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요즘은 웹툰 원고 이렇게 만듭니다 : 행아웃부터 클립 스튜디오까지
2021년의 웹툰 작가가 사용하는 전자기기부터 프로그램까지 총집합
양세준 (만화가) 2021.06.18



요즘은 웹툰 원고 이렇게 만듭니다 : 행아웃부터 클립 스튜디오까지


0. 떠나간 동료에 대한 추모사

어젯밤 소중한 동료가 숨을 거뒀다. 


아아...님은 갔습니다...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그의 이름은 신티크 22HD. 2012년 발매된 와콤의 액정 타블렛으로 나와는 2013년에 처음 만나 한국과 일본, 출판만화와 웹툰을 오가며 마감의 전장을 누빈 전우였다. 죽음의 그림자는 네이버웹툰에 <인간의 온도>를 연재하고 있던 지난해 말부터 서서히 드리워졌다. 한창 마감을 하고 있노라면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듯 전원이 꺼지고는 30분에서 한 시간가량이 흐르면 다 쉬었는지 눈을 뜨고 작업 중이던 클립 스튜디오 화면을 비춰주곤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바로 어제, 2021년 6월 5일, 나와 함께 취미작 일러스트를 작업하던 중 피곤하셨는지 신티크는 어느새 깊이 잠이 들어버리시고는 깨지 않으셨다. 다시는. 지난 8년간 나의 필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나누었던 2,048단계의 섬세한 교감들과, 추운 겨울, 원고에 지친 손을 녹여주던 따뜻했던 발열을 뒤로 한 채 나의 동료는 더이상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서늘한 검은 액정으로 마감의 죽고 죽이는 나선을 내려갔다.

이제 다시 새 기기를 사야 한다. 한때는 나도 어릴 적 동경했던 선배님들처럼 종이 위에 잉크를 머금은 G펜을 놀렸지만, 디지털 작업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된 뒤로는 펜마우스와 액정 타블렛 없이는 단 한 컷도 연재할 수 없게 되었다. 나 같은 작가들의 변화를 기뻐한 건 물론 와콤과 셀시스였다.


1. 지금 만화가를 때려치면 자도 되는데!!


웹툰 작가도 원고 때려치고 자고 싶다!!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원고 하기 싫어, 자고 싶어...” 

새벽 세 시, 밤샘 마감으로 남들이 돈 주고 가는 파리의 시간을 사는 중이던 웹툰 작가 여섯 명이 각자의 작업 공간에서 구글의 무료 화상 회의 서비스 행아웃에 접속해 있다. 이들은 매일 밤 서로의 작업 화면을 공유한 채 마이크로 대화를 나누며 만화를 그린다. 혼자 있지만 혼자가 아니다. 공유된 화면엔 대부분 셀시스의 만화 전용 제작 프로그램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가 열려있다. 이전 버전인 코믹 스튜디오(영문판은 망가 스튜디오) 때부터 클립 스튜디오는 출판 만화든 웹툰이든 만화가들에겐 어느새 필수 툴이 된 지 오래다.

불평하기도 지쳤는지 펜 마우스가 액정 타블렛의 종이 질감 필름을 스치는 소리만 사삭 사삭 울리던 중 누군가 정적을 깬다.

“내 만화 다음 에피소드로 이런 거 어때?” 

