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새삼 다시 꺼내기도 뭣한 이야기지만 일본만화로 대표되는 일련의 만화 표현과 장르적 규칙들, 즉 ‘manga’는 이미 영미권 청소년들 사이에서 완전히 정착했다. 미국 전통의 슈퍼히어로 만화들은 갈수록 매니아 문화의 전유물이 되어가서, 오히려 헐리웃의 실사영화판만이 원래 이 장르가 지니고 있던 보편적 대중성을 상기시켜줄 뿐이다. 쉽게 이입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상력과 대결의 재미라는 빈자리를 매꾸고 있는 것이 바로 청소년 대상의 ‘망가’인 셈이다. 실제로 일본이나 한국, 중국 등에서 점점 더 많이 수입되고 있는 만화작품 가운데에도 성년만화의 경우는 문학성 위주로 평가받는 좁은 시장으로 갈 뿐, 주류장르화로부터 거리가 먼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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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의 애니메이션 포스터 |
이런 망가 붐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고 보니, 그 영향을 받은 작가층 역시 대두되었다. 사실 영미권 작가들이 망가풍의 영향을 받은 것 자체는 최소한 80년대의 ‘아키라’ 이래로 계속되어온 일이지만, 특정 작품이나 작가가 아니라 장르 자체를 뚜렷하게 흡수한 것은 최근의 현상이다. 이러한 영미권 작가의 망가풍 만화를 속칭 ‘네오망가’라고 부르는데, 최근에는 ‘Mangaka’ 라는 제목으로 네오망가 계열의 유명 작가들을 소개하는 책이 따로 나왔을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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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atokyo 시리즈 중( http://www.megatokyo.com 에서 시리즈를 감상할수 있다.-편집부) |
초창기 네오망가의 특징은 일본만화 오타쿠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성향이 일반적이었다(Megatokyo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점차 망가 계열 특유의 변형된 설정의 환타지 성향을 모사하기 시작하거나, 꼬여있는 로맨스 접근을 직접 구사해보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일본만화의 대량 수입을 통해서 빠른 시간에 입지를 구축한 바 있는 토쿄팝 출판사의 경우 특히 네오망가의 육성에 적극적이다. 미국의 일반적인 출판 형태인 코믹북이나 큼직한 TPB 방식이 아니라, 일본만화의 포켓형 단행본 판형에 맞추어 일본 만화와 아예 출판 외관에서부터 구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출판 방식을 실행중인 것이다. 그것도 1-2년전에만 해도 단편들을 긁어서 모음집을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더니, 어느덧 여러 권 단위의 시리즈도 출간하고 있다.
물론 아직 완성도는 편차가 있다. 많은 작가들이 망가풍 그림체를 흉내내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다 보니,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모사하려다가 오히려 어설픔을 드러내고 마는 함정에 빠져있기도 하다. 즉 중학교에서 처음 만화동호회에 가입해서 동인지를 창작할 때처럼, 의욕과잉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셈이다. 게다가 망가는 미국만화와는 달리 자고로 이래야한다는 식의 고정관념 역시 강하게 작용하여 이런 경향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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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Days] 표지이미지 |
토쿄팝의 네오망가 계열 라인업에서 최근 출간된 흥미로운 사례가 바로 ‘12Days’이다. 이 네오망가 순정물은 June Kim(김유월)이라는 미국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작가의 작품. 망가풍의 영향권 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한국 작가가 미국에서 만화 관련 정규 교육을 받으며 미국식 스타일을 익혔는데, 결국 다시금 망가풍의 묘사를 특기로 하는 라인업에 들어가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이 복잡한 태생의 결과, 이 작품은 한국식 순정만화의 문법, 미국 인디 만화 특유의 사색적 분위기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다. 물론 출간된 형식은 망가 단행본 풍의 포켓 사이즈 흑백 인쇄 형식이다.
문화는 섞이기 마련이다. 비교적 오랫동안 문화권간 거래가 적었던 만화 역시, 언젠가부터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미디어가 발달해서 서로 교류하기가 쉬워질수록 더욱 더 섞인다. 사실, 네오망가가 원류 망가보다 더 망가다워질 날도 어쩌면 올지 모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원조나 종주권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사회문화에 가장 적합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
2006년 12월 vol. 46호
글 :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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