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앙굴렘에서 만나는 유럽 대안만화의 현재
김대중 2004.03.01


벌써 3년째, 매년 1월 말이면 프랑스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러 간다. 작년 서른 살 생일을 거창하게 치른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이 바로 그것. 게다가 내가 일하고 있는 출판사 ‘새만화책’이 부스를 설치하게 되었으니 바쁘고 긴장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간 앙굴렘에는 독립만화 유통연대Comptoir des Independants의 대표인 라티노 임파라토Latino Imparato가 부스 인테리어의 막바지 작업을 진행하며 반갑게 맞아준다. ‘독립만화 유통연대’는 이름 그대로 프랑스와 유럽권의 소규모 대안만화 출판사들의 유통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독립만화 유통연대의 라티노 임파라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뒤에 보이는 출판사는 작년에 무슈 페라이유 전시를 열었던 ‘르캥 마르토’이다.

페스티벌 마지막 날, 가져간 책을 모두 판매하고, 새만화책 부스를 정리했다.

라티노는 이번에 새만화책의 부스 참여를 도와 페스티벌 사무국과의 행정적인 절차와 업무를 해결해 주었다. 독립만화 유통연대의 부스에는 새만화책을 비롯해 라티노 자신의 출판사인 라캄Racham, 유쾌한 사진만화를 선보였던 플레블레브flblb, 스위스의 아트라빌Atrabile, 캐나다의 파스테크la Pasteque, 프레온Freon(벨기에)과 아목Amok(프랑스) 출판사의 연합체인 프레목Fremok 등 총 7개의 업체가 참여하였다. 올해 인테리어의 콘셉트는 ‘정육점’(작년에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이라는데, 정육점에서 사용되는 기계들을 인쇄해 부스의 면을 둘렀지만 한국의 정육점을 상상해서였는지 생각보다 얌전한 분위기에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했다.

막상 출판사의 부스를 차리고 보니, 앙굴렘의 다양한 눈요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책장을 넘기는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가만 자리에 앉아서도 단순히 관람객이나 독자가 누릴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다. 가장 즐거웠던 일 중의 하나는, 젊은 만화 지망생들과 작가들과의 생생한 만남이다. 대부분 일정한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는 이들은 자신의 포트폴리오와 스스로 제작한 출판물을 가져와 보여주는데, 이제야 짧은 언어 실력에 미안할 수밖에 없으니... 놀라웠던 것 중의 하나는, 피터 쿠퍼Peter Kuper가 자신의 포트폴리오와 출간작들을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피터 쿠퍼는 <타임> 과 같은 시사적인 잡지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하며, 23년간 이어온 진보적인 정치만화 잡지인 의 편집장이자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의 교수로, 이미 인정받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인과 같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의 겸손한 태도와 작가로서의 성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소시아시옹에서 출간한 <평양> 의 작가인 기 델리즐Guy Delisle은 부스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문의를 해 왔다. 플레블레브의 작가로 통역을 도와주던 최주현 씨에 따르면 그의 작품이 서구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실제 남북한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귀뜸을 해준다.

라소시아시옹에서 출간한 <평양> 의 작가인 기 델리즐Guy Delisle은 부스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문의를 해 왔다. 플레블레브의 작가로 통역을 도와주던 최주현 씨에 따르면 그의 작품이 서구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실제 남북한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귀뜸을 해준다.


파케 출판사의 부스 전경

세이유 출판사의 부스 전경. 뒤쪽으로 독립만화 유통연대의 부스가 보인다.

