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만화가 일이 되었을 때 : 전업 작가의 생존법 by 돌배 작가
현실과 타협하며 스케줄 관리를 철저히
돌배 (웹툰작가) 2021.06.25



만화가 일이 되었을 때 : 전업 작가의 생존법 by 돌배 작가


웹툰을 부업으로 하고 있었을 때는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생계유지는 회사 일로 하고 있으니까 웹툰은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라는 작품을 즐겁게 마무리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퇴사하게 되었을 때도 별 고민이 없었다. 이제는 제대로 내 시간을 내서 작품만 하면 된다고, 어릴 적 꿈이었던 전업 만화가가 되었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새 작품을 준비하면서 제대로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부담스러운 마음이 커졌다. 이미 전작에서 해버린 이야기들은 할 수 없고, 또 다른 세계관을 만들고, 새 인물들을 창조하고, 노력을 들여 그들과 친해져야 하고, 동시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작품이어야 했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부터 내 만화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전업 작가가 되고 나니 점점 나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중요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남이 좋아하는 작품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마냥 좋아서 뛰어들었던 전업 작가의 길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첫 작품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일로서의 만화가 취미로서의 만화와 다른 점

전업 작가가 되고 나니 만화를 대하는 태도도 바꾸게 되었다. 만화는 이제 취미가 아닌 일이니까 회사에서 했던 것처럼 만화를 작업물이나 상품처럼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시간에 원고를 완성해서 넘기고, 하기 싫을 때도 하고, 일정한 양과 질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또, 언제까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떤 형식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작업공정을 세분화해서 시간별로 배분하는 등등의 계획을 세워 실천했다. 애니메이션 회사와 게임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회사와 다른 점은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해야 했다는 점이다. 책임도, 비난도, 보람도, 칭찬도 오로지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회사에서 일했던 것처럼 일하다 보니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내 만화가 나한테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작품의 제1독자인 작가가 재미가 없는데, 과연 다른 사람들한테는 재밌을까? 그래서 <계룡선녀전>의 오랜 준비를 끝마치고 세상에 내놓을 때 독자들을 보기가 민망했다. 나한테 맛없는 음식을 한번 먹어보라고 차려 놓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작품이 공개되고 나니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재미있다는 댓글 반응도 많았고, 주변에서도 잘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줬다. 작품에 대한 칭찬과 다음 편을 보고 싶다는 반응도 많았다. 그 반응을 보고 나는 다시 기가 살았다. 누구에게 받는 인정이 이렇게 짜릿하고 중독적인 줄은 몰랐다. 작품을 연재하는 내내 독자들의 반응을 영양분 삼아 자신감을 키워나갔고, 그것을 발판 삼아 마지막 화까지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 차기작 <계룡선녀전>


전업 작가라면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타협할 줄 알아야

<계룡선녀전>을 마무리하고 또다시 긴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나는 10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다. 늘 그리고 싶었지만,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리지 못했던 판타지물. 그 작품을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1년 동안 슬금슬금 준비했다. 새로운 세계관을 구성하려니 조사해야 할 것도 많고 인물들도 많아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어마어마했다. 혼자서는 그 많은 자료조사와 설정 설계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직원을 고용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준비하고 계획해서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여태껏 배우고 겪어 온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내 수준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봐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막상 원고를 완성하고 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고치고 또 고치길 반복했다. 주변의 의견을 물어보고 피드백을 받아서 원고를 다섯 번 정도 새로 제작했다. 제대로 되기만 하면 내게 큰 만족감을 줄 것 같은 이 작품은 어떻게 고쳐도 마음에 들지 않고 못나 보였다. 정해진 답이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다면 편했을 텐데 만화에는 답이란 게 없으니 이렇게 해야 맞을지 저렇게 해야 맞을지 고민하며 끊임없이 방황했다. 

도무지 만족이 되지 않아 고치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문득 내가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인 제작사인 주제에 몇십 명이 함께 제작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퀄리티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도, 직원에게도 부담이 가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나의 기대를 낮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이 풍선 같은 기대를 낮추어야 내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완결만 하자'로 세웠다.


전업 작가는 스케줄 관리가 필수

직업으로서의 만화는 그에 걸맞은 현실적인 일정 관리가 뒤따라야 한다. 대부분은 웹툰은 주간으로 연재를 하는 만큼 주간 마감의 스케줄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이전 작품들까지는 주간 마감 스케줄로 작업했었다. 하지만 전업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굳히면서 작품을 잘 만든 상품처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이번 작품부터는 월간 마감의 스케줄로 해보기로 했다. 이전에는 글, 그림 콘티 3일, 펜선 하루, 채색 하루, 배경 및 나머지 작업 하루, 이렇게 한화를 6일로 쪼개서 제작했다. 하지만 월간 마감으로 바꾸고 나서는 5화 분량의 글, 그림 콘티 2주, 펜선 1주, 채색 1주, 배경 및 나머지 작업 1주 이렇게 5주 5화 완성으로 바꾸었다.

 


△ 대략적인 5주 월간마감 일정 (제공: 돌배)


물론 계획표대로 완벽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어떤 때는 콘티가 빨리 나오고, 어떤 때는 콘티에만 4~5일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도 최대한 이 스케줄 표를 기준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중간중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휴식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살아있기에 살아남았다

이제 전업 작가 생활도 5년째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신입 작가 같고, 아직도 허둥대고, 얼렁뚱땅 원고를 해치워나가고 있다. 비록 여러 군데에서 만화 지망생들을 가르쳐 왔고, 그들이 답을 몰라 헤맬 때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긴 하지만 사실 아직도 나는 어떻게 만화를 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헤매고,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자리에서 내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목표만 세워놓고 그것을 이정표 삼아 내 길을 가고 있다. ‘현재 작품의 무사 완결'이다. 이따금 원고에 블록버스터급 욕심이 날 때도 있지만 최대한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나 자신과 싸움 중이다. 원고에 대한 만족감은 그 원고에 걸린 기대감에 반비례하는 것 같다. 원고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야 제작할 때 스트레스도 덜 받고 결과적으로 더 좋은 원고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웬만하면 즐겁게 작업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작가 생활을 하고 싶으니까. 


△ 연재 중인 <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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