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일상적 욕망의 실현으로서 판타지 만화
김채린 2002.04.01

<심리 테스트> 만약 신이 당신에게 한 가지의 초능력을 주겠다고 한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① 염력 - 물건을 생각만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
② 예지력 -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
③ 축지 - 먼 거리를 한 걸음으로 옮길 수 있는 순간 이동의 능력
④ 투시 -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숨겨 놓은 물건을 읽을 수 있는 능력
⑤ 비상력 -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



종종 누군가의 심리 상태를 알기 위해, 혹은 자신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궁금해하며 읽곤 하는 심리테스트는 결국 결론 가까이에 도달하게 되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심심풀이용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심리 테스트가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꽤 적절한 객관성을 띄고 있어 프로이트 식의 전의식이나 무의식을 끌어 올려 해석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실제 임상에서도 <심리테스트>라는 명칭을 달지 않았을 뿐, 다른 검사 방법들과 병행으로, 혹은 그것 안에 포함되어 왕왕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심리테스트는 과연 객관적인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한 이들의 심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한 것은 위의 심리테스트 결과뿐이 아니다. 가만히 보니 선택지에 등장하는 초능력 모두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물의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판타지의 기본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 혹은 일어나기 힘든 일을 그린 것이라고 할 때 이런 초능력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초능력인 것일까?

그럼 먼저 심리테스트의 결과부터 알아보자. ① 염력을 선택한 사람은 집중력이 약한 사람의 경우가 많다. 일단 염력에 대한 선입견은 높은 정신 상태, 고도로 집중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집중력이 다소 떨어지거나 고도의 정신 활동에 대한 갈구가 있는 상태인 경우가 많다. ② 예지력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에 대한 앎의 욕구가 강한 경우이다. 대계의 경우 경제적 불안감이나 욕구가 강할 때 이러한 능력을 꿈꾸게 된다. ③ 축지는 신체적 피로감을 많이 느끼거나, 그 한계에 대해 절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체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말해주고 있다. ④ 투시는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은 경우에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싶은 욕구는 결국 원활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극복의 바람이 투사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⑤ 비상력과 같은 경우는 성적인 욕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경우일 때가 많다. 흔히 심리적 불안감을 많이 느낀다는 사춘기 시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꾸는 것은 기묘하게도 성적인 엑스터시의 감흥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들이 많다. 이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성적인 욕구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전혀 다른 욕구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곧 판타지물 역시 이러한 욕구를 심리적으로는 간접적으로, 표현적으로는 직접적으로 실현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독자가 동일시하고 있는 주인공은 다른 인간들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거대한 우주적인 힘이 점지한 경우가 많다. 이는 삐아제가 말하는 청소년기의 대표적 특성인 spotlight on the stage라고 하는 자아 정체성 확립기의 주목받고 싶은 욕구와 내적 욕망의 표현을 대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투사는 문학을 비롯한 영화, 만화 등의 장르와 결합하면서 그 필연성, 혹은 개연성을 얻기 위해 갖가지 변환을 일으키는데 판타지의 대표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의 분리가 그것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물은 욕망을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세계를 설정한다. 대계 현실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주인공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이세계(異世界)로 이행하거나 자신이 이세계로부터 온 존재인 경우들이 많다. 물론 이것이 판타지의 전부는 아니다. 이세계로부터 온 어떤 능력자를 만나 자신의 욕구를 대행하게 하는 경우들도 있고 이세계와 현실 세계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경우들도 있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직접적인 욕망의 실현이 타 장르에 비해 용이한 만화의 장르적 특성상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작품들도 많이 발견할 수있다.

