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순정만화를 둘러싼 여성 서사 논쟁
조경숙 2020.07.02



순정만화를 둘러싼 여성 서사 논쟁


8-90년대 순정만화는 여성서사 인가?

왜 지금 순정만화를 여성서사라고 지칭해야 하는가?

논쟁은 모호하게 소비되던 여성서사의 의미를 구체화 하는 계기로 작용

 

조경숙

 

 

2020년 3월 10일, 갑작스럽게 '순정만화'라는 단어가 트위터에서 한국 트렌드 키워드 1위에 랭크됐다. 3위를 뒤따른 건 '여성서사'다. 이 시기 트위터에서는 순정만화와 여성서사와의 관계를 두고 폭발적으로 논쟁이 일어났다. 주된 논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8-90년대 르네상스를 누렸던 순정만화를 여성서사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순정만화를 여성서사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지금 순정만화를 여성서사라고 지칭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논점은 순정만화에 여성서사가 있든 없든, 지금 왜 90년대의 역사를 끌어와 여성서사라고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불거졌다. 이는 '순정만화를 여성서사라 할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 자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라 볼 수 있다.

 



△ <복학생 정순이>, <정년이>


이 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의에서 사용되는 '순정만화'는 8-90년대 순정만화 르네상스 시기 <파티>, <화이트>, <이슈> 등 순정만화잡지 또는 여성만화잡지를 통해 월간 연재되었던 작품군에 한정된다. 현재에도 네이버웹툰 등에서 '순정' 장르 구분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본 논의의 '순정만화'에서 제외된다. 이 논의의 또 다른 주요 키워드인 '여성서사'는 기본적으로 캐릭터, 연출, 서사 등 작품 내적인 측면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작품군을 뜻한다. 본 의미에 착안하여 여성서사 작품들을 소개하던 '여성서사 홍보봇'에서는 웹툰 가운데 <정년이>, <비혼주의자 마리아>, <복학생 정순이>, <여주실격> 등을 여성서사 웹툰으로 언급했다. 네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물리적으로 싸움을 잘하거나(<복학생 정순이>) 모난 성격에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여주실격>) 성차별적 세계관과 대항하여 맞서는(<정년이>, <비혼주의자 마리아>) 등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차별적 요소를 깨고 독특한 일면을 보이며 각 에피소드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 <여주 실격>, <비혼주의자 마리아>


그러나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인 역할을 지녔다거나 성차별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냈다고해서 모든 작품이 ‘여성서사'로 소비되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 트위터에서 언급되는 여성서사 작품군은 이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기보다, 2015년 이후 한국에서 '리부트'된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페미니스트들의 공동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으로서 소비되는 측면이 강하다. 초창기 '페미니즘 웹툰'으로 불렸던 <혼자를 기르는 법>이 당시 트위터에서 유행하던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해시태그 운동을 반영하듯 여자 혼자 사는 공간에서의 불안과 두려움 등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고, '여성서사' 작품으로 손꼽히는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가 탈코르셋 운동이 퍼져나가던 시기 연재를 시작했던 것처럼, 트위터의 '여성서사'는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작품의 배경이 현대가 아니라 시대극이나 판타지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서 재현하는 캐릭터나 서사가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이 다루는 주요 이슈들과 일맥상통한 경우에는 ‘여성서사' 작품으로 지칭된다.



△ <혼자를 기르는 법>


이 때문에 일각에서 '과거 순정만화에서도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여성서사 작품이 있다'며 반기를 들었을 때, 그 작품의 진가를 서로 발굴하고 공유하기보다 '과거 작품을 왜 여성서사라고 하는 것이냐'며 즉각적인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일면 세대 갈등의 형태로까지 번져, 순정만화를 여성서사에 편입시키려는 건 나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꼰대질'로 언급되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순정만화라는 장르의 뿌리 자체가 여혐이라거나 꽃 배경에 남성 주인공 없으면 진전 안되는 서사' 등의 트윗으로 과거 순정만화 작품군에 대한 비하와 비아냥이 쏟아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논쟁에서 양 진영은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지만, 꼭 이 논쟁이 상처만을 남겼다고 볼 순 없다. 이 논쟁 덕택에 순정만화의 열렬한 독자들은 각자 추억 속에만 남겨놓았던 주옥같은 작품 목록을 타래에 쏟아냈고, '순정만화 없는 여성서사' 옹호자들에게는 그간 다소 모호하게 소비되던 '여성서사'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 논쟁에 이만여 건에 달하는 트윗이 쏟아진 만큼, 각각의 국면에서 흥미로운 문제 제기들도 많다. 이 논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womwiki 의 "2020년 3월 순정만화와 여성서사 플로우" 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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