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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세상, 지상강림 (앙굴렘 방문기)
Capcold 2001.03.01

만화로 축제를 한다는 발상,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자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화가 주는 본연적인 즐거움 혹은 감동과 폭넓은 수용가능층을 고려할 때, 만화야말로 축제라는 이벤트 형식에 필연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이템인 것이다. 축제마다 등장하는 여러 만화 캐릭터 혹은 만화체 그림을 응용한 장식들, 인형옷을 뒤집어 쓴 사람들 등, 만화는 축제라는 이미지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만화를 축제의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중심 주제로 삼는다면 어떨까. 오히려 더욱 흥겹고도 꾸리기 쉬운 축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축제행사들은 오히려 만화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다. 다시 말해서, 만화를 중심축으로 축제를 제대로 꾸민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만화가 주는 가벼운 이미지와 역설적으로 더욱 무거워져야 하는 위상에 대한 당위성이 축제라는 형식의 어수선함속에서 잘못 녹아들어갈 때, 그것은 대단한 부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완숙한 행사운영방식과 폭넓은 참여,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만화형식에 대한 애정이다. 현재의 만화축제들 가운데 그러한 형태에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앙굴렘 국제 만화축제가 아닐까 한다.

2001년 1월25일부터 28일까지 프랑스의 소도시 앙굴렘에서 제 28회 앙굴렘 국제만화축제가 개최되었다. 앙굴렘 축제는 매년 1월 마지막 주에 개최되는 유럽 최대의 출판만화 페스티벌이다. 물론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만화는 아직은 유럽만화 중심이고, 그 중에서도 프랑스(자세히 말하자면 프랑스-벨기에권) 만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 짧은 기간동안 이 곳을 찾아오는 수십만의 인파 또한 이에 상응하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에서 ‘아카데미상’과 마찬가지로, 앙굴렘 축제 또한 원칙적으로는 ‘프랑스어권 만화’ 축제인 것이다.

이미 28회째를 맞는 축제 답게, 온 시민들, 준비위원들, 관람객들 모두 이 행사를 어떻게 굴리고 또한 즐기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앙굴렘에 막 도착하는 그 순간, 도로에 걸린 행사 플래카드를 볼 때부터 이미 느껴진다. 거리에 일렬로 걸린 수많은 플래카드들이, 모두 그림이 다른 것이다! 무조건 획일적인 환영 메시지로 온 도시를 도배하는 건조함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 풍경은, 이 행사가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거쳤는지에 대한 첫 시위다. 시내에 들어서면 두 번째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다. 각 상점마다 행사 포스터가 쇼윈도우 안쪽에(!) 붙어 있고, 상점들 마다 만화와 관련된 아이템을 전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과점은 만화캐릭터 얼굴을 형상화한 케이크를 만들어 전시한다든지, 옷가게에서는 옷 사이사이에 멋진 복장의 만화캐릭터 그림들과 만화책을 비치해놓는 식이다(문방구, 서점 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곳곳에서 열리는 토론장과 특별 강의실마다 붐비는 사람들과 그들의 진지한 참여자세가 세 번째 놀라움이다.

앙굴렘 축제는 관례적으로 전년도 그랑프리 수상자가 행사의 회장을 맞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올해 회장인 세스탁(Florence Cestac)이 사상 첫 여성 회장이었다는 점은 유럽만화계 역시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길으로 꾸준히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하튼 이러한 영향으로 올해 앙굴렘 축제는 특별히 여성성이 강조되어, 쇼조망가(일본 순정만화)전, 페미니즘 성향이 짙은 세스탁, 브레테셰 등 작가들의 특별전, 영국 만화가 포시 시몬즈의 겜마 보바리 원화전 등 여러 전시 행사부터, 본 시상 부문인 알프 아트(Alph-art)의 최종 심사위원 구성 (여자 8, 남자 1) 등에서 그 의도를 분명히 했다.

물론 만화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현안들은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만화(망가)의 유입과 그 영향, 출판, 그리고 각종 행사에 있어서 작가의 권리 등이 여성성이라는 테마 못지않게 중요하고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그것은 매우 부러운 일이었다. 그 중 첫 번째인 망가의 유입은, 28회나 맞이하면서 점차 고착화되어갈 위기에 처해있는 앙굴렘 만화축제가 진정으로 세계만화축제를 표방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택한 감도 있지만, 사실은 유럽만화 전반에 있어서도 중요한 현안이다. 일본 대중만화의 여러 코드들은 유럽의 만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고, 이미 한국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미 상당부분 유입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표면화시키려는 시도가 일본 관광청의 전폭적 지원 아래 행하여진 일본만화전시회 및 관련 토론회들이다. 물론 유럽만화와의 이질감 덕분에 한국에서 일본만화를 수용할때의 노골적인 ‘침탈’과 ‘부끄러움’(하도 많이 몰래 표절을 했기 때문에!) 같은 지나친 친밀감은 없었지만, 시 중앙공연장에서 개최된 코스프레 행사가 젊은 층에게 받은 열렬한 호응을 보건데 그 거리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좁혀질 듯 했다.

작가의 권리 문제는 그보다 좀더 미묘한 사안이었다. 실제로 행사 준비 단계에서 작가들의 주체적 참여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로 인하여 올해는 작가들의 집단 보이콧 움직임이 있었고, 출판, 각종 만화 행사 및 관련 사업에서 작가의 정당한 참여 지분과 보상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앙굴렘 만화축제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로 국립만화영상센터(CNBDI)다. 이곳은 앙굴렘 만화축제가 질적으로 우수한 만화담론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핵심 기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개최된 유럽만화의 거장전은 전시회로서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 행사는 150년 넘은 원고들이 전 유럽의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공수되어, 전문적인 만화 연구가들의 분류 및 우수한 공간디자인과 만나서 최고 품질의 전시행사를 만들어냈다. 이외에도 각종 학술적인 부분,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집중 조명 및 담론 생성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CNBDI이고, 이곳 전문자료실의 자료보관 능력은 만화를 전문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단체들에게 하나의 모범사례가 될 만하다.

물론 앙굴렘 만화축제 또한 완벽한 행사는 아니다. 불어권만화 중심이라는, 세계만화축제로서의 근본적인 한계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온라인 및 기타 뉴미디어, 즉 만화의 미래에 대한 담론이 부족했다는 점, 홈페이지 등 각종 정보 서비스의 부실함, 그리고 각 전시회간의 수준이 심하게 불균등 했다는 점 등은 명백한 약점으로 남을 것이다.

앙굴렘 만화축제는 기본적으로 ‘팀웍’이 잘되어 있는 행사다. 시의 공무 조직이 만화 전문가들의 행사 기획과 진행 위에서 군림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적 보조를 통해서 융화를 이루고 있으며, 시민들은 억지로 도우미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참여하면서 즐기는 입장에서 축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바로 이러한 팀웍이야말로 앙굴렘 만화축제를 유럽 최대, 최고 역사의 만화축제로 일으켜 세운 중심 추동력이고, 앙굴렘이 만화를 전문으로 일을 벌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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