앙굴렘 페스티벌에서 가장 큰 판매 전시장은, 국제저작권 부스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두 곳으로 나뉘어 있고, 이곳에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중 오른쪽 부스에 대부분의 대안만화출판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앞서 말한 독립만화유통연대의 출판사들을 비롯해 라소시아시옹lAssociation과 코르넬리우스Cornelius, 베르티주 그래픽스Vertige Graphics, 르캥 마르토Les Requins Marteaux, 에고 콤 엑스Ego comme X, 세이유Seuil, 파케Paquet, 네덜란드의 우그 앤 블릭Oog & Blik 등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권의 대안만화 출판사들과 위마노이드Humanoides, 다르고Dargaud, 카스테르만Casterman과 같은 전통 있는 주류 출판사들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들 출판사 간에는 경쟁의식보다는 서로에 대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실제로 한 명의 작가가 여러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발간하는 경우가 있고, 주류와 독립 출판사를 오가며 사인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프랑스 대안만화의 대표격인 ‘라소시아시옹’의 모습. 줄무늬 옷을 입은 이는 멤버 중의 하나인 만화가 므뉘이다.

역시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역시 라소시아시옹의 부스이다. 라소시아시옹은 올해도 그들만의 독특한 카탈로그를 내놓았는데, 작년의 클래식 자동차에 이어 올해는 중국혁명화를 기본소재로 역시 미니멀하고 여유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대안만화 출판사 중 가장 큰 10미터 정도의 부스도 별 인테리어 없이 이 카탈로그를 벽면에 빼곡히 쌓아놓은 게 전부이다. 행사 기간 내내 라소시아시옹의 영웅들의 사인회가 이루어졌는데, 마르얀 사트라피Marjane Satrapi, 에드몽 보두앵Edmond Baudoin, 장 크리스토프 므뉘Jean-Christophe Menu, 다비드 베David B. 등 라소시아시옹의 영웅들의 사인회가 이루어졌다.


전년에 비해 일본만화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음을 느끼게 한다. 판매대 오른쪽으로 자유롭게 만화책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피카Pika와 같이 일본만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도 있지만, 주류 출판사인 델쿠르트에서도 대대적으로 일본만화를 수입해 출간하고 있다.

코르넬리우스는 개인적으로 작년에 가장 흥미로운 만화 중의 하나였던 <세팔루스Cefalus> 작가인 루도빅 뒤뵈름Ludovic Debeurme은 자신의 개인사적 이야기인 <루돌로지Ludoligie> 를 출간하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제목도 무척 재밌지만, 삶의 불안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특유의 섬세함과 가벼움으로 묘사해 실망치 않게 한다. 이 작품은 올해 앙굴렘 만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에고 콤 엑스는 일본 대안만화의 대가인 츠게 요시하루의 <무능한 사람> 과 그의 오랜 친구인 요시히로 타츠미의 <대발견> 을 출간하였다. 츠게 요시하루는 이미 프랑스와 서구권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책이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워낙 자폐적인 성격 탓에 그간 지속적으로 출간을 거부했었는데, 에고 콤 엑스 소속의 작가인 부알레Frederic Boilet의 권유로 책이 나오게 되었단다. 일본만화의 출간은 작년에 앙굴렘 만화상을 수상한 다니구치 지로 등을 비롯해 이미 앞으로 프랑스 권에서의 일본 대안만화 출간을 예고한다고 보인다. 실제로 대안만화 쪽뿐 아니라 프랑스의 주류 만화 쪽에서는 이미 일본만화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는데, 올해는 특히 더한 느낌을 받았다.


<캄펑의 개구쟁이> 의 표지로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만화가인 라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만화이다. 국내에는 <캄펑의 개구쟁이> , 그 후속편인 <도시의 개구쟁이> (출판사 오월)가 출간되었다.

