문하려니 품절되어 구할 방법이 없다는 내적 변명과 함께 구글 신에게 물어 미국이나 프랑스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의 텀블러나 블로그를 만나면 된다. 저작권의 죄의식을 감수하면, 당장 보고픈 마음의 갈증을 급히 식힐 순 있다. 대신 그 복사본엔 영어나 불어 자막이 달려 있다.

 

반면, 영화 해적질의 떠오르는 신대륙은 중국이다. 들리는 소문과 몇 차례 경험에 따르면, 물리 매체로 나온 적 없어 특히 구하기 힘든 동유럽 고전 영화까지도 중국의 웹하드에 있는 경우를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구해보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던, 내가 연출한 영화도 붙박이 중국어 자막이 달린 채(내가 아는 한, 공식적으로 중국어 번역/자막 작업을 한 적이 없다), 중국 서버에 링크된 알 수 없는 사이트에서 볼 수 있었다. 가끔 링크드인에 중국 쪽 영화학교 학생이나 관계자가 내 프로필을 검색했다는 알림이 오면 또 누군가 본 모양이군, 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번역의 세계는 멀지 않다. 누구나 역자와 식자가 될 수 있다. (성인물의 역식 작업은 논외로 하자) 그나마 영어는 만만하다. 수능 독해에서 멈춘 영어 실력이라도, 번역 앱이 있다. 십몇 년 전, 나는 검색으로 찾아낸 일본 만화의 영문판 스캔본을 직접 번역한 적이 있다. 책 읽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중역(重譯)이지만 당시 대안은 없었다. 원작의 언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내 한글 문장으로 옮겨놓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오직 나만 보기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역식을 해두려던 작품의 작가는 다쓰미 요시히로(辰巳ヨシヒ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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