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미스미소우 완전판
이선인 2018.08.12

오시키리 렌스케는 1998년 잡지 ‘주간 영 매거진’에 단편인 <마사시! 뒤를 봐!!(マサシ!うしろだ!!)>를 그리면서 데뷔했다. 물론 만화라고는 그려본 적 없어 작화가 불안한 한 인간이 그 길로 승승장구 하긴 어려웠던 모양인지, 데뷔로부터 5년 뒤인 2003년에 잡지 ‘별간 영 매거진’에 <데로데로(でろでろ)>를 연재하며 비로소 ‘연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표기적인 데뷔는 98년, 연재 작가로의 시작은 2003년임에도 그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하이스코어 걸>을 연재하기 시작한 2010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무려 그가 일본 만화계에 나타난 지 10년이 지난 이후에야 각인되기 시작한 셈이다.


일본에서 컬트적인 관점에서 쫓아온, 혹은 뒤늦게 발견해 그의 세계에 빠져든 독자들 그리고 그를 발굴해낸 코단샤(講談社)는 공통적으로 그를 양면의 작가처럼 다룬다. 코믹 호러라는 장르로 시작된 오시키리의 만화에 드라마가 삽입되면서부터 작품이 코믹과 호러로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두서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코미디를 그리는 그를 ‘흰 오시키리(白押切)’, 도저히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세계를 그리는 그를 ‘검은 오시키리(黑押切)’라고 부른다는 모양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일본의 서브 컬쳐계에서 흔히 보이는 양상으로, 그 데즈카 오사무를 다룰 때에도 흑과 백으로 작품을 양단하곤 한다. 아마도 하나의 인간(혹은 크리에이터 집단)으로부터 발생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두 작품군 간에 거리감이 느껴질 때, 그것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흑/백의 구분법을 사용하는 것 아닐까 싶다. 요컨대 이러한 구분의 명명은 그의 두 경향이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시키리 렌스케의 작품에서는 그 두 경향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작품군은 기본적으로 ‘검은’ 쪽에 속해있다는 느낌이다.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작품들에서도 어째선지 불길한 에너지가 감지되어 완연하게 \'희다\'고 말하기 어렵다. 굳이 색을 붙이자면 회색이라고 하는 쪽이 맞다.

이러한 불온한 감각은 그의 자전적 만화 <피코피코 소년>의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감지된다. 최초로 ‘패미컴’을 플레이한 기억을 다루는 이 에피소드는 느닷없이 어린 시절의 - 본명인 칸자키 료타로 등장하는 - 그가 패미컴을 얻으면서 종료된다. 본래 옆집에 살던 소녀 타카네의 소유였던 패미컴은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넘어오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패미컴은 그만하고 공부나 하라”는 타카네의 아버지의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광경을 묘사하는 오시키리의 관점은 어딘가 이상하다. 이 장면에서 패미컴을 건네러 온 타카네는 한쪽 뺨이 이상할 만치 부어오른 상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전한 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때 타카네의 얼굴 - 특히 부어오른 뺨 - 을 과도할 정도로 클로즈 업 한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이 나온 뒤의 태도다. 오시키리는 이러한 장면을 노출해놓고 그에 대한 그 어떠한 설명도, 첨언도 붙이지 않는다. 물론 당시의 어린 오시키리는 그것이, 즉 타카네가 입에 담은 ‘아빠의 말’과 ‘부어오른 뺨’이 어떠한 의미인지 몰랐으며, 그저 강렬한 시각적 각인만을 남겼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코피코 소년>은 전적으로 현재의 오시키리가 과거의 자신을 복기하는 작품이며, 그것은 작품 전체에 내레이션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의 오시키리’가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다. 도리어 부어오른 타카네의 뺨을 클로즈업으로 담았다는 선택에서 ‘어른 오시키리’의 의도를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시키리는 타카네의 뺨을 외면하고 있다. 부친의 폭력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아무런 말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그 사실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외면이라면 더욱 이상해지고 만다. 이것은 말하자면 ‘불완전한 외면’이기 때문이다. 오시키리 렌스케가 작가로써 그 사실로부터 완전히 고개를 돌릴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해당 클로즈업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외면하고 싶어하는 사실을 페이지에 노출시킴으로써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오시키리는 외면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하고 싶은 것일까? 