일본 외에도 아시아권과 제3세계의 대안만화들은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란 출신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를 비롯해 올해에는 말레이시아의 출중한 만화가인 라트Lat의 <캄펑의 개구쟁이Kampung boy> 가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국제적인 만화문화의 교류와 더불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만화를 흡수하려는 당연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부스에서 만난 인도인 만화가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었고, 그도 인도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하며, 이는 사트라피의 작품이 성공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서구적인 시선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만화가 처음 소개될 때의 현상이라고 여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작년의 대대적인 한국만화특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소개되고 있는 한국만화는 상업적인 일본풍의 만화가 대부분이며, 한국적 색채를 드러내는 만화는 아직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적인 교류와 확장은 베르티주 그래픽스의 <블랙Black> 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블랙> 은 베르티주가 이탈리아의 코코니노Coconino 출판사와의 연계 속에 출간한 것인데,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유럽권 작가들과 북미권 작가들 그리고 역시 일본의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작가의 단편과 더불어 한 페이지를 작가 소개에 활용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대안만화의 주요한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코코니노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만화가인 이고르트Igort는 일본에서 활동을 하며 일본식의 만화어법과 스타일을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한 작가로, 앞서 말한 부알레와 같이 일본 대안만화의 전도사로 자리하고 있다. (코코니노 출판사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스에히로 마루오나 카주이치 하나와와 같은 일본의 대안만화를 출간하며, 캐나다의 드라운 앤 쿼틀리Drawn & Quaterly와 프랑스의 베르티주 출판사 등의 인쇄도 대행해 주는 등 유럽 대안만화의 국제적인 변화에 가장 빠른 적응력을 보이고 있다. 앙굴렘 소개 책자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앞으로 진행될 국제적인 페스티벌을 앙굴렘과 함께 진행할 것이라니 그들의 역할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라소시아시옹에서 출간한 <평양> 의 작가인 기 델리즐Guy Delisle은 부스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문의를 해 왔다. 플레블레브의 작가로 통역을 도와주던 최주현 씨에 따르면 그의 작품이 서구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실제 남북한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귀뜸을 해준다.  

막상 작은 변화들과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올해에는 보기 힘든 것 같다. 실험적인 작품들도 많이 줄었고,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작업들에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판진 전시장에서도 느껴지는 것인데, 판진의 입점한 독립적인 출판사와 창작집단들 또한 언더그라운드적인 색채보다는 정리되고 안정된 모양새의 오히려 고상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을 단순히 성장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만화라는 살아 움직이는 매체의 생명력이 주춤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울 수 없다.
 
부스에 앉아 가만히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앙굴렘 페스티벌의 단순한 관객과 독자로서는 접하지 못했던 속이야기들에 대해 알게 된다. 올해와 작년의 앙굴렘 그랑프리 수상작이 상업성에 치우친 선택이었다는 불만에서부터 국제적인 페스티벌에 대한 한계(예를 들자면, 앙굴렘 페스티벌에 수상작들은 서구권에 치우쳐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영어와 불어의 번역판이 출간되지 않은 경우에는 수상작에 오른 예가 없다.) 판매 전시장에서 진행되는 사인회도 주류적인 작가들에 치우쳐 있으며, 덜 대중적인 출판사에 대한 홀대 등도 이러한 불만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상업적인 선택들에 치우친다는 것.
실제로 이러한 목소리는 앙굴렘이 새로운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이런 생각은 앙굴렘 페스티벌의 조직위와 참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만화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더욱 활발해 져가는 국제적인 만화시장과 문화의 교류, 커져 가는 페스티벌의 규모에 비해 앙굴렘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짧은 행사기간 등은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반대로 어느 정도 만화문화권(실제로 올해에는 주빈국을 통한 특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직위원장인 장 마르크 테브네의 말처럼 이제는 지역에 관계없이 독립적인 페스티벌이 될 수도 있는데, 우선은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등 더 국제적인 페스티벌로 변모를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올해 앙굴렘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탐색의 시기였다고 본다.
그것은 한국의 만화인으로서 나에게도 동일한 부담감을 주는 것이다. 애초에 가장 큰 목표 는 판매보다 유럽권에 우리 만화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물론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연계를 모색하자는 요청들이 이어졌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작품으로 언급되지는 못했다. 이는 불어나 영어 번역본을 준비하지 못한 출판사의 잘못에서도 기인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영화나 다른 매체에 비해 소자본으로 운영되는 출판산업의 현실상 어느 정도의 정부의 지원을 기대해 보기도 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유럽의 대안만화는 새로운 땅을 찾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작년의 한국만화특별전 등으로 인해 환기가 되어 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준비와 기획이 필요하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색깔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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