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데뷔 스토리 : 그렇게 만화가가 된다
만화가 양세준의 데뷔스토리
양세준 2021.07.16



나의 데뷔 스토리 : 그렇게 만화가가 된다

 

1. 데뷔가 제일 쉬웠어요

 “어쩌면 제가 데뷔를 제일 쉽게 한 웹툰 작가일 거예요.”

 이 재수 없는 발언은 팟캐스트 인터뷰 중에 실제로 내가 한 말이다. 내 데뷔는 쉬웠다. 그 시절 웹툰 작가가 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터넷에 올린 그림 한 장으로도 데뷔가 가능했으니까.

 2007년 어느 날 아침, 대학을 휴학 중이던 나는 TV로 NBA 경기를 틀어두고 연습장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날의 그림은 제법 맘에 들었는지 스캔하고 채색까지 해서 ‘돈이 걸리면 승부 근성을 불태우는 내기 농구팀의 가드’라는 설명을 붙여 블로그와 방사에 올렸다. 방사는 ‘방방곡곡 창작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네이버 카페로 지금도 십만이 넘는 그림쟁이들이 업계 정보를 찾고 습작을 올리는 곳이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본 업체로부터 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온라인 농구 게임 '프리스타일'을 서비스하는 조이시티 닷컴이었다.



△ 웹툰 작가로 데뷔하게 해 준 전설의(?) 그 그림

 2021년 현재도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는 ‘프리스타일’은 14년 전에도 넘쳐나던 온라인 게임 중 스포츠 장르라는 희소성과 자연스러운 카툰 렌더링 기법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조이시티는 이 게임 사이트에 유저들을 끌어들이고 최대한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한, 홍보용 웹툰이 필요했다.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웹툰이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건 2003년, 네이버는 이듬해인 2004년부터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으니 2007년은 사람들이 포털에서 웹툰이라는 것을 만난 지 대략 3~4년밖에 안 됐을 때이다. 지금이야 웹툰이 차세대 K콘텐츠의 주역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시절의 웹툰은 연재 자체로 돈이 되기보다는 사람을 모으는 미끼 상품 역할로 주목받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시작한 데뷔작의 제목은 . 3 on 3 길거리 농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였고, 태어나서 처음 그려본 웹툰이었으며, 세이브 원고 같은 건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준비 없이 나는 얼떨결에 웹툰 작가가 되어버렸다.

△ 나의 첫 데뷔작

2. 준프로 만화가

“연재 축하한다. 너도 이제 준프로네.”

 연재를 시작하자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가 내 미니홈피 방명록에 남긴 축하 글이다. 준프로. 프로에 가깝지만 프로는 아닌, 돈을 받고 연재하고 있으니 아마추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프로라 하기엔 매우 쑥스러운 수준의, 데뷔 당시의 어중간한 나를 표현하기에 참 적당한 단어였다. 나 역시 내가 프로 만화가가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출판 만화 시장이 전성기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다곤 해도 여전히 내가 존경하는 선배 작가님들은 대부분 웹이 아닌 지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셨다. 출판 만화를 보며 성장한 만화가 지망생에게 '프로 작가가 된 상상 속의 나'는 당연히 잡지에 흑백으로 된 원고를 싣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이 이미지는 컬러 웹툰이 인기를 얻어가던 시기에도 잘 바뀌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연재 계약을 맺고 내게 주어진 원고료는 회당 10만 원, 그러니까 월 40만 원이었다. 스물네 살의 나에게도 아르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만화로 독자를 만나고, 많진 않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이 함께했을 뿐이다. 미리보기 서비스도, 완결작 유료화도, 기다리면 무료 서비스도 없던 그 시절 웹툰은 정말 돈이 안 됐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3. 차기작 지망생

 2007년에 시작한 의 연재는 재계약을 거듭하여 2010년 1월까지 이어졌다. 완결까지 132화를 그리던 중에 원고료 100%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그래 봐야 월 80만 원이었다. 주간 연재로 월 100만 원을 벌 수 없는 웹툰 작가를 직업으로 삼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그해 8월, 대학을 졸업한 나는 출판 만화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미 프로로 데뷔한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가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을 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앞서 밝혔듯 그때의 난 아직 프로가 됐다는 자각이 없었다. 나에게 웹툰 연재는 주급 10~20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를 2년 7개월간 해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공모전 낙선 행진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010년이 되자 이전보다 종수도 더 줄어든 만화 잡지들은 출판사에 따라 6개월~1년에 한 번 열리는 공모전에서 당선작을 뽑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단편 만화를 그려 공모전에 매번 도전했지만 발표 페이지의 ‘당선작 없음’을 보며 수차례 아쉬움을 삼켜야 했고, ‘아쉬운 작품’으로 내 작품이 거론된 것을 보며 희망 고문에 시달리곤 했다. 그렇게 2012년까지 낙선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웹툰 데뷔가 쉬웠던 만큼 잡지에서의 차기작 연재는 요원했고, 원고 앞에 한없이 작아질 무렵 스스로 만화에 대한 배움이 모자라다는 진단을 내렸다. 만화가 선생님의 화실 문하 출신도 아니고 대학에서 만화를 전공한 것도 아닌, 그림 한 장으로 얼떨결에 ‘준프로’가 되었던 나에겐 만화를 기초부터 공부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정보와 배움을 찾아 이것저것 검색하던 중에 만화와 관련된 여러 사이트들을 즐겨찾기에 추가했고, 만화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를 매일 들락거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만화 칼럼이나 인터뷰를 읽고, 배울 기회를 찾던 중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의 ‘실전형 만화작가 양성과정’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통한 ‘글로벌만화 프로듀서 양성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4. 또 한 번의 데뷔

