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옛날엔 만화 원고 이렇게 만들었다 : 10원짜리 동전부터 애독자 엽서까지
27년차 만화 기자 → 웹툰 PD가 전해주는 "라떼는 말이야" 만화 이야기
김현국 (sba웹툰파트너스 매니저) 2021.06.18



옛날엔 만화 원고 이렇게 만들었다 : 10원짜리 동전부터 애독자 엽서까지

만화를 꽤 오래전에 ‘업業’으로 선택했다. 무려 27년 전이다. 만화를 업으로 삼았다고 하면 아마도 나를 만화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나는 만화 잡지 편집부에서 일했다. 만화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편집자’ 또는 ‘기자’라고 불리는 직업이었다.

처음 이 일에 몸을 담았을 때는 편집자보다는 ‘기자’라는 호칭으로 많이 불렸다. 당시는 수많은 잡지들이 대중을 사로잡으며 분야별로 잘 팔릴 시기였다. 그리고 그런 잡지사에서 취재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통 기자라고 칭했다. 그래서 나도 기자로 불린 것 같다. 만화 잡지라는 전문 매체의 편집부에서 일했으니 말이다. 당시의 명함에도 편집자가 아니라 기자라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내가 기사를 쓰는 기자(記者)가 아니라 콘텐츠를 만드는 편집자나 기획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자라고 불려도 기자(記者)가 아닌 기자(企者)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기자'로 불리던 시절에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만화 일을 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만화 기자가 아니다. 나는 웹툰 PD가 되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담당 작품의 작가가 작품을 잘 할 수 있도록 작가와 작품을 관리하고, 편집하고, 신인 작가가 자기 작품을 잘 다듬어 데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삐삐에서 스마트폰까지 격세지감의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만화도 웹툰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격변을 겪었다.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업무의 프로세스, 시스템, 속도 그 모든 것이 달라졌다. 27년간 그 변화의 역사를 꾸준히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웹툰을 보고 자라는 세대는 알지 못할 이야기, 그 시절에는 대체 만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10원짜리 동전이 만화 그리는 데 왜 필요했게요?

요즘의 웹툰 원고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데이터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옛날에는 종이 원고에 펜으로 만화를 그렸다. 지금은 컴퓨터나 타블렛 등 디지털 작법에 필요한 똘똘한 도구 몇 가지만 챙기면 언제 어디서든 원고를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는 만화를 하려면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있어야만 했다. 연필, 펜대, 펜촉, 잉크, 라이트박스, 스크린톤, 지우개, 화이트, 칼, 30㎝ 자 그리고 십 원짜리 동전 등…(왜 필요한지 아는 사람만 아는 필수 도구이며 최소한 40원이 필요했다). 하물며 만화 원고를 보관하는 봉투와 캐비닛도 이제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캐비닛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잡지에 연재하고 분량이 쌓인 원고들은 모아서 단행본을 만든다. 이때 담당 기자는 원고를 가져갔다가 단행본 출간이 끝나면 작가에게 다시 원고를 반환해야 한다. 하지만 워낙 일이 바쁘니 바로 반납을 못 하고 캐비닛에 원고를 보관해둘 때가 있다. 그런데 캐비닛에 원고를 두었다가 그만 원고가 분실된 사건이 있었다. 결국 그 작가는 수천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메일과 드라이브로 원고 파일을 주고받고, Ctrl+C, Ctrl+V 한 번씩이면 1초 만에 파일 복사가 가능한 시대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겠지. 

 

△ ⓒ엘프화가 
 자에 묻은 잉크가 원고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에 10원짜리를 붙였다. 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모서리에 하나씩 붙여서 총 40원. 
예전에는 집중선도 다 자를 대고 일일이 그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팩스로 주고받고 칼질로 대사를 오려 붙이는 식자 작업

나는 만화가 ‘웹툰’으로 대체되는 이 시대를 가끔 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다 했나 싶은 것들을 옛날엔 수작업으로 일일이 다 했었다. 요즘은 식자 작업을 할 때 포토샵으로 직접 원고 파일에 타자를 쳐 넣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옛날의 식자 작업은 그렇지 않았다. 작가한테 만화 원고를 받으면 만화 기자는 먼저 원고에 쓰인 말 칸 안의 대사를 각 말 칸별 서체와 크기를 분류한다. 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쓰든, 워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출력하든 해서 출력소에 팩스로 보낸다. 출력소는 보통 식자집이라 불렀는데 주로 을지로나 충무로에 많이 있었다. 그러면 식자 집의 오퍼레이터가 그것을 다시 타이핑하고 인화지로 출력해서 편집부로 보내준다. 보통 이 배달을 아르바이트 인력이 담당했다. 배달 아르바이트는 매일 한두 번 오고 가는데, 급한 마감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곤 했다. 