연이은 밤샘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작가들이 귀를 쫑긋 세운다. 연재 중에 스토리 방향을 수정하느라 오도 가도 못하고 벽에 막힌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작가들이 저마다 훈수를 두듯 이야기를 이어갈 아이디어를 하나둘씩 던져 준다. 원래 남의 장기판의 장군 멍군은 잘 보이는 법이라 동료의 작품에 의견을 낼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술술 나온다. 집단 지성의 힘으로 어느새 메모장엔 받아 적은 아이템이 빼곡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던 작품은 풍랑을 해치고 나아갈 방향과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에는 다시 넷플릭스에서 요즘 재밌게 본 시리즈를 추천하고 새로 연재를 시작한 웹툰 작품들에 대해 재미있네, 없네, 다 비슷하네 어떠네 한마디씩 던지던 것이 과열되어 펜 마우스를 내려놓고 K-콘텐츠의 미래에 대해 뜨거운 담론을 나누는가 싶더니 금방 “원고 하기 싫어, 자고 싶어...”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눈꺼풀만큼 무거운 공감을 나눈다. 원고는 반복적이고 외로운 작업이지만 이렇게나마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어찌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누구도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 살아서는.


2. 콘티는 은하수 다방에서

“주문하신 달고나 라떼 나왔습니다.”

콘티는~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머리를 돌리려면 역시 당이 필요하다. 주문한 음료를 받아서 자리에 앉아 아이패드 프로를 펼친다. 지난밤 행아웃에서 동료 작가들과 떠들었던 아이디어는 메모장에서 불려 나와 아이패드 위에 그림 콘티가 된다. 사용 프로그램은 역시 셀시스의 클립 스튜디오 페인트. iOS에서도 구동이 가능해지면서 “작업을 위해서”라고 당당히 외치며 아이패드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월 결제 방식은 영 아쉽지만 요즘 대다수 프로그램이 월 결제 방식을 택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아쉬운 게 있다. 2017년 발매된 아이패드 프로 1세대에 딸린 애플펜슬은 충전식이라 때가 되면 본체에 꽂아서 따로 충전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꽂는 방식이 특이해서 펜슬이 망가지기가 아주 쉽다. 또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영감이란 것이 떠올랐을 때 마침 애플펜슬이 충전 부족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소중한 아이디어를 날려 먹는 일도 부지기수다. 좀 더 최신기종을 샀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원래 모든 전자제품은 늦게 살수록 이득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역시 A4 용지를 반 접어서 샤프로 콘티를 짜고 카페 사장님 눈치를 보며 지우개 똥을 후후 불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카페에서 디지털 기기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꿈같은 일이다. 한때는 만화 원고용지와 파이롯뜨 제도용 잉크까지 들고 카페에 앉아 펜 터치 작업을 했던 적도 있었다. 추억하자면 아날로그의 낭만이지만 다시 돌아가자니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만화의 연출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콘티 작업이라는 건 이렇게나 평소의 작업 공간을 벗어나는 정신적 환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리고 충분한 양의 당분까지. 달고나 라떼 한잔에 치즈케익까지 들어가니 그래도 한 회 분의 콘티는 완성됐다. 이제 다음은 이야기에 맞는 배경 작업을 해야 한다.


3. 스케치업 목화씨

작업실로 돌아와 트림블 사의 '스케치업'을 실행한다. 웹툰 배경 작업에 3D 프로그램이 활용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본래는 도면을 그리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스케치업은 웹툰 작가들에게 없어선 안 될 프로그램이 되었다. 만화계의 메인 스트림이 흑백의 선화 중심이었던 출판만화에서 스크롤 웹툰으로 넘어오면서 풀컬러 채색은 어느새 웹툰 원고 작업의 기본값이 되었다. 회차당 평균 분량 역시 점차 늘어나 작가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량이 되었다. 더구나 격주간, 월간으로도 발간되는 잡지와 달리 거의 모든 웹툰 플랫폼은 주간연재로 운영된다.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작화 효율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 전 몇몇 발 빠른 웹툰 작가들은 붓 뚜껑에 목화씨를 들여오듯 스케치업을 웹툰 배경 작업에 도입하고 동료들에게 전파했다. 그 덕에 우리는 라이트박스에 사진을 올려두고 선을 따며 배경 트레이싱을 하던 시절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엔 웹툰 작가들이 직접 학교, 지하철 등의 스케치업 3D 모델을 하나하나 제작해서 사용했었다. 하지만 웹툰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웹툰 제작 공정과 직군이 세분화되었고 스케치업을 사용한 웹툰 배경 전문 제작자도 늘어났다. 이제는 텀블벅 등의 사이트에서 원고에 사용할 스케치업 파일을 펀딩을 통해 후원받기도 한다. 

