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늘의 우리만화 선정작 평론] 미지에 대한 공포가 복싱만화를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
"더 복서", 정지훈, 네이버웹툰
위근우 (칼럼니스트) 2021.11.12

<더 복서>의 장르는 스포츠가 아닌 코스믹 호러다. 주인공(이자 최종 보스) 유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피드와 동체 시력, 신체 조종 능력으로, 링 위에서 펼치는 퍼포먼스는 복싱이라기보다는 인간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불가해한 존재의 징벌에 가깝다. 아니, 한 줌의 인간적 의도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징벌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그것은 어떤 의도 없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링이란 세계에 내려진 거대한 재해 같은 것이다. 


링 위에 괴물이 나타났다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아론 타이드와 함께 유이(有二)한 ‘괴물’로서 유가 지닌 압도적 재능은 역시 천부적 재능을 지녔던 백산조차 절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작품 초반, 유와 맞붙은 백산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서 나오는 거대한 압도감과 공포를 느낀다. 자신의 재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내려다보던 백산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의 거대한 눈을 마주하고 두려움에 떠는 장면은 전형적인 코스믹 호러의 연출이다. 이때까지는 나쁜 강자를 쓰러뜨리는 더 강한 존재로 인한 소위 ‘사이다’의 쾌감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K에게 스카우트되어 복싱 선수가 된 유의 모습은 경탄과 더불어 공포감마저 자아낸다. 승리에 대한 갈망도,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이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공허한 영혼은 링 위를 폐허로 만드는 거대한 재앙 같은 존재였다. 자, 링 위에 괴물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유의 데뷔전 상대인 존 테이커의 주특기는 반칙 기술인 헤드락 훅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복서로서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유에게는 그런 반칙조차 통하지 않는다. 유는 존을 일부러 다운시키지 않고 피투성이로 만들고, 관중들은 ‘악마’라고 부르며 그런 유에게 열광한다. 그렇다, 악마. 


미지의 공허 대 인간의 마음

유를 동경하던 라이트급의 제왕, 장 삐에르 마뉘엘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그 또한 유가 가진 진짜 능력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수준이다. 몇 번이나 다운된 장은 2라운드 만에 스스로 벨트를 넘겨준다. 노력형 천재이자 보통 사람의 영웅인 주니어웰터급 선수 다케타 유토는 심지어 경기 도중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각성에 이르지만 그 순간 유가 온힘을 다해 날린 주먹에 턱이 부서지면서 복서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독자로 하여금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초반, 백산과의 싸움으로 각성한 유에게서 독자들이 기대한 것은 일종의 먼치킨 장르로서의 쾌감이었다. 그러한 쾌감은 실제로 작품 전반에 드러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쾌감보다는 모든 것을 압살하고 폐허로 만드는 공포감이 차오른다. 독자들은 이 압도적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자 최종 보스)이 경기에서 지거나 단 한 대라도 맞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지만, 반대로 그 거대 재해에 맞서 싸워야 하는 하찮고 작은 인간을 가엾게 여기고 응원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링 위에서 ‘유’라는 괴물을 상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거대한 존재에 맞서 싸우는 고귀한 행동은 예정된 패배와 별개로 인간이 가진 하나의 가치로서 기억된다. 그런 이유로 비록 패배했지만 유토의 존재는 수많은 팬들에게 용기 그 자체로 기억되고, 장 삐에르의 경우 유의 능력을 동경하며 자신을 불태우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을 되찾는 쪽을 선택한다. 일종의 개그 캐릭터였던 크루저급 챔피언 그리고르예프 빅토르조차 역대 타이틀전 최단 시간으로 기록된 패배를 당하면서도 시합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며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인간은 재앙을 이길 수 없지만,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거대한 존재 앞에서 그 보잘것없음을 지켜낼 때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증명된다.

스피디한 전개가 중요해진 최근의 웹툰 환경에선 거의 금기에 가까운 과거 회상이 매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전개가 느리다는 느낌도 독자의 부정적 반응도 없는 <더 복서>의 독특한 스토리텔링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최근 웹툰의 ‘사이다 전개’라는 것이 주인공이 겪는 갈등과 위기가 짧아지고, 위기 해결을 통한 쾌감의 주기는 더욱 빨라진 반면, <더 복서> 안에서의 유는 위기 상황 자체를 겪지 않는다. 작품 속 유의 승리는 확고하고, 작품 밖 독자에게도 이미 예견된 사실이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너무 빠른 결과를 유예하는 것은 예정된 패배 앞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이들이다. 이들의 사연은 짧고 일방적인 승부에서 유의미한 갈등 구도를 만들어낸다. 거대한 미지의 공허 대 인간의 마음이라는 구도를. 


최종적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

유의 패배를 바라지 않던 독자가 그럼에도 그에게 진 패자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강한 공감을 느낄수록, 이 싸움은 인간의 승리로 귀결된다. 유토가 지고, 산토리노 파브리조가 지고, 빅토르가 지더라도, 인간이 그 싸움을 통해 증명한 가치는 독자의 연민과 함께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민은 최종적으로 ‘유’라는 존재를 향한다. 복서로서의 유는 인외적인 재앙이지만, 인간으로서의 그는 상처 입은 안타까운 존재다. 유의 공허는 공포의 근원이지만, 또한 그에게 빛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J로부터, 친구인 인재로부터 빛을 발견하고 궁금해 했지만 여전히 그 어떤 빛도 빨아들이는 어둠에 침잠해 있다. 과연 유는 K로부터,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아론 타이드와의 ‘괴물 대 괴물’ 대결에서마저 승리한 그가 이제 ‘복싱의 신’ J와 승부를 앞둔 시점에서 생긴 궁금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인간의 존엄이라는 테마를 어떻게 완성할지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과연 신은 재앙을 다스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더 거대한 힘의 승리가 아닌, 인간의 마음의 승리가 될 수 있을까.

그러니 이것은 최종적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절대적 재앙 앞에 선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서 그 재앙을 구원하는 이야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가 되면 코믹스 호러 장르물이면서 스포츠 만화인 척하던 이 작품은, 코스믹 호러의 세계관에 열정 스포츠 만화의 정신을 남긴 더없이 독특한 만화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까지의 결과물만 봐도 놀라우리만치 참신하지만.


위근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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