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닥터 쿠마히게 (Dr. Kumahige)
만화규장각 2000.01.01
과학발전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무엇보다 생활의 편리함에 있다. 추운 겨울, 차가운 물에 빨래는 해야했던 아낙네의 걱정은 세탁기의 보급으로 오늘날의 몫이 아니게 되었고, 밤낮으로 며칠을 걸어서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도 이제 단 몇 시간이면 족하게 되었다. 더 이상 편리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도 새로운 것은 계속 쏟아져 나온다. 그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은 인심(人心)이다. 기계화되어 가는 편리함만큼 사람의 온정 역시 메말라간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한 것은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가짐이다. 병에 대한 과학적인 검사, 정확안 약의 투여, 정기적인 검진 등 체계적인 관리도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환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 어떤 생활의 편리함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따스함만이 환자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이다. 『 Dr. 쿠마히게』가 보여주는 진정한 의사상도 거기에 있다. 친구를 위해 출세의 길을 버리고 대학병원을 떠났던 테쯔로는 도시의 변두리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에 진료소를 열고 있다. 그가 주로 상대하는 환자들은 가난하고 사회에서 소외 받은 이들이다. 아프고 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곰이라 부르며, ‘이 동네에서는 구급차보다 털보의사가 더 믿음직하다’며 신뢰하고 있다. 후배 사부로 역시 테쯔로의 인간적인 면에 이끌려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그의 밑에서 수련하게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을 위한 의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의술이다. 주인공이 괴로워하는 것은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죽어 가는 사람을 보는 직업’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손쓸 수 없는 지경의 환자는 쿠마히게에게 고통이다. 인간을 위한 의술이 무기력한 기술로 바뀌는 순간이다. 의사로 살아가며 테쯔로가 느끼는 것은 출세나 성공을 위한 목표지향의 삶이 아니라 죽어 가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이다. 이웃의 동네의원에서조차 돈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요즘 이런 의사가 있다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과 신(神)이 할 수 있는 영역은 따로 존재한다. 병을 치료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가능하지만,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꺼내오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던 테쯔로의 길을 막는 동네 사람들, 그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던 테쯔로, 여전히 의사로서 가야할 그의 길은 첨단화의 시설보다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작품의 마지막 이야기는 테쯔로가 치료했던 이가 그를 만나러 오토바이를 타고 오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제발 부탁이니까 교통사고로만은 죽지 말아줘’라는 테쯔로의 오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의 영역 앞에서 능력 있는 의사도 무능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TV 뉴스를 보면 가끔씩 의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그에 대부분은 좋지 않는 모습이다. 의약분업을 막기 위해 환자들이 목숨을 담보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의료보험으로부터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도 한다. 혹은 정식절차를 밟지 않고 수술해 이익을 많이 남긴다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가슴 깊이 담으며 처음에 의사로서 나서던 때와는 다르게 바쁜 현실에 묻혀 사람보다는 돈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이다. 다행히 다큐멘타리 프로에서는 가끔씩 주위에 묻혀 있던 선행 가운데 묵묵히 자신의 인술을 베푸는 의사들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부정적인 사례는 뉴스에 나와야 할 만큼 특수한 경우이다. 많은 의사들은 여전히 인술을 중시하는 테쯔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닥터 쿠마히게 (Dr. Kumahige)>
작품 정보 보기
  
만화리뷰
정글 같은 도시로부터의 현실적 격리 : <웰캄투실버라이프> 리뷰
조아라
2020.11.23
세상은 계급사회다 <셀(CELL )>
김하림
2020.11.09
도대체, 다정하고 귀여우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최윤주
2020.10.26
재앙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윤지혜
2020.10.22
대중과 조우하는 컬트: <죠죠의 기묘한 모험>
손유진
2020.10.22
<병의 맛> - 타자를 바라보는 윤리적 재현
김한영
2020.10.21
잘 가, 쿠키로 키운 내 딸 유미야. <유미의 세포들>
조아라
2020.10.16
거미: 인간의 탐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의 반격
김하림
2020.10.12
시간의 등속 운동에 저항하기, <체크포인트>
김선호
2020.10.07
<삼국지 스피리츠> : 만화의 제2형식을 고찰하다
손유진
2020.09.21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그 씁쓸한 뒷 맛 - <아스란 영웅전>
윤지혜
2020.09.18
<랜덤채팅의 그녀!>-이제 랜덤채팅은 안 하나요?
김한영
2020.09.17
흉악범의 출소와 디지털 교도소 : <비질란테> 리뷰
조아라
2020.09.16
웹툰도 광고하는 시대, 브랜드 웹툰을 리뷰해보았다
최윤주
2020.09.15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꿈꾸는 청춘만화
김하림
2020.09.07
이념이여 영원하라, 가족과 영면의 <피와 살>
김선호
2020.09.02
역전된 관계와 여성 성장 서사, <치트라>
윤지혜
2020.08.27
네가 없는 시간, 내 앞에 놓인 시간
최윤주
2020.08.19
집값을 둘러싼 총성 있는 전쟁 : <위대한 방옥숙> 리뷰
조아라
2020.08.18
<진격의 거인>: 인간에 대해 말하다
손유진
202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