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바람의 나라
만화규장각 2000.01.01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 작가 김진의 대하장편 ‘바람의 나라’는 비운의 걸작이라 할 만 하다. 92년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댕기, 모션이 잇달아 폐간되면서 잡지연재 없이 단행본을 내다가 코믹스투데이에 웹 연재를 하고 있다. 단행본 또한 댕기네책들에서 시공사로 옮겨와 새로 책을 냈다. 장편의 수명보다 잡지의 수명이 짧은 이 척박한 현실에서, 이제 16권까지 나왔으나 아직도 한참이나 더 남았다고 한다. 바람의 나라는 초기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는 이 시기에 고구려 3대왕 무휼은 아버지 유리를 사랑하고 증오하면서 자라난다. 권력을 두고 싸워야 하는 부자간에 얽힌 살. 아버지는 아들을 두려워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해야 하는 숙명은 무휼과 그의 아들 호동에게도 이어진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이사이의 인간관계를 작가는 상상력으로 촘촘하게 엮어간다. 호동왕자의 비극은 예정되어 있고, 그 비극을 향해 줄달음치는 세밀한 과정을 독자는 가슴 졸이며 지켜보게 된다(이런 면에서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와 비슷하다). 독립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이 매우 많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내용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만 해도 무휼, 청룡, 호동, 봉황, 연, 용, 대소, 이지, 세류, 남조, 해색주, 재사, 유리, 영채, 괴유, 가희, 충, 운, 사비, 선우, 해명, 혜압, 마로, 추발소, 채, 미랑 등등. (만화 중 등장인물 수로는 최고수준일 것이다.)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행동한다. 작가는 섬세하게 이들에게 개성을 불어넣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린 심성을 가진 인물이 점차 망가져가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그리고 있다. 바람의 나라의 내용은 어렵고 주제는 무겁다. 문어체의 장중하고 긴, 때로는 시적인 대사는 천천히 음미해야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어느 정도 접어둔 선택이다. 귀여운 인물이나 개그컷도 자주 나오지 않는다. 연과 무휼의 사랑 이야기는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쉬운 부분이지만, 작가는 1권에 이미 연의 죽음을 삽입한다. 절대절명의 사랑은 여러 번 나오지만, 제대로 맺어지는 사랑은 아직 하나도 없다. 도무지 편한 마음으로 넘겨볼 수 있는 만화가 아니다. 전체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자아와 타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손을 대면 먹물이 묻어날 것 같은 어두운 화면과 빈틈없이 지면을 가득 메운 프레임들로 무거운 작품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톤을 빽빽하게 사용해서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점도 특징이다. 고대국가의 의복과 장신구를 우아하게 그려내어 김진 세계 속의 한국적인 미를 재현해내었고, 탄탄한 데생으로 만들어낸 역동적인 동선 또한 김진만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직선적이고 강한 펜터치는 판화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정감이 가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은 장점이다. 인물들의 옷과 머리 모양을 빼면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 문제점이다. 하나의 작품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작품은 앞으로도 더 많이 연구될 가치가 있다.
<바람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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