애석하게도 이 에피소드에 남겨진 페이지에서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그 어떠한 단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외면은 그 시점에서 끝이 났으며 그 뒤에도 그것을 굳이 꺼내어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시키리의 태도는 <피코피코 소년>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흰’ 작품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피코피코 소년>, <피코피코 소년 TURBO>, <하하(haha)>에서 그가 자신의 부친을 대하는 태도(자신의 과거사를 다룬 이 세 작품에서 그의 부친의 존재는 이상할 정도로 축소되어 있다. 실제로 그의 부친은 1998년에 느닷없이 실종, 2013년에야 비로소 재회할 수 있었다 한다.), <도로도로>나 <오도로촌 모노노케록(おどろ町モノノケ?)>, <푸피포-!(プピポ-!)>에 등장하는 악령들의 전사(前史), <푸피포(プピポ-!)>의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왕따 문제까지, 그의 세계 내에서는 현실의 어둠을 반영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것을 바탕에 넣어만 둔 뒤 이야기의 바깥으로 요소들을 던져버림으로써 ‘불완전한 외면’을 반복하고 있다. 게다가 때로는 의식적으로 눈치 채지 못하는 ‘척’하는 방식으로 코미디를 연장하거나 그 위에 완벽한 판타지를 얹음으로써 낭만적인 도피를 갈구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흰 오시키리’란 일종의 광대놀음처럼 보인다. 분명히 스스로 체현한 세상의 어둠을 작품이라는 무대에 소환시키고는 있지만 그것을 마주보지 않고 그 위에서 바보춤을 추는 것이다. 자신이 목도해온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 망연자실해 춤사위를 올리는 것이 ‘흰 오시키리’에 대한 인상에 가깝다.
하지만 ‘검은 오시키리’에서는 양상이 변화한다. 한일 양국에서 그의 ‘검은’ 작품으로 꼽히는 대표작은 <미스미소우>일 것인데, 이 만화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연재되었던 <푸피포-!>와 거의 유사한 기반을 가지고 시작한다. 지방의 작은 도시, 전학을 온 뒤 왕따를 당하는 소녀, 소녀와 유일하게 공감대를 가지게 되는 소년같은 요소들이 공유되고 있다. 물론 <미스미소우>는 오시키리의 흰 작품인 <푸피포-!>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지나칠 정도의 낭만적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멀뚱히 소멸시켜버린 <푸피포-!>와 달리, <미스미소우>는 현실의 문제를 붙잡고 늘어진다. 특히나 주인공인 하루카에 의한 보복이 연쇄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하며 (많은 이들이 본작을 거론하게 만들었던) 다량의 신체훼손 장면이 노출되는데 이 시점에서 굉장히 높은 수준의 불쾌감을 선사한다. 신기하게도 <미스미소우>의 특징은 이것이 불쾌하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일본 만화계에서 트렌드처럼 사용된 ‘사적 보복’에 관한 만화들은, 가해 측에게 비인간적 페르소나를 씌움으로써 사적 보복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소위 \'심리적인 방패\'를 구축하는 일정한 경향을 만들어왔다. <미스미소우> 역시 그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난 구성을 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이어지는 하루카의 복수에서는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어찌 보면 이것이 <미스미소우>를 회자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아마도 보복의 순간 하루카를 악마처럼 묘사하는 작화가 독자로부터 소격을 발생시키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 모든 보복의 행위가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 심지어는 남은 ‘타겟’들에게 공포조차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 기묘한 허무주의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더욱이, 하루카가 베고, 찌르고, 내리치는 것들은 기껏해야 피상에 머무르는 것들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한 불안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마침 <미스미소우>에는 이런 구성에 대한 단초가 존재한다. 완전판 상권에 삽입된 이케가와와 마미야의 대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케가와 : “난 언제나 욕구불만 상태라고 마미야. (...) 이 마을 탓도 있어. 이 겁나 촌구석에 있는 마을 말야... 노래방도, 오락실도, 비디오 가게도 없어... 놀 곳이 전혀 없다구. 우리 같은 젊은이들을 충족시켜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다들 왜 병도 안 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

마미야 : “너라는 존재 자체가 글러먹은 거야.”

