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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게 말걸기]만화계 새로운 물결 : 무크지
김병수 2006.07.01

만화계 새로운 물결 : 무크지


탈출구 없이 몰락의 길로만 가는 출판만화 잡지 시장에 최근 새로운 싹이 트고 있다. 바로 무크지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십시일反], [사이시옷] 등의 인권만화 시리즈, 새 만화책의 [새 만화책], 여성만화가협회에서 내 놓은 [세나클], 거북이 북스의 [BOB], 마노의 [국제강한 연구소] 등 바야흐로 신종 만화 무크지가 폐허가 된 만화잡지계에 새로운 희망으로 자라고 있다.
[십시일反]은 단 권으로 기획되었던 것이 시장의 놀라운 반응을 등에 업고 2권 [사이시옷]이 나온 보기 드문 사례다. 단행본으로 태어나 스스로 무크지로 진화해간 것이다. 기획편집자의 말을 빌리면 사정이 이렇다.
‘2003년 인권만화 [십시일反]을 펴 낸 후 독자들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광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언론에서 눈에 띄게 다뤄 준 것도 아니었는데 책은 낮고 마른 땅으로 물이 흘러가듯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말하자면 입소문 덕이었다.’ 좋은 책은 결국 독자가 키워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십시일反]에 참여했던 박재동 화백은 “만화계도 불황 탓만 하지 말고 잡지에 비해 월등히 부담이 적은 기획물 형태의 무크지를 지속적으로 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십시일反], [사이시옷]이 단행본 출신이라면 출판사 새만화책에서 만드는 [새만화책]은 탄탄한 기획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작가까지 망라한 대안만화잡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새만화책]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여러 차례 시도되었던 언더만화, 작가주의 만화잡지의 계보를 잇고 있다. [모던 코믹스 봄]으로부터 시작하여 [히스테리], [코믹스], [화끈] 등으로 발전했던 언더만화와 작가주의 대중지로 8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광장]보다 훨씬 세련됐으며 엄격하다.
책에 실린 쯔게 요시하루, 다쓰미 요시히로, 하나와 가즈이치 등 일본 대안만화의 교주와도 같은 작가들과 뤼도빅 드뵈름, 새미 하캄, 톰 골드 등 서구 대안만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새만화책]의 치열한 정신이 느껴진다. 뿐만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대안만화평론가 아사카와 미쓰히로는 순전히 [새만화책]만을 위해 일본 극화의 역사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해외의 글쟁이가 국내 만화잡지에 글을 기고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국내 작가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경석, 김수박, 앙꼬처럼 언더만화 쪽에서는 나름대로 지분을 갖고 있는 작가에서부터 신진 작가까지 검증된 작가들을 골고루 기용하고 있다. 아마추어와 언더그라운드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었던 과거의 언더그라운드 만화잡지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편집장 김대중씨는 “무크지는 아니고 격월간의 틀을 유지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1년에 6권 출간 시스템은 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1월 첫 권을 냈으며 8월초에 세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다.
한국여성만화가협회(이하 여만협)에서 기획하고 길찾기에서 올해 5월 펴낸 [세나클]은 오랜 동면 끝에 다시 살아난 경우다. 1999년 첫 호를 낸 후 장장 7년 만에 새 책이 나왔으니 이만저만한 산고를 겪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전혀 낯설지 않다. 강경옥, 신일숙, 문흥미, 이향우 같은 친근한 작가와 고야성, 하성현, 도짱, 연은미, 백상은 같은 신진 작가들이 어우러져 순정만화의 힘과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협회에서 소속 작가들을 독려해서 만드는 책이면 다소 허술하기 마련인데 [세나클]은 작품의 완성도나 장정 면에서 기존의 무크지들을 훨씬 뛰어 넘는다. 대부분 컬러 원고 중심이며 펜 선 하나 하나 꼼꼼하게 애쓴 점 등을 보면 작가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품게 한다.
함형숙 작가는 편집 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허거걱! 모두 작업실에서 칼만 갈았소이까?! 어찌 원고들이 이리 빛난단 말이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필살기의 결정체였소이다...(이하 생략)”
한가지 아쉬운 것은 참여 작가가 20명을 넘다보니 대부분 초미니 단편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여만협 신경순 이사에 따르면 “세나클은 매년 봄(4~5월)마다 펴낼 계획”이라고 한다.

