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장미를 위하여
노수인 2002.02.14
『장미를 위하여』 1권을 펼쳐드는 순간 실연 당한 주인공 유리의 멍한 표정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예쁜 주인공은 순정만화의 필수 조건처럼 여겨진다. 항상 늘씬늘씬한 롱다리의 꽃미남, 꽃미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유리는 동그란 얼굴에 숏다리, 퉁퉁한 몸매를 가졌으며, 공부도 잘 못하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본 진짜 ‘못난이다. 유리가 자신의 풍만한 아랫배를 움켜쥐다가 “앗 엉덩이 같다”고 외친 뒤, ‘몸 앞에도 뒤에도 엉덩이가 있다니라며 좌절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그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리는 할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의 유언을 따라 유명한 여배우인 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언니 후요우, 오빠 스미레, 남동생 아오이)이 있는 삿포로로 떠난다. 유리와 달리 가족들은 모두 빼어난 외모와 까다로운 성미를 지녔는데,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혈연관계?애증관계로 얽혀 있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가 다르다. 특히 아오이는 어머니가 남편의 외도상대의 남편과 맞바람을 피우고 낳은 자식이다. 사춘기가 되어서야 어머니를 찾아온 아오이는 형을 사랑하게 되고 유리에게도 이성애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계(母系) ‘콩가루 집안은, 알고 보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유리의 등장으로 인해 차츰 진정한 가족이 되어 간다. 나는 가족간에 무시무시한 결속력이 발휘되는 원천은 ‘동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24시간을, 성장한 뒤에도 다른 누구보다 긴 시간을 붙어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 진한 동질감이 형성되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아동기를 함께 보내지 않은 형제들을 향한 아오이의 감정이 ‘형제애로 곧장 흐르지 않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몇 십 년만에 만난 형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보다 말이다. 유리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따뜻함으로 주위까지 변화시키면서 스스로를 아름답게 피워낸다. 그 와중에 오빠 스미레를 향한 짝사랑으로 괴로워하고 남동생 아오이의 비뚤어진 애정공세에 시달린다. 이처럼 브라더콤플렉스와 시스터콤플렉스 등의 금기가 뒤엉켜 있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는 밝고 산뜻하기만 하다. 작가 요시무라 아케미는 서로 연고 없던 사람들을 한 데 섞어서 가족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요즘 가족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혈연 중심의, 배타적인,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가족관계라면, 과연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이 갖는 수많은 신화 혹은 인습들을 경멸한다. 반면, 또 다른 의미에서 아련히 떠오르는 가족의 이미지 - 편안함, 따뜻함, 사랑…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이는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까.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선 핏줄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의 만화는 보여준다. 『장미를 위하여』역시 결국 못생긴 유리가 ‘킹카 스미레와 맺어지는 큰 골격만 보고 신데렐라 스토리로 치부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마음을 열고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장미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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