어찌보면 이 대화는 오시키리가 지금까지 연장해 온 모든 어두운 세계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다시 말해, 그가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엉망진창의 세계의 성립에 ‘오락’과 ‘천성(혹은 태생)’이라는 두 가지 전제를 내걸고 있는 셈이다. 사실 마미야는 이케가와에게 반박하고 있는 셈이지만, 두 주장은 애당초부터 맞물리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전자는 환경의 문제이며 후자는 본질의 문제에 가까운 것이다. 현상은 양자가 얽혔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지, 둘 중 하나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이케가와가 주장하는 ‘오락의 부재’가 자신의 삐뚤어진 인성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이라면, 마미야는 그러한 변명을 일축시키는 정리에 가깝다. 그래서 이 대화에 있어 어느 쪽에 방점이 있느냐고 한다면 단연 마미야의 말에-그의 대사가 씬을 닫고 있다는 점에서-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마미야이 ‘주장’은 <미스미소우> 내에서 지속적으로 설명되어진다.

<미스미소우>는 가해 인물들의 가정환경을 지속적으로 설명하려 드는데, 물론 이런 경향은 이전에 말했던 사적 복수 서사의 트렌드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가해 인물들을 ‘만들어낸’ 부모들은 폭력적이거나, 고압적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보호적이라 자녀들을 괴물로 만들어 왔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이런 흔해빠진 구성이 특이하게 읽히게 되는 이유는, 앞선 마미야의 대사가 이러한 사실을 재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미야의 대사에 의하자면 모든 가해자 일당은 그 ‘존재 자체’가 글러먹은 것이며 이는 말하자면 태생의 문제로 치환된다. 즉 부모들은 괴물을 잉태해 낳은 악의 모태이다.
특히 하루카의 유일한 아군이었지만 사실은 내면에 괴물을 장착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아이바가 그것을 확실히 증명한다. 마을의 외부인인 아이바의 어두운 자아는 (이케가와가 설명하는) 오락이 부재한 환경에서 탄생한 것일 수 없다. 도리어 오시키리는 그의 부친과 모친이 아이바의 괴물을 만들었음을 친절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하루카의 위압적인 보복은 허무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하루카가 아무리 괴물들을 베어 넘긴들, 그들을 모태한 존재들에게까지는 그 위해가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은, 둘도 없는 자식을 잃고도 무너지지 않고 폭력적 자아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해내 급기야 - 어떤 면에서 하루카의 미래일 수 있는 - 미나미 선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장면 이후로 부모들은 작품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감춰버리는데 그러한 묘사가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미나미 선생의 죽음이 어떠한 반복의 가정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한 또 다른 반복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미스미소우>는 보복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레이어와 악을 발생시키는 레이어를 완전히 떼어놓음으로써 이 보복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보복의 행위가 잔인하고 처절할수록, 그런 사실에 대한 직면은 더욱 커지고 덕분에 불쾌함만이 남게 된다.
다만 이러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이케가와의 주장을 완전히 지워낼 수 없다. 물론 이케가와의 대사는 기껏해야 자기 인성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 대사에서 어쩐지 이케가와 본인이 자신이 괴물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전제를 붙인다면 그의 대사는 ‘나의 태생이야 어떻던, 온건한 오락만 주어진다면 괜찮았을 수도 있어.’가 아니라 ‘나는 태생이 괴물이지만, 나에게 그것을 완화시킬 오락이 있었다면.’이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논리는 굉장히 많이 삐뚤어져 있다. 정말 괴물로 태어났다고 해도, 정신을 집중할 무언가가 있다면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최소한 오시키리 렌스케라는 작가에게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읽는다. 여기서 다시 그의 자전적 작품인 <피코피코 소년>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는 공부와 운동을 포함해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게임이라는 활력소로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했음을 밝힌다. <피코피코 소년 TURBO>의 앞부분에는 아예 ‘게임이 없었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요컨데 오시키리 렌스케에게 있어서 오락이라는 이름의 탈출구는 인간으로써의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이케가와의 주장은 마미야의 주장에 반박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미스미소우>의 괴물들은 태생과 환경이라는 양자의 부재를 통해 괴물화 되어 간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오시키리 렌스케가 그러한 배경을 지닌 작가라고 하여 <미스미소우>가 ‘소년들에게 게임을!’ 따위의 슬로건을 내거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이케가와와 마미야의 문답은 어떠한 주장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작가 본인에게 잠재적으로 각인된 괴물을 본능적으로 내비친 쪽이다. 그렇다면 <미스미소우>에 대한 질문은 ‘그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소하길 바라는가?’로 움직이기보다 ‘그는 왜 이러한 이유로 괴물을 형상화 했는가?’