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악마 오로론
만화 규장각 2000.01.01
장마철에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만만치 않지만 공기 중 가득한 습기만큼이나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잔뜩 흐려서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을 뿐더러 어디선가 불행이 곰팡이처럼 자라고 있을 것만 같다. 영화나 소설에서 불길한 사건, 운명적 만남이 일어날 즈음에는 어김없이 이런 배경이 제시되곤 한다. 『악마 오로론』의 비극적 사랑도 비오는 날 시작된다. 혼자 사는 치아키는 비오는 날 악마 오로론을 줍는다. 현상금 사냥꾼과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친척들에게 지친 오로론은 치아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치아키도 오로론과 함께 지내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이런 단란한 생활도 잠시, 오로론을 노리는 적들은 계속해서 공격해오고 치아키의 비밀까지 밝혀지면서 싸움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치아키가 대천사 미쉘의 딸이라는 것. 서로 좋아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치아키와 오로론은 신의 아이와 악마라는 태생적 차이로 더욱 어긋나기만 한다. 싸움은 계속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惡魔)는 그야말로 악의 결정체다. 사탕발린 목소리로 인간을 유혹해서 결국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소설「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사랑을 빌미로 선량한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았고,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에서도 악마는 자신의 원하는 대로 인간을 조종하는 악랄함을 보인다. 이렇듯 악마란 인간의 욕망을 빌미로 지옥으로 끌고 가는 섬뜩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악마 오로론』에서는 좀 다르다. 첫 장면에서처럼 비를 맞고 주저 앉아있는 오로론은 위태롭기만 하다. 전지전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고통도 함께 짊어지고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작품에서 악마는 안식을 찾아 헤매는 고독한 인물로 그려진다.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것에 괴로워하면서도 살인은 삶의 방식이라고 냉정하게 얘기하는 ‘나쁜 남자’의 모습은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하다. 때문에 무조건 살인반대를 외치는 치아키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오로론의 어두운 내면은 독특한 악마 모습을 만들어내면서 작품 전체 분위기를 지배한다. 팔 다리를 한껏 늘여놓은 듯한 길쭉한 그림도 우울함을 더한다. 걸을 때마다 휘날리는 코트자락이나 머플러는 오로론의 불안정한 마음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사랑도 포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휘청거리면서도 치아키를 감싸안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비극은 암시된다. 『악마 오로론』은 4권으로 완결되었다. 예상대로 천사의 악마의 사랑은 어긋난 채 끝나버렸다. 암울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로 시종일관 독자를 압도했지만 대단원으로 너무 빨리 치달았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도 이에 부족함을 느낀 것일까. 2부에 해당하는 작품 『한밤의 제국(眞夜中の帝國)』이 신쇼칸(新書館)의 잡지 「윙스」에 연재중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뒷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악마 오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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