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환타지 만화의 흥망성쇠
박무직 2002.04.01

환타지 만화의 흥망성쇠 -박무직 한시대의 영광이 저물면 비로서 다음 시대의 영광이 지상에 도래하게 된다. 포유류는 공룡이 지배하는 모든 시대에 작고 비참한 존재로만 생존했지만 공룡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남아있는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었다. 공룡시대의 포유류와 포유류시대의 포유류는 위용도 크기도 다르다.

50년대, 60년대 만화의 공룡은 명실공히 ‘SF였다. ’철완 아톰‘도 ’바벨 2세‘도 ’라이파이‘도 SF이다. 이 장르는 ’공상과학‘이라고 불리며 황당하다고 멸시받기도 했지만 ’어린이에게 꿈을 주고‘,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다는 찬사도 받았다. 실제로 일본에서 공학과 로봇기술을 발전시킨 과학자들은 ’아톰‘에게 헌사를 바쳤고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헌사를 바쳤다. 그러나 인류가 달과 화성, 우주에 대한 관심을 서서히 잃어가게 될 무렵 SF역시 지상을 떠나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주개발에 대한 퇴가 SF가 주류에서 벗어난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실이란 보다 복잡한 요인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여간 SF는 주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환타지가 그 뒤를 이어 만화의 지배자가 되었다.

환타지의 성장배경에는 ‘RPG라 불리는 ’환타지게임‘이 있을 것이다. 환타지게임의 발전과 환타지 만화의 발전을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다. 최근 한국만화의 장르환타지 부활의 움직임에는 명백히 ’리니지‘나 ’라그나로크‘, ’바람의 나라‘와 같은 환타지 만화원작의 환타지 게임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환타지의 근본적인 원류의 힘이 존재하고 있다. 그 원류는 환타지의 근본인 환타지 소설들이다.

여기서 오해의 여지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겠다. 모든 발전단계의 장르가 그러하듯이 환타지에 대한 규정은 제각각이고 혼용되고 때로는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이는 ‘환타지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환타지라는 것이다. 포르노는 성의 환타지, 경파물은 (남자)청소년 환타지, 요리만화는 식욕의 환타지라는 식이다. 여기서 환타지는 욕구와 관련된 넓은 영역의 상상과 상상을 통한 충족을 의미하는 듯 하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과연 환타지는 태고적부터 쇠한적이 없을 것이다. 환타지는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포르노를 이야기하기 위해 환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분류기준은 예외로 하는 것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성적 환타지로서의 포르노그래피’에 대해서 한국사회나 한국만화계가 그 가치나 필요성을 재조명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문학장르로서 환타지는 우리가 흔히 ‘환타지’라고 불리는것보다 포괄적으로 환타지를 규정한다. 환타지란 서로가 ‘실현불가능한 허구’임을 인정한 문학적 창작물이다. 문학적 리얼리티의 기본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을 생각할 때 환타지란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심지어 ‘SF의 기본이 ’과학적으로 미래 혹은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일‘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규정하에서 환타지는 매혹적이고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이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장르에 속한다. 많은 만화가 이런 환타지(환타지 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다)에 속하지만 불행히도 어떤 장르적 정체성을 고려한 작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이에 대한 책임은 ‘환타지’라는 명칭을 거의 독식한 ‘환타지(장르 환타지)’가 상당량 져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환타지에 대한 지나치게 강력한 선입견은 작가들이 이런 환타지(환타지 문학)의 장르적 정립과 발전, 규정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난 환타지(환타지 문학)들이 많이 창조되고 있다. ‘가면속의 수수께끼’같은 작품은 이 장르의 뛰어난 성과물이다. 또 강한 선입견 속에서도 환타지의 하위장르인 공포물은 꽤 (장르적으로)정립되고 창작되어지고 있다. 다만 공포물들을 환타지로 규정하고 조명하는 작업은 미흡해보인다.

‘장르 환타지’는 우리가 보통 ‘환타지’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며 보통 환타지를 말하면 이 장르환타지를 말한다. 장르 환타지는 정립된 환타지다. 이 환타지는 캐릭터, 스타일, 컨벤션, 스트럭쳐가 거의 정립되어 있고 묘사도 거의 정립되어 사용된다. 미모에 뾰족귀를 가진 여자를 앨프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독자나 작가가 있을까? 뭣보다 이 분야에서 가장 잘 정립된 것은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세계관이야말로 장르환타지의 특징이자 성공비결이다.

장르 환타지는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마술과 용, 인간과 각종 생명체들은 틀이 잡혀있다. 이 틀안에서 장르환타지의 작가들은 철저하며 ‘이 세계관 안에서의 실현가능성’은 장르환타지를 거대한 가상현실로 만든다. 세계관은 장르환타지 세계의 우주법칙이다. 이 ‘실현가능성’은 환타지문학의 실현불가능성과 묘하게 비교된다. 장르 환타지는 ‘바스타드’나 ‘로도스도전기’같은 명작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하지만 어느덧 장르환타지는 많은 공격(주로 만화가들을 통해)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작가들이 장르환타지가 지나치게 상상력을 제한하고 뻔하다고 비난하며 새로운 세계의 창작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유렵외의 신화에 눈을 돌렸고 어떤 이들은 환타지문학에 눈을 돌렸다. 유시진의 ‘신명기’같은 작품들은 이런 계통(기존 환타지에 대한 반감)의 뛰어난 성과물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이유는 단순하다. 장르환타지는 막강한 ‘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되고 잘 정리된 세계관이라는 빽이다. 이 세계관은 이 세계관을 반복적으로 섭취하고 체계적으로 공부까지 한 이들에게 ‘진정한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논리와 체계가 거기 존재한다. 기존의 장르환타지를 비난한 이들 대다수가 만든 환타지들은 세계관의 중요성과 힘, 무엇보다 ‘새로운 논리와 체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장르환타지가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주장한 이들의 작품이 빈곤한 상상력을 드러낸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런 측면에서 두가지 가치있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장르환타지가 최근 게임과 영화의 부흥에 힘입은바도 있어 계속 성공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그나로크’나 ‘베르세르크’는 장르환타지가 빈곤한 상상력의 장이 아니라 위대한 상상력의 토양임을 증명하고 있다. 편견은 없어질 것이다. 장르 환타지는 더더욱 방대해지고 있다. 이 가상세계의 미개척지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다른 성과는 새로운 환타지들의 성공이다. 특히 시로우 마사무네의 ‘선술초공각 오리온’은 놀랍고도 정교한 세계관으로 전율어린 가상세계를 선보여주었다. 나는 이 작품이 환타지의 빛나는 성과물이라고 생각한다. 포인트는 ‘세계관’인 것이다. 독창적이면서도 그 안에서 논리와 체계가 선 세계관을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새로운 장르환타지들이 태어날 수 있을것이며 장르환타지를 거부하고 길을 떠난 개척자들이 금광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우리들이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환타지도 만화의 금자탑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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