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만화 '책'이 갖는 의미
한기호 2020.05.19



만화'책'이 갖는 의미

<짐승의 시간>, 만화책이 갖는 의미를 생각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작품

웹툰은 담지 못하는 만화책의 무게

하얀 백지와 검은 먹지가 주는 고전적 황홀감


한기호 만화평론가



△ 박건웅 작가 <짐승의 시간>


가녀린 몸으로 거대한 폭력 앞에 맞섰던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박건웅 작가의 <짐승의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 순간을 힘겹게 살아낸 고(故) 김근태 님의 실화를 토대로 그린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공안기관에 붙잡혀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고문을 받았던 그분의 이야기를 사실감 넘치게 그린 수작입니다. 우리와 동시대 현대사에서 거대한 권력이 나약한 시민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 세밀하게 확인하는 참된 역사 교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만화에는 고문이 자행되는 장면 이후 두 페이지를 먹으로 까맣게 칠해버린 화면이 등장합니다. 작가는 차마 고문 장면을 더 이상 상세히 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문으로 인해 화자의 의식이 까맣게 꺼져버린 순간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순간과 먹칠해버린 작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페이지입니다. 또한 작중 화자인 주인공이 고문을 회상하는 장면 이후 두 페이지 역시 그냥 백지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만화 칸도 페이지 숫자도 없는 백지가 시선을 온통 사로잡아 그 한 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 <짐승의 시간> 중 한 장면



먹칠한 페이지와 흰 여백뿐인 페이지. 이 두 장면을 제가 본 만화 중 최고의 컷으로 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시커멓게 먹칠이 된 화면과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남겨둔 흰 여백을 보며 독자들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개인이 겪은 끔찍한 수난과 그것을 넘어선 시대의 통증, 암울했던 시대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그에 대한 독자들의 부끄러움, 그 속에서도 빛나는 순수한 저항정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할 때 뒤따르는 무력감,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산화한 수많은 이들의 또 다른 고통과 희생, 현 시대에도 다양하게 변주되며 반복하는 모순 상황에 대한 현대 시민사회의 성찰 등등.

과연 작가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여백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던 순간에 독자인 제가 경험한 충격은 지금까지도 짙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먹칠한 페이지와 여백만 남겨둔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었던 당시의 무거운 마음은 지금도 역시 동일한 무게로 가슴 저 아래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만화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작품이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 검은색과 흰색의 화면에서 받은 무게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먹칠한 화면이 던져주는 먹먹한 충격, 여백만 남은 백지가 망막을 넘어 가슴 밑바닥까지 전하는 아찔한 공감. 그 장면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뜨겁고 묵직했던 기운. 그것은 휴대폰 액정화면이나 컴퓨터 모니터의 빛에서는 도저히 만질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그 책장 한 장을 넘길 때의 묵직한 느낌은 화면을 터치하거나 마우스 휠을 긁어내리는 순간에는 도저히 접속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기계적 작동을 통해서 시각으로 접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손으로 한 장씩 넘기며 호흡에 따라 서서히 빠져드는 이 원시적 중독성은 오직 만화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지극히 고전적인 황홀감입니다.


과학문명 세계라는 초고속 열차에 탑승하고서도 인문학적 통찰의 풍경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까지 떠안은 현대인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합니다. 미래사회의 과제가 거대한 폭력처럼 밀려오는 순간에도 순수한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현대인들의 의지는 촛불처럼 연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백지 한 장을 넘기려고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그 순간이 곧 인간성 회복의 거룩한 제의가 시작되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면 속 웹툰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오직 만화 ‘책’으로만 느낄 수 있는, 백지 한 장 차이의 이 경건한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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