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만화규장각 2000.01.01
순이는 돼지먹이를 모으러 읍내에 나갔다 여자가 주범인 3인조 은행강도를 만나 인질이 된다. 강도들에 의해 윤간당하려는 순간 무슨 마음인지 보리무늬의 옷을 입은 여자는 순이를 풀어주라고 명령한다. 무사히 풀려난 순리는 기자라고 자칭하는 남자를 만나 폭행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은근히 연정을 품고 있던 대학생 창수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신 그에게 몸을 주게 된다. 그러나 창수와의 달콤한 관계는 순이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사실을 밝히는 순간 끝장이 난다. 편히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에서 혹덩이가 되어버린 순이를 외면하고 창수는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아이를 낙태시킨 순이는 호시탐탐 그를 노리던 의붓아버지와 마을사람들의 차가운 눈을 피해 서울로 상경한다. 상경직후 호스테스의 가정부 생활로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한 순이. 그러나 작가는 결코 순이의 삶을 순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희와 미영이라는 호스테스의 가정부생활은 남자를 둘러싼 치정싸움에 의해 끝을 맺고 결국 순이는 봉제공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봉제공장으로 옮겨간 첫날 순이는 공업용 미싱을 돌리다 자신의 손가락에 바늘을 박아버린다. 그렇게 그녀의 두번째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길님이라는 친구까지 사귀게된 순이. 그러나 청계천 부근 시장에서 받아오는 일감을 손보면서 미싱 기술을 익히던 둘은, 경숙언니가 남편과의 불화 공장에서의 트러블로 인해 폭행을 당함에 따라 견습생의 자리를 떠나 공단의 미싱보조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순이는 공단에서 근무하는 ‘공순이’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공장의 사장딸과 결혼을 약속하게 된 과거의 연인 ‘창수’와 재회한다. 과거의 순이를 생각하며 얼렁뚱땅 속이려 드는 창수, 그러나 순이의 마음은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공순이에 대한 처우개선을 요구하면서 스트라이크를 계속한다. 그에 대해서 창수는 깡패를 동원해서 그녀를 윤간한 다음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짓는다.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는 아직도 더 이어진다. 남은 이야기 속에서 순이의 일생은 그녀를 인질로 삼았던 보리무늬옷을 입은 여자 은행강도범의 그것을 따라 같은 궤도를 굴러간다. 그리고 오늘도 대한민국 하늘아래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순이가 불안과 초조로 인해 상기된 얼굴로 서울행 버스를 탄다. 품에는 옷가지와 최소한의 여비를 넣은 보따리를 안고. 1987년 9월 4일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주간만화는 본격적인 성인용 주간만화지로서는 처음 간행된 것이다. 1982년의 「보물섬」으로 소년용 만화전문지의 시대가 열렸고 그 뒤를 「월간 만화 광장」이 이었고, 다시 「주간 만화」와 「매주 만화」가 태어났다. 이 잡지를 통해 김진태나 이동규 등의 신진 만화가가 목청을 높였지만 창간후 「주간 만화」의 최대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이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이다. 1898-1899년 사이 톨스토이가 『코니의 수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작품 속에서 젊은 귀족 네플류도프는 친척집의 하녀 카튜샤를 유혹해서 임신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사실을 고백하자 그녀를 저버리고 떠나간다. 결국 카튜샤는 해고당하고 매춘부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자제로서의 부패하고 나른한 나날을 보내던 네플류도프는 배심원이 되어 법정에 나갔던 어느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던 여죄수 마슬로바가 자신에 의해 타락했던 카튜샤라는 사실을 알자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고 카튜샤를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부활』이다.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의 서두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했을 뿐 부활과 동일하게 시작된다. 그리고 순이의 인생유전은 카튜샤의 그것과 혹사하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인생의 내리막길을 굴러간 끝에 살인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순이와 카튜샤의 인생은 크게 차이를 보인다. 카튜샤가 강제수용소에서 정치범을 만나 그와의 결합에 의해 새로운 인생으로의 개척을 시작하게 되는 희망적인 끝을 맞이했다면, 순이는 살인과 출소, 과거 그녀를 조롱하던 닳고닳은 여자 주희를 만나서 함께 보리무늬 옷을 입은 여자의 전철을 되풀이함으로써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와 절망의 확대재생산을 맞이한다. 1980년대가 한국만화계에서 이현세의 시대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주제라는 면에서 그의 작품이 한국만화사에 가져온 가장 큰 혁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사회의 주류층에 편입될 수 없는 자들의 처절한 절규’가 아닌가 싶다. 미우라 아야꼬의 원작을 어레인지한 『까치의 제5계절』에서 시작해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으로 이어지던 오혜성의 절규는 순이에 와서는 피크를 이룬다. 주인공 개인의 발버둥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구석구석에서 오늘도 새로운 순이가 태어나고 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꽃며느리밥풀 [Melampyrum roseum]은 실존하는 풀로써 한국과 일본, 중국 등지에 걸쳐 분포하는 한해살이 풀이다.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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