스케치업이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3D 파일을 웹툰 원고에 접목하는 것이 생소한 일이었고, 작가들도 처음 써보는 것이니 인물과 배경 간의 이질감이 심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스케치업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손으로 직접 그리지 않고 '비겁하게' 꼼수를 부린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가들도 독자들도 스케치업에 익숙해져서 스케치업을 사용하지 않는 작품을 찾는 것이 더 힘들 정도다. 스케치업을 원고에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노하우도 많이 축적되었다. 물론 투시와 시점을 다루는 법을 수련하여 그때그때 직접 그린 배경으로 선 맛이 살아있는 작화를 뽑아내는 작가적 고집은 지금도 여전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여 원고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 웹툰 제작에서의 3D 프로그램 활용은 점점 사용 툴도 다양해지고 있어 유니티(unity)나 블렌더(blender)를 사용하는 작가도 늘어나고 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유니티, 스케치업, 블렌더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4. 다시 만난 세계

그러는 사이 새로운 액정 타블렛이 도착했다. 8년 전 처음 신티크 22HD를 구입할 땐 와콤 제품을 시연해볼 수 있는 매장에 직접 찾아가 이 여기저기 선을 그어보며 제품을 골랐었다. 하지만 이젠 다양한 기기를 써 본 경험치가 제법 쌓였기 때문에 굳이 매장에 가보지 않고 온라인으로도 기기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와콤은 '신티크 프로'라는 이름의 프리미엄 제품군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라인도 함께 출시했다. 그렇게 구입한 22인치 신형 신티크는 보급형이라곤 하지만 와콤 프로펜2를 사용하여 기존에 쓰던 구형 신티크 22HD보다 훨씬 감도가 높은 8,192레벨의 필압감지 능력을 자랑한다. 역시 전자 기기는 늦게 살수록 좋다. 신제품은 나날이 발전하니까.

이제 그간 신티크 22HD를 든든히 바쳐온 어고트론(Ergotron) 사의 모니터 암에 새로운 신티크 22를 설치한다. 편한 자세를 만들어주는 장비에 돈을 아끼면 결국 파스값과 병원비가 더 많이 나가는 법이다. 특히나 등에는 작가 생명이 걸려 있다. 영광의 시기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척추가 망가져 작가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소중한 허리를 지켜줄 의자와 모니터 암 등의 아이템에는 아낌없이 투자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렇게 8년간 함께 한 옛 동료의 시체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액정 타블렛을 올려놓고 보니 보급형이니 뭐니 해도 역시 새 것이 보기 좋단 것을 느낀다. 너는 부디 2년 더 채워서 10년은 함께 하자. 


5. 클립 스튜디오와 브러쉬들

스케치업 배경이 제 자리를 잡은 원고에 인물 스케치가 얹어지고 펜 터치가 진행된다. 요즘에는 클립 스튜디오에서 벡터 레이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미지의 확대가 자유롭고 선의 수정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때그때 먹을 사용해야 하는 내 작화 스타일에는 잘 맞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레스터 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웹툰계의 제작환경 변화는 기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웹소설을 원작으로 웹툰을 제작하는 노블코믹스 작품의 약진이 시장을 크게 확장시켰다. 노블코믹스를 이야기할 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건 꽃과 레이스와 화려한 장식들이 컷의 안팎을 수놓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다. 경쟁적으로 작화력을 뽐내는 하이 퀄리티의 로맨스 판타지 웹툰들을 보고 있자면 작품을 열어둔 스마트폰 화면에 벌이라도 날아와 앉는 게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이런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웹툰 작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클립 스튜디오의 힘이다. 