로 움직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미스미소우> 역시 불완전한 외면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겪어왔거나, 혹은 건너서 본 현상을 수많은 컷 위에 흩뿌리지만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보복과 악의 본질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양자가 전혀 접촉하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즉 오시키리는 둘을 어떻게 대면시켜야 할지 혹은 둘이 대면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끝나야 할 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그는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솔직한 형태로 작품에 자신을 투영해놓았다. 그것이 바로 ‘태생’과 ‘오락’으로 집약되는, 자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괴물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오락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해왔고(<피코피코 소년>), 생활력 있으며 올곧은 어머니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텨왔다(<하하 haha>)고 고백해왔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미스미소우>의 괴물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두는 오시키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타락한 자신의 모습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키리의 외면에는 어느 정도 동조할 수밖에 없다. <미스미소우>의 과격한 신체훼손의 표현들은 모두 외면을 충당하기 위한 표현들일 것이다. 요컨데 ‘흰 오시키리’에서의 엉망진창 코미디와 동일한 바보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미스미소우>에서 그는 조금 더 고개를 돌려 현상에 직면하려 들었고, 그 결과가 이런 괴팍한 몸부림으로 도출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완벽한 직면으로 돌아선다면 어떻게 될 지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미스미소우>의 처연함에는 어쩐지 오시키리 본인의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미스미소우>의 괴물들을 가장 잔인한 형태로 도륙한 배경에는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자신이 있었던 것 아닐까. 이 거칠고 괴팍하기만 한 작품에서 어떤 종류의 처연함이 묻어나오는 건, 이번 춤사위에서는 뭔가 다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만화리뷰
이 좋은 걸 어떻게 전달할까? - 인생론 vs. 자기계발 vs. 코믹 에세이
이복한솔
2019.01.22
야마시타 히데코가 만든 조어 ‘단샤리(断捨離)’는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생활의 조화를 꾀하는 삶의 방식과 실천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관리할 물건이 적으면 가사 부담이 줄어들고, 이로써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편, 사사키 후미오 등은 '단샤리'를 불필요한 물건을 (잔뜩) 버리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로 사용한다. 적게 소유하고 정리정돈에 마음을 쓰는 삶의 방식은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따로 사용한다.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그들은 강연, 인터넷, 출판 등을 매개로 단샤리/미니멀리즘을 알렸다.
좁은 방을 나서며
박근형
2019.01.22
통제와 교화의 수단으로써의 감옥은 사회 유지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에 따라 개인성을 말소하고, 자유를 구속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으로써의 전체주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신체와 사고의 부자유가 강요되는 곳, 작가 김홍모는 그 좁은 방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좁은방>을 발표했다. 그는 다수의 어린이 만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빨간약>, <내가 살던 용산>, <떠날 수 없는 사람들>과 같은 르포 만화에도 참여하였다. <좁은방>은 지금은 없어진 웹툰 플랫폼 <어른>에서 2015-2016년 연재되었고, 2018년 2월 보리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안녕(安寧)’한 풍경에 가닿기 위한 어떤 상상력
지덕재
2019.01.22
2016년 12월부터 레진코믹스에 연재되고 있었던 다드래기 작가의 웹툰 <안녕 커뮤니티>가 곧 완결을 맞이한다. (마지막 화가 2019년 2월 3일자로 등록) 웹툰 <안녕 커뮤니티>는 재개발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청암시 청암진구 문안동 12통과 13통, 14통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포착한 드라마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나이는 45년생에서 55년생 사이로 대개 환갑을 넘겨, 지방 중소도시의 높은 노령인구 비율을 연상시킨다.
츠즈이 씨와 츠즈이의 나날
이복한솔
2018.12.25
오타쿠 겸 동인녀는 픽션을 진지하게 소비한다. 원작자가 소개하지 않은 부분까지 연구하고 유추해내기를 좋아한다. 특히 두 명 이상의 남성이 참가하는 연애나 성애를 다룬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또 뭐가 있을까? 필자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래픽노블로 다시 태어난 톨스토이의 고전
박근형
2018.12.21
모든 위대한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그렇듯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과 문학 역시 분리될 수없이 밀접했다. 귀족가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젊을 적 농민의 계몽에 실패한 후 노름과 색욕에 빠졌고, 이는 이상주의, 금욕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사상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 현실의 욕구와 정신적 이상 사이의 모순에서 찾아오는 정신적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예요?”
