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여명기, 두 가지의 제약이 만든 보다 제약 없는 세상
민선 2020.11.02



여명기
주인공이 여성이며, 로맨스 장르가 아닌 만화를 담은 문집
우리의 새로운 여명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 가지의 제약이 만든, 보다 제약 없는 세상

2020년 2월. 여명기가 텀블벅에 등장하였다. 본래 여명기黎明基란 단어는 새로운 시대 혹은 새로운 문화 운동이 시작되는 시기를 일컫는다. 그러나 텀블벅에 등장한 만화 여명기女命記는 조금 다른 의미를 내걸고 있었다. 주인공이 여성이며, 로맨스 장르가 아닌 만화를 담은 문집. 만화 여명기는 12인의 여성 만화가들이 모여 만든 프로젝트팀 총명기의 야심을 담은 책이다. 텀블벅 후원 결과 목표 금액을 4756%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여명기라는 제목으로 책이 정식 발간되었다.

무엇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동안 여성이 주인공이면서, 로맨스 장르가 아닌 만화는 시도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만화가들은 말한다. 책을 만드는 자본과 그 자본을 굴리는 권력은 여전히 이전 세계관에 머물기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계 곳곳에서 기존 세계관의 문제를 지적하며 그를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만화계에도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여명기는 독자에게 그리고 세상에 당당히 던지는 새로운 움직임이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자유롭게 감상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함 없이 감상할 수 있음. 그 이상

작품의 주인공들이 여성이므로 또 사랑에 의한 구원이나 극복만을 기대하는 인물들이 아닐 것이므로 그간 여러 작품에서 느껴온 불편함을 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책을 펼쳤다. 인물들이 스토리 전개를 위해 희생되거나 한없이 순종적일 때 답답하고 불편한 감정이 드는데 적어도 이 책은 그런 불편함은 없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불편할 요소들만 걷어냈을 뿐인데 12편의 여성 서사를 읽어나가며 기대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간의 만화들은 단순 불편하고 답답한 감정만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곡된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그로 인해 현실이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여명기를 통해 독자들은 이전의 세계관에 갇혀있지 않을 수 있고,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기회 또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플랑크톤의 귀향-AJS
평범한 이야기이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의 주인공과 비슷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 만화는 너무 평범해서 다른 만화들보다 독특하게 느껴진다. 자신에게 닥친 크고 작은 사건들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무던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며 멀리 있지만 높지는 않은 꿈을 꾼다. 이 인물이 독특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주인공에게 세 명의 남동생이 있다는 점이다. 대개 많은 만화에서 집을 뛰쳐나온 k-장녀의 꿈은 웅장하고 대차다. 남동생들을 건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화의 주인공은 그런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 – 하토
"요즘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던 지금까지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데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또 불안정한데도. 비로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괜찮다." 우리는 가끔 아무 잘못도 없이 꽁꽁 엉켜있는 실타래 속에 얽히게 된다.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든 사회에서의 관계에서든 말이다. 그런 실타래 속에 함께 얽혀 있다가 어느 순간 고요한 어둠 속에 홀로 빠진다면 두려워 눈물이 날까? 작가는 불안정하여도 막막하여도, 엉키고 꼬인 실타래보다 깜깜한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괜찮다고 말한다. 만화를 읽으며 우리는 어쩌면 고요한 어둠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엉킨 줄을 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곳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을 위하여-뻥
모든 것을 기록으로 저장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다. 기계와 비기계 인간 유형으로 사람들을 구분 짓는 세상에서 슈퍼 컴퓨터가 기록이 아닌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다. 슈퍼 컴퓨터가 갑자기 감정을 느끼게 되고 사랑에 빠져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12인의 제작자가 슈퍼컴퓨터를 만들며 길고 볼품없는 이름을 지어줬더라도 1명의 비기계 인간이 제멋대로 지은 똥강아지라는 이름이 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여명기도 많은 이들에게 그런 비슷한 의미를 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함께 나아간다
여명기를 펴내는 일에 있어 걸린 제약이 누군가에겐 막막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더없이 자유로운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여성일 것, 로맨스물이 아닐 것. 12편의 만화는 이런 제약을 바탕으로 시작하였고 모두 다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를 풀고 있다. 어떤 만화는 k-장녀의 현실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한편 어떤 만화는 성별이 지워진 느낌을 줬다. 만화를 읽으며 공감을 많이 할 수 있었고, 인물의 성별이 지워지며 내 안에서 한 청년의 이야기였다가 자연스럽게 인간의 이야기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 가지 공통된 목표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왜곡된 세계관을 깨뜨리는 것. 텀블벅으로 여명기를 출판한 것부터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고자 하였고, 그로인해 여명기와 같은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만화 장르 특유의 친근함으로 깨어준다는 생각이 들어 의미있다. 즉, 여명기가 시도한 새로운 방식의 만화 제작은 단순히 그 행위가 있었다는 것에서만 의미가 생기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넓게 만들어준다는 것에서 뜻깊어지는 것이다. 여명기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이 앞으로도 꾸준히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12인의 여성 만화가들이 외치는 말처럼 모두가 함께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지켜보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면 바람직한 만화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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