앞에서 원고가 도착하면 식자 작업을 한다고 했지만, 원고가 도착하고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허비된다. 그래서 보통 팩스로 스토리를 먼저 받아서 만화 기자가 인화지 출력을 미리 해놓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출력한 인화지는 칼질을 해서 말 칸 안에 대사를 한줄 한줄 정성스레 붙인다. 이 이후에 교정해서 쪽자 붙이고 하는 공정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다시 떠올리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구차한(?) 작업이라 생략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공정이 다 사라진 초스피드 5G 시대. 아주 오래전 교정과 수정 작업에 소요했던 수없이 많은 노고와 시간들은 지금 시대에 생각하면 마냥 신기루 같다. 90년대생 후배 웹툰 PD에게 말 칸 안의 대사를 육필로 써서 출력소에 팩스로 보내고 인화지라는 것을 만들어 칼질하며 편집했다고 하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원고 배달 : 작가나 문하생의 직접 전달에서 퀵서비스까지

과거 작가 화실에서 완성된 만화 원고가 편집부로 전달되는 방법은 보통 세 가지의 경우가 있다. 첫 번째는 작가가 편집부에 직접 방문해서 원고를 전달하는 경우다. 특별한 이슈가 없다면 보통은 마감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에 작가와 따로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가 원고를 전달하러 오면 잠깐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경우를 가장 좋아했다. 두 번째는 화실 일을 도와주는 문하생(또는 어시라 불리는 보조 작가)이 가지고 오는 경우다. 세 번째는 등기우편을 통해 전달하는 경우다. 지방에 화실이 있는 경우가 보통 이렇게 원고를 전달한다. 하지만 등기우편으로 보내는 것은 마감을 잘 지키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 지방(보통 대구나 부산이었다)에서 출발하는 고속버스 편을 통해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는 만화 기자가 직접 고속버스 수하물 수령처에서 받아온다. 때로는 전달을 부탁받은 승객과 만나기도 했다. 

이런 시기를 지나쳐 혁신적인 시스템이 도입되는데 바로 ‘퀵서비스’의 출현이다. 오토바이 아저씨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감 때 작가를 만날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그와 함께 문하생을 만날 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퀵 아저씨가 편집부에 툭 던져놓고 가는 노란 봉투만 만날 뿐이다. 이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전설적인 사연 하나가 있다. ‘근성’으로 상징되는 한 작가가 있었다. 어느 날 작가의 문하생이 완성된 원고를 챙겨 지하철을 타고 편집부로 이동하던 도중 원고를 분실해버렸다. 당연히 편집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런데 과연 원고는 펑크가 났을까? 보통의 경우라면 만화 기자가 그 작품 대신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보관하고 있던 신인 만화가의 단편 원고를 땜빵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신인 작가의 공식 데뷔 통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성의 만화가는 이틀 만에 16페이지의 원고를 다시 만들어 무사히 마감을 지켜냈다고 한다. 참고로 오토바이 아저씨의 원고 배달 시기는 원고 작업이 디지털로 대체되는 혁신기에 등장한 웹하드로 인해 막을 내린다. 오토바이 아저씨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억의 애독자 엽서

오래전엔 독자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바로미터가 애독자 엽서뿐이었다. 지금은 작품에 실시간으로 달리는 수많은 댓글과 조회 수로 작품의 인가와 성패를 가늠하지만, 과거에는 독자들이 육필로 꾹꾹 눌러쓴 소감문과 인기 작품 투표로 판별했다. 지금 웹툰에 달리는 댓글에 비하면 애독자 엽서는 소규모 데이터지만, 당시에는 정말 소중한 소통의 도구였다. 또한 바를 정(正)자로 표시되는 인기투표 결과는 작가들에겐 그 시절의 베스트 댓글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끔 열정적인 독자들은 애독자 엽서 외에도 작가에게 따로 선물과 편지, 카드 등을 보냈다. 이것들을 다 모아서 살피고, 인기 작품을 선정하고, 엽서를 보내준 독자들 중에 추첨하여 선물을 보내주는 등의 부가적인 업무를 하는 것도 만화 기자의 몫이었다. 애독자 엽서나 선물은 보통 작가 앞으로 오지만 가끔은 만화 기자 앞으로도 왔다. 잡지 말미에는 편집부 만화 기자들의 후기가 들어갔는데 후기를 재미있게 쓴 만화 기자에게는 가끔 응원의 선물이 도착하곤 했다.

 

기술은 달라졌어도 만화의 본질은 그대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만화 기자에서 시작해 웹툰 PD로 있는 나의 삶을 반추해보면 분명 수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만화의 본질도, 편집자의 역할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만화의 본질은 그림과 텍스트의 조합으로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여전히 만화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재미있는,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이다. 더욱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능률적이고 혁신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주 오래전 만화 기자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만화 원고와 인화지 식자, 자, 칼 등의 도구와, 지금의 웹툰 PD 앞에 놓여있는 컴퓨터의 그래픽 프로그램, 웹툰 플랫폼의 계정과 작품 업로드 시스템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하지만 본질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아주 오래전의 만화 기자들이 여전히 현업에서 작가들과 작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역시 오래전에 활약했던 많은 만화가가 여전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 독자에게 선보이고 있다.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들이 참 많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기에 만화·웹툰은 여전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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