이선인
2018.12.21
한 가지 질문. 어떠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을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조건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조건은 실존하는 무언가가 등장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장소, 내가 아는 인물, 내가 아는 사건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의 실재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조건이 될까? 영화에 당신이 아는 장소가 등장하였다고 하여,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서사를 즉시 사실로 납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물, 배경, 사건이라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실화 기반’을 표방한 작품들마저, 등장 이후에는 인터넷에 실제와의 차이점이 범람한다.
2018년, 웹툰에서 느끼는 공포의 감각
지덕재
2018.12.21
네이버 웹툰은 국내 최대의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웹툰 플랫폼이다. 네이버 웹툰은 2011년부터 매해 릴레이 단편을 선보이고 있다. 2011년 ‘미스테리 단편’으로 시작한 릴레이 단편 시리즈는 2012년 ‘지구가 멸망한다면’, 2013년 ‘전설의 고향’으로 이어지며 2018년에는 ‘재생금지’ 시리즈를 한시적으로 연재했다. 네이버 웹툰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연재된 이 시리즈는 매해 웹툰 팬들과 네티즌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무슨만화
지덕재
2018.12.04
송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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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3
마당 씨의 식탁
이선인
2018.11.12
검둥이 이야기
이복한솔
2018.11.05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인 뫼비우스의 길 (윤필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어느 작가는 인식과 표현의 한계를 아쉬워했다. “의인화를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다”고. 실버백 마운틴 고릴라를 글로 묘사하면서 “고릴라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상상...
유미의 세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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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유미 씨,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이동건 작) 지덕재(만화평론가) 네이버 웹툰에서 2015년 4월 1일부터 연재 중인 은 네이버가 자랑하는 인기 작품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 2회 연재되는 은 해당 요일 인기 순위 1, 2위...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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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
흰띠들에게 보내는 편지 (돌배 작) 박근형(만화평론가)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 다양한 문화, 인종의 사람들이 녹아드는 미국 사회를 일컫는 개념입니다. 학창시절 사회 교과서에 종종 등장했던 이 단어는, 다원화된 다문화 사회보다는...
후르츠 바스켓 (FRUITS BAS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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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먼치킨 전설 오니기리맨 (타카야 나츠키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동서고금 이야기꾼들의 연구대상으로, 주인공이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혹은 철저하게 패배하는) 이야기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장애물은 시대와 유행에 따...
아무튼 나는 프랑스에 산다
이선인
2018.10.02
아무튼, 그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 듯 하다. (박윤선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2015년에 장강명의 소설 가 베스트 셀러에 진입했다. 는 한국에서의 업무에 지친 한 20대 청년이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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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기’를 통해 성장한 모두에게 바치는 찬가 (허5파6 작) 지덕재(만화평론가) 들어가며 : ‘읽기 전용’ 삶 - 현실과의 거리두기 를 이루는 주요 재료는 바로 ‘2000년대 초반에 10대였던 사람이 실제로 겪었던 순간들’이다...
내 친구 다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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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그래픽 노블로 읽는 범인전 - 범죄자를 다룬 전기문학 (더프 백더프 작) 이복한솔(만화평론가) 그랜트 우드의 회화 은 요모조모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갈퀴를 든 남자와 비스듬히 선 여자, 두 사람의 표정이 참 딱딱하다. 고딕 회화에 ...
아스테리오스 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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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완성하는 여정 , 데이비드 마추켈리 박근형(만화평론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는데.” 아픈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중년 남자는 이혼한 아내를 떠올린다. “‘구두다움의 본질’의 반격이 아닐까?” 남자의 말에 아내는 웃으며 답했더랬다. ...
며느라기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이선인
2018.09.07
민사린님의 상태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수신지 작) 이선인(만화평론가) 2014년 말부터 지금까지는 어떤 면에서 가장 놀라운 한국 사회의 면면을 보인 시대다.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에 이토록 강인하게 대두된 적이 있을까. 우리들에게 있어 항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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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재
2018.09.06
일상과 판타지, 전통과 현대 사이의 ‘신선한’ 대화 (효미 작) 지덕재(만화평론가) 은 다음 웹툰에서 2016년 6월 28일부터 지금까지 연재 중인 작품이다. 주로 작화가로 활동했던 작가 ‘효미’가 스토리 창작도 함께 맡은 첫 번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