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해와 달
만화규장각 2000.01.01
1995년 서울문화사의 「아이큐 점프」에 “박동해” 글, “권가야” 그림의 독특한 무협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해와 달』이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작화를 맡은 권가야의 데뷔작이기도 했다. 그러나 뛰어난 연출과 작화 능력을 바탕으로 한 작가주의 무협을 선보임으로써 한국 무협만화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이 작품은 연재 기간 동안 엽서집계를 통한 인기도가 매우 낮았기에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이후 권가야는 “좌백”의 무협소설 『대도오』를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각색한 『남자이야기』로 1999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오늘의 우리 만화상”과 “출판 만화 대상 저작상”을 수상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안팎으로 맘껏 과시하게 되었으나, 데뷔작 『해와 달』은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만화의 대중적-상업적인 실패와는 별개로 그 작품성을 아깝게 생각하는 팬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 구조적 측면에서 이 만화는, 전형적인 무협물의 골격을 그대로 갖고 출발한다. 주인공인 “백일홍”의 부모는 무림(武林)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高手)들이고, 그의 출생 과정엔 남모르는 적당한 비밀이 있으며, 또 그의 성장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처럼 여느 무협물과 비슷하게 시작한 이 작품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전개를 거쳐 독자들의 예상을 깨는 방식으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백일홍의 임신한 아내는 현상금 사냥꾼에 의해 죽고, 그의 아버지 백비를 사랑했던 여인은 폐인이 다 된 백일홍을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사람도 정작 주인공인 백일홍이나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해와 달』에서는 여성들이 더 이상 “사회적 약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남자 못지 않게 강한 여자들이 줄거리의 또 다른 축을 구성하고 있다. 또 별 것 아닌 듯한 무공으로 수많은 무사들을 물리치는 주인공 백일홍은 정신적으로는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고, 하다 못해 똥을 미처 다 싸지도 못하고 죽는 무림 고수(만무득)까지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같이 상식의 틀을 깨는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에, 상당히 복잡한 이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가 묘하게 설득력을 갖고 다가온다. 그래서 이 만화는 무협 만화이지만 ‘흔한’ 무협 만화는 아니다. 존재와 가치에 관한 심각한 토론을 다루고 있는 이 만화 『해와 달』은, 좀더 절박하게 주제를 다룰 수 있도록 삶과 죽음의 순간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강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이를 낳고 사람을 죽이는 혼란의 한가운데에 독자를 밀어 넣고서 ‘편한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무협 만화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사랑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때로 그 고민들은 하잘것없어 보이는 말장난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그들이 그 동안 무림에서 얻은 무슨 신군(神軍)이니 무적(無敵)이니 하는 거창한 별호에서 생긴 명예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지금 이 시점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범주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 본능과 이성 사이의 갈등, 삶과 죽음의 가치, 그리고 사랑 같은 것이다. 단순한 가치관으로 포장된 가상의 공간인 무림(=강호)에서 조차도 결코 이러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세속적인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이런 문제들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파헤치기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해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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