클립 스튜디오는 만화 작업에 최적화된 다양한 기능을 자랑한다. 특히 클립 스튜디오 에셋(assets)을 통해 유저들이 직접 제작한 브러쉬들이 공유되고 있어 이를 통해 작업 시간을 단축하고 장식적 요소들을 손쉽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연재작 <인간의 온도>에서 시체를 자주 그려야 했던 나로서는 꽃이나 레이스보다는 핏자국 브러쉬가 훨씬 유용했다. 

펜 터치가 완료된 원고는 네이버 클라우드를 통해 채색 어시스턴트에게 공유된다.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브라우저의 알림 설정을 통해 어시스턴트에게 새로운 파일이 공유됐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채색요청 폴더에 공유됐던 펜선 파일은 채색 어시스턴트의 손을 거쳐 채색 완료 폴더를 통해 나에게 전달된다. 파일 공유를 위해 디스켓이나 CD를 구워서 자전거 타고 친구네 집에 가야 했던 나의 학창 시절은 이미 근현대사가 됐다.

채색 작업 역시 클립 스튜디오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본적으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에 비해 만화작업에 특화된 툴인 클립스튜디오의 특장점 중 하나는 채색의 속도다. 포토샵처럼 일일이 레이어 선택을 바꿔가며 영역을 지정하지 않아도 클립 스튜디오에서는 채색 레이어에 배색 작업을 하는 것이 훨씬 빠르게 진행된다. 아직은 개발 단계지만 조만간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동채색도 보다 보편화될 것이라고 한다. 몇 번 사용해봤지만 아직은 실전 원고에 당장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딥러닝을 통해 수준이 금방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6. 백업이야. 언제나 백업해.

백업을 안 하면 직업이 바뀔 수도 있다!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설가 김영하 선생은 소설 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작업이 백업이라고 밝혔다. 데이터 백업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글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고, 이같은 일이 일어나면 모든 의욕을 잃고 직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만화라고 다르랴. 작가로 생활하면서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 중이던 원고를 공중분해시킨 경험이 있지만 때로는 그 원인을 알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이미 정신이 몽롱해지고 평소 찾지도 않던 신에게 책임을 묻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성을 찾고 어떤 잘못으로 파일이 유실됐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네이버웹툰의 마감일은 연재 전일 오후 세 시다. <서북의 저승사자>는 네이버웹툰의 목요일 탭에 있었으니 수요일이 마감이었고, 일이 벌어진 건 수요일 오전 11시였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건너편에서 새 아파트를 짓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지반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고를 하던 중 밖에서 “쾅” 하고 뭔가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전이 되었다. ‘피슉-’ 소리와 함께 컴퓨터 전원이 나가고 액정타블렛과 모니터가 일순간 검은 낯빛을 띠었다. 나도 ‘피슉-’ 하고 정신이 나가고 검은 낯빛이 되었다. 오른손엔 타블렛 펜을 들고 왼손은 키보드의 단축키를 누르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마감이 네 시간 남은 상황에서 당장 새로 그려야 할 건 그리 많지 않았으나 정전으로 인해 내가 느낀 공포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 정전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는 것. 두 번째는 원고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최종 편집까지 하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더 필요할 텐데 만약 두 시간 이상 정전이 지속되면 정시에 마감하기는 이미 글렀다는 것. 두 번째 이유가 더 끔찍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언제 저장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다행히 전기는 금방 복구되었고, 나는 저장 단축키인 Ctrl+S를 누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 큰 작업 손실 없이 정시 마감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의 식은땀 나던 기억은 등줄기에 오롯이 새겨졌다.

