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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만화를 보고나서 온전한 삶을 시작했다.
박성식 2006.09.01


내 만화보기의 이력은 1970년대부터 시작한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극장에서 ‘로봇 태권 V가 개봉했었는데, 이 만화영화와 <소년 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등의 잡지, 그리고 만화가게가 만화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세대들은 우리나라 만화세대의 2세대쯤이 될 듯싶다.
나 역시 ‘로봇 태권 V 시리즈에 열광했고, 만화 보는 재미에 <소년 중앙>을 빼놓지 않고 읽던 아이였다. 우리 부모님은 만화에 관대했다는 점에서 당시 부모님들에 비해 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셨다. 성적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소년 중앙>을 매 달 사주셨고, 특별히 성적이 좋거나 세뱃돈 같은 공돈이 생기면 ’로봇 태권V가 연재되던 <새소년>을 한 권 더 사보는 것도 눈감아 주셨다. 심지어 어머니께서는 <소년 중앙>의 별책부록으로 연재되던 만화들을 작품별로 철을 해주시고 두고두고 다시 보게도 해주셨다. 요즘이야 만화잡지에 연재된 작품이 단행본으로 엮여 출간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에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만화책 철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만점의 1970년대 판 만화단행본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당시의 만화들 가운데에서도 내가 최고로 꼽는 작품들은 길창덕 선생님의 ‘꺼벙이’, 박수동 선생님의 ‘번데기 야구단’, 방학기 선생님의 ‘타임머신’, 김형배 선생님의 ‘로봇 태권 V, ‘황금날개 1, 2, 3’, 그리고 정확한 제목은 가물가물하지만, ‘까목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이었던 이두호 선생님의 스포츠만화들과 ‘독고탁’의 활약을 그린 이상무 선생님의 만화들이다.
학교성적에 집착하지 않고 엉뚱하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일상 곳곳을 ‘유랑’하며 풋풋한 웃음을 전해주던 ‘꺼벙이’는 내가 닮고 싶은 캐릭터 1위였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는 공부만큼 중요한 가치들이 숨어있고 어쩌면 그것들이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다원화된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은 문화콘텐츠 기획자의 첫 번째 덕목이라면 나는 그것을 ‘꺼벙이’를 통해 진작부터 배우고 있던 것이다.

‘번데기 야구단’의 기발한 발상은 늘 내 배꼽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님의 “센레라~ 센레라~”라는 계시를 받고 센터, 레프트, 라이트를 순서대로 넘기는 3연타석 홈런을 쳐낸다든지, 한여름의 시합 더위에 지친 아이들이 글러브 속에 참외와 사과 등을 감춰 오물오물 먹으며 수비를 하다 공 대신 먹다 남은 참외를 1루로 던져 아웃시켜야할 상대 타자를 살려준다든지 하는 장면들에서는 데굴데굴 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번데기 야구단’의 승부는 늘 그런 것이었다. 필승에 대한 강박감 없이 천진난만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를 즐기는 모습은,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에 지칠 때마다 다시 들춰보고 다운 쉬프트(down shift)할 수 있는 긴 호흡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타임머신’의 휴머니티와 치밀한 과학적 고증은 내가 아직까지도 이 만화를 SF만화의 최고봉으로 꼽는 까닭이다. 폐기되기 직전의 생각하는 고물 로봇은, 마징가 Z나 태권 V 같은 거대로봇만 떠올리던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압도적인 슈퍼 파워 대신 인간처럼 고민하고 약하며 갈등하는 로봇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사회의 약자들을 생각하던 나의 대학생 시절이나 기획자로서 새로운 캐릭터를 고민하게 될 무렵이 되고서도 새록새록 되새김하게 되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나의 만화보기는 수험생활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려고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을 ‘땡땡이’ 치고 ‘숨어’ 들어간 만화가게에서 새로운 차원을 만난다.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맨’. 나는 아직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빛나는 대사들을 잊지 못한다. “내가 내 희망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니까 장래 희망 같은 거 가질 의무가 없는 거야.", "가장 상투적인 것이 가장 확실한 거지.” 등의 대사는 단지 멋들어진 수사법으로서만 내 가슴을 후벼 판 것은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그것에서 비롯된 삶에 대한 과장된 오만함으로 위태롭던 열 몇 살 청소년 시절의 감수성이 가져야 할 색깔과 걸어가야 할 방향을 짚어준 큰 울림이었다. 그것은 그 비슷한 무렵 읽고 공감했던 ‘데미안’이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준 울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고전은 고전 나름대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내 일상의 감성에 호소하는 ‘고독한기타맨’의 목소리의 호소력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미 핸드릭스의 경지를 뛰어넘은 강토가 공연 도중 감전되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무대의 장면에서, 내 청춘의 미래는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은 아닐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의 경우, 만화를 보고나서 온전한 삶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화를 보는 까닭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휴일 오후 느긋한 시간을 만화와 함께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보내는 여유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연기를 스스로 펼쳐가며 빠져들 수 있는 만화의 매력 때문에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성우들의 늘 그저 그런 연기를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나서 그 원작이 만화인 것을 알게 되어 새삼스레 만화의 세계에 빠져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좋겠다. 만화의 재미와 감동이 우리 일상에 작은 전환점이 되는 가치와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같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 장르들과 동등하다. 내게 왜 만화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빵보다 밥이 좋은 이유와 같다고 대답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만화의 재미와 감동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제대로 만화를 만나보기도 전에 신뢰할 만 하지 않다고 오해하고 편견 갖는 사람들이다. 만화를 “아이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으로 낙인찍고 교육적인 기준으로만 재단해 온 우리 사회의 오랜 통념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하지만 허상은 허상일 뿐이다. 실상을 보게 되면 허상은 금세 무너져버리게 마련이다.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만화의 실상을 접할 수 있도록 만화의 진정한 재미와 감동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이 모이기를 바란다. 이것은 만화작가들이나 관계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만화의 진정한 감상자들의 몫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만화의 진정한 감상자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화를 전파하기 위해 모이고 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만화 동호회들과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대한민국 독자 만화대상이 그것이다. 만화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스스로 만화를 위한 행위를 깨닫고 실행하게 된다.
유럽 사람은 자신이 발견해 낸 좋은 만화들로 채워놓고 가까운 벗들이나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제일 먼저 구경시켜주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들 한다. 참으로 부러운 문화이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나 집단적인 캠페인으로 만들어진 문화가 아니다. 스스로 발견한 만화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문화를 형성시킨 것일 게다. 만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이것이 우리 만화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진정한 대안이 되지 않을까.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만화보기 좋은 계절이다. 만화와의 사랑에 빠지기에도 제격인 계절이다. 만화를 만나는 일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자. 친구들, 가족들, 연인과 동료들까지. 만화작가분들께는 진실로 죄송스런 일이지만, 만화를 만나는 데에는 정말 저렴한 비용이면 충분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아내에게 한 편의 만화를 선물하는 것으로 결혼 후 첫 추석연휴의 명절 스트레스를 달래줄 참이다.

* 나는 개인적으로 만화를 ‘읽는다’라고 표현하기보단 ‘본다’라고 표현한다. 단지 글로만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라 글과 그림이 결합하여 감상하는 이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하는 만화이기에 ‘읽는다’ 라고 해버리면 왠지 만화 감상의 진짜배기 맛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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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정보 vol. 31 _ 2006 9/10]
글_박성식(문화콘텐츠 기획자, 상명대학교 만화영상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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