[세나클]과 비슷한 시기에 거북이 북스에서 나온 무크지 [BOB]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기존의 관습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기획란이 ‘청강대학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로 되어 있다. 대학 만화과에서 직접 무크지를 기획하다니...! 고작 만화졸업작품집을 내는 게 출판의 전부인 만화과에서, 그것도 최호철, 모해규, 윤태호, 박무직, 문흥미, 홍윤표, 장경섭, 석정현, 박순구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아우른 무크지가 나왔다는 것은 ‘사건’이다.

그러나 실제 만든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화끈]의 편집장을 지냈던 디지털 카툰의 선구자 모해규 교수와 최근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만화평론가이자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을 기획했던 박인하 교수가 기획위원으로 있다. 게다가 순정만화잡지계의 살아있는 전설 강인선 편집장이 거북이 북스의 대표이니 최강의 편집진이 아닌가 생각된다. [BOB]은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여타 무크지들처럼 단지 작가들의 작품을 모으는 수준이 아닌 ‘밥’이라 주제를 내걸고 다양한 작가들이 온갖 이야기로 풍성한 ‘밥상’을 한 상 차려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다. ‘셋이 읽다가 죽어도 모를 밥 이야기 열 아홉편’이라는 부제가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직접 책을 구입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전혀 만화 같지 않은 제목의 만화 무크지 [국제 강한 연구소]는 ‘마노’라는 기획 프로젝트 팀에서 만든 작품집이다. ‘마노’는 변병준, 아이완, 이향우, 최인선, 문흥미, 곽상원 등 주류에 있으면서도 주류 냄새가 덜한 만화가들과 조희윤, 김성진 등 2명의 기획자, 고강철 디자이너가 뭉친 프로젝트 조합으로, 실험적인 작품 제작뿐 아니라 만화사업에서의 대안적인 시스템을 모색하고자 하는 모임이다. 작년에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우수기획만화 공모에 당선되어 책이 나왔지만, ‘마노’는 앞으로 본격적인 무크지로서의 행보를 예고하고 있다. 올 8월에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전시회도 계획 중이라고 한다.
기획자 조희윤씨는 “이번 책에서는 작가를 연구원, 작가들이 모여 있는 <프로젝트 마노>를 연구소라고 패러디하였다. 창작은 연구와 다름없이 끊임없는 고민과 실험이 필요한 장르이며, 그 결과물인 작품이 결국 연구소의 보고서와 같이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 호의 컨셉이 기획되었다”고 밝혔다. ‘마노’팀의 성공적인 연착륙은 만화시장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만화무크지(혹은 격월간지)들은 과거, 단지 동인지 성격에 가까웠던 무크지와는 분명히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철저히 ‘상품’으로 기획됐다. 작가들끼리 ‘우리 무크지나 낼까’하는 수준이 아니라 만화출판계 안팎에서 내노라하는 기획자들이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했다는 측면에서 희망을 갖게 한다.
불황이라서 자포자기 하거나 돈 되는 곳으로 몰려 갈 것이 아니라 ‘시장이 없으면 만들어야한다’는 도전의식도 강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것은 무크지 자체가 아니라 무크지를 통해 우리 만화시장의 지평을 넓혀 보려고 고군분투하는 기획자들이다. 작품성면에서는 유럽에 뒤지고, 규모면에서는 일본에 뒤질지 몰라도 기획자들의 열정과 만화에 대한 사랑만큼은 전세계 어디에도 부럽지 않은 자산을 가진 것이 우리 만화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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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정보 vol. 30 _ 2006 7/8]
글_ 김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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