그 중에서도 일상적 욕망에 대한 해소를 대현(代現)해 주고 있는 것은 이세계에서 펼쳐지는 만화보다 아무래도 이세계와 현세계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직접 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 쪽이 훨씬 더 직접적일 수 있다. 최근 다시 발행된 신문수의 <도깨비감투>는 한국 전통의 판타지를 현대로 끌어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도깨비감투를 쓰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민담이 신문수의 만화에 와서는 주변의 시선, 관습, 부모님과 선생님의 제약 등에 자유롭고 싶은 심리에 대한 해소감을 맛 볼 수 있게 해 준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같은 경우 이세계(과거의 공룡시대)에서 온 둘리는 주인공과 동일시 된 독자들의 욕구를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만한 또래라면 겪을만한 사건 속에서 둘리는 기성세대에 암묵적으로 대항하고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가질 수 없는 능력 등을 발휘함으로써 둘리와 같은 편에 서 있는 아이들(독자)이 세상과 분리된 독특한 자아 공간 획득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김동화의 <요정 핑크>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온 핑크가 현 세계에서 이빈, 그리고 같은 이 세계의 왕자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중 성인 여성으로 변신을 한다는 것은 아동들의 막연한 성적 환상, 혹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어른으로서의 권한과 능력 확장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변신소녀 판타지는 일본 만화로 갈수록 그 함의와 욕구 실현에 대한 갈망이 더욱 강해진다. 핑크가 성인 여성으로 변신하는 반면 밍키나 세일러 문 등의 주인공 아이들은 변신을 통해 능력은 급성장되지만 완벽한 성인 여성으로의 변신이 아니라 성적으로만 거의 성숙된 십대 후반의 소녀들로 변신한다. 이것은 일본 문화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묘한 소녀지향문화와 일맥 상통하고 있기 때문인데, 문화와 사회에 따라 다른 욕망, 다른 실현 방법으로 다른 판타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욕망을 대현 한다고 해서 욕망의 주체자만 변화하라는 법은 없다. 야마다 난뻬이의 <홍차왕자>의 경우 보름달이 뜬 날 홍차잔 안에 완벽하게 들어간 달을 보며 주문을 외우면 소원을 들어주는 ‘홍차왕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주인공인 소녀들의 소원을 들어줄 뿐만 아니라 손바닥만한 요정에서 크토닉 남성으로 변화한다든가, 사랑의 대상, 혹은 성적 대상으로 가능한 또래의 남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남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만화도 많다. 카츠라 마사카쯔의 <비디오 걸>과 후지시마 고스케의 <오 나의 여신님>이 그런 경우다. 욕망의 주체가 남성인 경우, 여성의 경우보다 묘사나 암시가 비교적 그 욕망에 직접적이고 솔직하다. <비디오 걸>과 <오 나의 여신님> 모두 자신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남성들을 돌보아주는 완벽한 후원자의 역할로 성적 만족감과 동시에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로서의 여성에 대한 갈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작품은 없을까? 물론 있다. 가와하라 유미코의 <나만의 천사>는 마츠스리 아키노의 <펫 샵 오브 호러스>와 꽤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그 내부를 살펴보면 여성을 소유하고 보호하고 싶은 남성의 욕망, 그리고 완벽하고 신비스러운 외모?분위기를 갖고 싶어하는 열망과 동시에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하는 여성의 욕망이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사고체계 안에서 잘 버무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90년대 이후 일었던 판타지의 홍수는 결국 서구의 신화적 상상력과 중세 마술적 상상력에 대한 어설프고 한정된 자료로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트랜드에 맞춰 배설하는 차원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신화와 마술적 상상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만드는 신일숙의 리니지나,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것을 플롯으로 연결하는데 탁월한 황미나의 레드문 등과 같이 시?공간적으로 현세계가 아닌 공간의 만화가 그야말로 ‘감’이 되는 작품들도 있지만 그만그만한 소재에 별다를 것 없는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은 문학과 만화를 막론하고 그야말로 식상하기 짝이 없는 게 사실이다.
판타지의 근본은 물론 이성적, 합리주의의 모더니티를 뛰어넘어 신화적, 종교적, 마술적 사고에 지배를 받는 시대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어떤 변형, 치환, 투사 등의 방어기제를 덜 통과한 직접적인 욕망의 실현에 대한 욕구가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만화에 있어서 판타지는 트랜드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무의식적 욕망, 그 자체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어도 그것에 대한 표출은 결코 일시적일 수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만화가 어떤 환상을 상대적으로 아주 손쉽게 표현할 수 있다는 강점이 만화 전체에 판타지적 성향을 주사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라는 장르에 무슨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공식에 끼워 맞추면 판타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 욕망의 시대를 관통하는 예리한 눈이 있어야 판타지 만화가 판타지다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가슴 한가운데를 쿡 찔러주는 카타르시스가 뻔하디 뻔한 공간이동보다 더 간절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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