 이 수업들을 계기로 내 포트폴리오는 바다 건너 일본 만화 편집부의 손에 닿게 된다. 이후에도 일본 출판사의 공모전에 몇 차례 더 낙선한 후 NTT 솔마레 편집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만화 사이트 ‘코믹 시모아’에서 <위험한 유희(アブナイお遊戯)>라는 제목의 중단편을 발표했다. 그렇게 염원하던 재데뷔의 순간이었다. 2~3년간 공모전에 연이어 낙방하던 시절 서른이 될 때까지 성과가 없으면 다른 길을 찾아보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는데, 서른이 되기 한 달 전인 2012년 12월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2013년 1월호에 첫 회가 실렸다. 돌아보면 꽤 아슬아슬했다. 사실 약속의 날이 다가올 때 '일본에서의 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니 일본 나이로 세겠다'라며 한 해 미뤄볼 요량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건 써먹지 못하게 됐다.



△ 일본에서의 데뷔작 <위험한 유희>

 <위험한 유희>는 고교 농구부 감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였다. 그러니까 처럼 또 농구를 소재로 한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 출판사에 처음 선보인 원고는 동양풍 액션 만화 원고였지만 한국에서 농구 웹툰을 연재했던 경력을 본 편집부로부터 스포츠 물을 그릴 것을 제안받았다. 스포츠 만화는 일본에서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데뷔에 유리할 거라는 조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모전에 도전하던 중에도 생활비와 공동 작업실 사용료를 벌기 위해 만화와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외주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 중에는 야구 잡지에서의 카툰 연재도 있었고 야구 선수 봉중근의 자서전 일러스트를 맡아 작업한 것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때까지 내 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이 스포츠와 관련이 있던 셈이다. 그 다음에도 같은 편집부를 통해 <아저씨4 : 끝나지 않는 청춘 (オッサンフォー~終わらない青春~)>을 연재하며 2015년까지 일본 만화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5. 초심, 그리고 연결

 한국은 2013년 레진코믹스를 시작으로 웹툰 유료 플랫폼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고 포털에서도 완결작 유료화와 함께 웹툰 작가들의 고료가 정상화되는 등 업계의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때 즈음 나는 일본어도 못하면서 원고만 일본으로 보내는 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 역역을 확장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다시 한국에서의 웹툰 연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2015년 <서북의 저승사자>를 시작으로 네이버 웹툰에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서북의 저승사자>는 2011년에 그렸던 단편 만화를 장편화한 웹툰이었다. 그리고 그 단편 만화가 국내 출판사 공모전의 아쉬운 작품에 선정된 채 ‘당선작 없음’으로 낙선했던 만화였다. 출판만화 공모전에 내기 위해 기획했던 작품이 4년 만에 장편 웹툰으로 탈바꿈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프로가 됐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연재한 <the HOOPS> 와, 외주라고 생각하고 그린 야구 잡지의 카툰이 스포츠 만화 연재의 경력이 되어 <위험한 유희>로 이어졌다. 따로 떨어진 별들이 이어져 별자리가 되듯 점처럼 따로 존재하던 나의 경력도 나름대로 선이 되어 이어지고 있던 모양이다.

 


△ 출판만화로 기획했었지만 웹툰으로 빛을 보게 된 <서북의 저승사자>

 흔히들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에게 초심을 찾으라고 조언하지만 나에겐 초심을 잃을 기회가 허락된 적이 없었다. 2007년의 나는 신인 웹툰 작가였고, 2013년에도 일본에서 신인이었으며, 2015년 포털에서 연재를 시작했을 때도 너무 오랜만의 웹툰 연재라 사실상 신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14년 전 얼떨결에 데뷔한 뒤로 나는 쭉 신인이었고, 앞으로도 그 얼떨떨한 마음으로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가 볼까 한다. NBA를 보며 연습장에 낙서를 하던 즐거움을 잃지 않는 것, 아마도 내 초심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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