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엘 세뇨르
만화규장각 2000.01.01
『엘 세뇨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에서 1988년 11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한국 순정만화의 대부 황미나의 초기작들이 대체적으로 서구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전적 로맨스를 다룬 데 비해, 80년대 중․후반에는 판타지(『다섯 개의 검은 봉인』, 『녹색의 기사』 등)와 액션(『무영여객』 등),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순정(『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 『너의 이름은 미스터 발렌타인』) 등 여러 가지 장르의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게 된다. 『엘 세뇨르』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로사스’를 배경으로 하는 고전적 로맨스로 시기적으로는 후대에 나왔지만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 그 분위기와 정서는 황미나 초기작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특히 이 작품은 『굿바이 미스터 블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 보인다. 검고 긴 머리의 남자 주인공, 순수하고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귀족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고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과정은 다르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고국에서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 등 기본적인 골격의 구조에서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또 단순히 표면적인 퇴행 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특별히 전대의 작품들에 비해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지 못한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여전히 낭만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 또한 그대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인 안헬리나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연인인 가브리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상황의 혼인을 함으로써 철저한 희생자가 된다는 것, 다음으로 몸을 날려 생명을 대신함으로써 어린 아들 리카르도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인 연민과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공감적인 정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안헬리나가 보여준 위대한 희생정신과 모성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것이고, 여자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인 것처럼 내면화되어 버린 것이지만, 사실 이것은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여자의 희생’과 ‘모성’은 어디까지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지 본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ale고 있지만, 흔히 그 예로 제시되는 동물의 세계에서조차 실험을 통해서 보면 모성이 학습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안헬리나의 희생적 행위가 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관습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여주인공의 관습적 전형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마누엘이 감옥에 찾아가서 갇혀 있는 가브리엘을 찾아가서 ‘인간에게 완전한 평등이란 없으며,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모두가 함께 살아간다고 하는 그 작은 섬 안에서조차 이미 위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가브리엘 자신 역시도 무의식적으로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가브리엘이 추구하는 ‘평등’한 세상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는 장면이다. 폐부를 관통하는 예리한 비판은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이 영웅을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꿈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등하게 분배되는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인류의 오랜 역사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인류의 꿈이 역시 꿈속에서나 가능한 유토피아의 세계임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 꿈이 포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좌절하고 낙담하며 절망 속에 통곡할지언정 소중한 꿈의 가치는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결국 가브리엘은 그 가치를 생명과 맞바꾼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투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그들의 붉은 핏자국 위에서 또다시 새 희망을 꿈꾸게 되듯이. 가브리엘은 죽음으로써 꿈을 지켜낸다. 그럼으로써 후세의 또 누군가에 의해 꿈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엘 세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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