이후에 동료 작가의 추천으로 무정전 전원장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하나를 구입했다. UPS(Uninterruptible Power Supply system)라고도 불리며 정전 시 데이터 유실과 하드웨어 손상을 막아주는 보조 전원 배터리 정도로 이해하면 쉽겠다. 검고 무거운 멀티탭처럼 생겼다. 내가 사용하는 건 슈나이더 일렉트릭 사의 APC에서 만드는 BE550이라는 제품으로 정전이 돼도 데스크톱 PC 기준 20~30분 정도는 버텨주는 모델이다. 이제 정전이 되어도 여유 있게 작업 중이던 원고를 저장하고 컴퓨터를 정상 종료할 수 있게 되었다.

UPS는 이렇게 생겼다.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작년에 외장하드 문제로 펜 터치를 반쯤 끝낸 원고를 날려 먹는 일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이때는 채색 어시스턴트에게 작업물을 공유하기 위해 네이버 클라우드에 올려둔 스케치 단계에서의 파일이 남아있어 한 회분을 통째로 날려 먹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Ctrl+S(중간저장)를 생활화해야 하며, 작업 중 잠시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동안 데스크톱의 하드 디스크와 외장 하드, 그리고 클라우드까지 3중으로 원고 데이터를 백업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자. 만화에서도 소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백업이다. 직업이 바뀔 수 있다.


7. 신세계의 작가들

정확한 위치는 비밀에 부쳐진 네이버웹툰 작가들만의 아지트가 있다. 네이버웹툰이 작가들을 위해 내어준 그곳에서 몇 년 전 한 작가가 자신이 만든 VR 웹툰 제작 프로그램을 시연하고자 동료들을 모은 적이 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 이용해본 VR 기기를 통해 장안의 화제였던 공포 단편 웹툰을 보고 의자를 덜컹거리며 놀란 후 프로그램 사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PPT 제작을 할 수 있는 수준이면 VR 웹툰을 만드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사용법이 직관적이고 쉽게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다. 이게 벌써 몇 년 전이니, 지금은 더 발전해서 사용법이 더욱 쉬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기술의 발전은 나 같이 VR 웹툰을 처음 보는 사람도 한 번 제작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스크린톤을 칼로 오리고 겹치고 긁어내 음영 표현 연습을 하고, 잉크가 번져 들어가지 않도록 삼각자 밑에 10원짜리 동전을 붙여 자선을 긋던 20세기의 만화가 지망생 소년에게 지금 우리의 작업환경을 말해주면 믿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렇기에 후세대 사람들이 지금의 웹툰 작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말을 할지도 궁금하다. “세상에, 채색을 직접하고 있어”라고 하려나. 부디 “그때는 만화를 사람이 만들었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공장에서 그릇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서 도예가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듯, AI가 발전해도 만화가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어린 시절에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점차 게을러질 거라는 경고를 흔하게 듣고 자랐다. 하지만 SF 작품의 시대 배경 같아서 아직도 어감이 어색한 2021년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게을러지는커녕 여전히 쉴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그저 과거보다 같은 시간 안에 훨씬 많은 업무량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도구가 달라졌을 뿐 만화가는 여전히 만화를 그린다. (일러스트 제공 : 양세준 작가)

앞으로의 만화 제작 공정에도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수많은 기술 발전이 함께할 것이다. 그것이 작품을 작품답지 않게 만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대에도 작가다운 작가가 있는 한 작품다운 작품은 태어나는 법이다. 내가 자선을 똑바로 긋는 연습을 해야 했던 시간에 지금의 지망생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루는 법을 연구하고 있고, 스크린톤을 긁던 시간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출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할 수 있으니 우리의 작품세계는 앞으로도 보다 흥미로운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고집도 여전히 존중받는 세상이길 바란다. 여전히 잉크 젖은 펜대를 쥔 사람들과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첨단의 작업 기기를 다루는 이들이 각자의 작품으로 문화 예술로서 만화가 지켜야 할 다양성의 축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근미래의 만화계를 기대해본다. 그때에도 만화는 사람이 만들어가고 있기를. 작가는 작가로 존재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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