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축국-보다 정확히 말하면 독일과 일본-의 패배는, 인민들의 충성을 굽히지 않고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마지막 날까지 싸운 독일과 일본 자체에서를 제외하고는 슬픔을 뒤에 거의 남기지 않았다. 결국 파시즘은 자신의 중심국들 밖에서는 아무것도 둥원하지 못했다.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上)』p248에서 인용) 일찍이 인류는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근대에 들어서만 세계적인 전쟁을 두 차례나 겪으며, 많은 인간들이 때아닌 죽음을 겪어야만 했다. 전쟁이 불러내는 슬픔은 물리적인 파괴보다도 황폐한 인간화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전략과 전술 속에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상황에 이른다. 또, 이념의 이유로 자행되는 불합리한 살인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아시아의 맹주와 세계의 패권국가로 자리잡기 위한 일본의 야욕이 다른 국가와 민족에게 얼마만한 아픔을 주었던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전쟁이후에도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여전히 존재하여 일본의 정치가들의 망언이 이어질 때마다 우리는 분노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역사인식, 즉 교과서에서조차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 되고 있는 셈이다. 『환영의 표범』에는 두 가지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 책제목과 동일한 「환영의 표범」과 「우크라이나 혼성여단」이 그것이다. 두 단편은 동일하게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짐작하고 있다시피 작품 속에는 가해자로서 반성이 담겨져 있지는 않다. 작가는 전쟁이라는 배경을 빌려와 그 속에서 인간들의 탐욕과 믿음 그리고 배신 등을 이야기해 나간다. 「환영의 표범」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일본인과 한 명의 독일인은 전쟁을 계기로 군(軍)에서 만나게 된 인물들이다. 전쟁이 없었다면 인연이 닿지 않았을 이들을 더욱 강력하게 묶고 있는 것은 물자를 빼돌려 사리사욕만 채우는 또 다른 일본인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조국과 동료를 배신하는 자를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기억하고 있다가 복수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즉,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동료애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라는 국가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도덕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전쟁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의 정의(正義)를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혼자만 편하기 위해 법을 어기는 자를 단죄하는 것과 동일하다. 결국, 전쟁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크라이나 혼성여단」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참가했지만, 패전은 그들에게 목숨과 귀향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 남아있는 일본인인데, 여기서 그는 엄연히 피해자이다. 조국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그는 수용소를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죽어간 동료들에게 꼭 조국으로 돌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전쟁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결정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힘없는 인간들이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삶을 열심히 꾸려나갔을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죽거나 고통을 당해야 한다. 『환영의 표범』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본’이라는 가해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 억울한 피해자들에 속한다. 작품을 통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자기반성이랄지, 다른 참전국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자. 학원물에서 ‘폭력’을 채택하는 것이나 환타지에서 신화를 끄집어 오는 것과 같이 작품에서 ‘전쟁’이 가지는 의미는 배경과 소재로서이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일본의 국민들이지만, 전쟁 속에서 방황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그들 역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