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수염 & 멜빵
이복한솔 2018.08.06

<수염 & 멜빵>(이하 '수염멜빵') “소소한 영국풍 어드벤처(?)” 제목과 소개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한 필자는 눈요기를 목적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펼치고 보니 대개의 캐릭터가 삼등신 아니면 사등신이었다. 귀엽기는 하지만 양복에서 기대할 수 있는 조각 같은 긴장감이 적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배경과 화려한 팔레트가 좋았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구시렁댈 수밖에 없었다. 맵시가 아찔한 팔등신 사나이들은 어디 있느냐고. 이건...... 반칙이라고.

필자의 불평이 쑥 들어가게 된 계기가 몇 가지 있는데, 커다란 배경을 여러 개의 패널로 나눈 다음 달리는 동작을 각각 쪼개 넣은 연출도 그중 하나다. 땅딸막한 인물이 온 힘을 다해 이 패널 저 패널 가로지르는 장면은 웹으로 모바일로 보나 경쾌하고 명확하고 또 알뜰하다. 삼등신은 작은 화면에도 쏙 들어가므로 동작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웹툰에 삼등신 캐릭터는 드물지 않지만, 그에 어울리는 플랫포머 게임 같은 액션은 퍽 신선하다. 눈이 바쁘니 딴생각을 할 틈이 없어 읽다가 멈추기 어렵다.
작품의 배경은 무엇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혼재와 변화의 시기다. 전화와 자동차, 무전기와 제트팩이 나오는가 싶더니 다음 패널에서는 설화나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상한 생물’이 등장한다. 어떤 사안을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는 대사가 왕족 폐지를 논하는 왕족의 입에서 나온다. 기술 대 환상, 다수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소수가 만수산 드렁 칡처럼 어찌어찌 얽혀있다.

에릭 하트만은 이상한 생물들을 비밀리에 관찰하는 ‘기록사’이자 왕족 ‘라하트만’의 일원이다. 그의 파트너인 윌리엄 발렌타인은 동화를 쓰는 전직 경찰이다. 그들이 만나고 기록하는 생물들은 어떤 현상들의 원인이나 실체로써 세상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가끔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때’, ‘누가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도 없을 때’, ‘날씨에 상관없이 안개가 자욱할 때’, ‘인간이 자기 욕심 때문에 속임수를 남발하고 무고한 사람을 해칠 때’에도 그들이 연관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비롯한 말썽은 소소하면서 때로 사랑스럽기도 하다. 심지어는 이상한 생물의 정점으로 꼽을 수 있는 뱀파이어와 마녀도 인간과 어울리며 제법 흐뭇한 장면을 연출한다. 뱀파이어는 이웃집 어린이와 우정을 나누고 마녀는 공주와 긴밀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다.
‘어둠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제거한 다음 ‘저주 주문’과 ‘검은 다이아몬드’를 합치면 완성되는 괴물이다. 피를 먹으며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피해자의 시신 곁에서 다음 사냥감을 물색한다. 어쩐지 악의를 찾아보기 힘든 수염멜빵의 세상에서 그것은 형광 핑크처럼 주의를 끈다. 그것을 설명할 때 ‘세 땅의 주인’이라 불리는 인간과 마녀와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요소가 한 번씩 언급되는 탓일까. 검은 다이아몬드는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산물이고, 저주 주문은 마녀의 전문 분야이며, 피를 먹이로 삼는다는 점은 뱀파이어와닮았다. ‘세 주인’들의 특징을 모두 지닌 그것은 악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어둠 인간도 ‘이상한’ 축에 속하지만, 의지가 빠지고 욕망으로 꽉 차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생물들과 구별된다.

만만치 않은 말썽은 어둠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화 ‘마녀와 사악한 셋째 왕자 이야기’의 셋째 왕자 역시 수염멜빵 전체에 걸쳐 여러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똑똑하고 사악한 왕자는 마녀와 뱀파이어를 속이고 그들의 힘을 빌려 왕좌를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다. 그가 왕이 되려고 했던 동기나 명분은 밝혀진 바 없지만 나라 사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건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고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그가 차지했던 왕국은 재정난을 견디지 못해 이웃 나라에 흡수 병합되는 것으로 공식적인 역사를 마감한다. 문제는 왕좌에 대한 그의 욕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왕족 라하트만은 다른 왕족들과 달리 아직도 왕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변화의 흐름을 피하지는 못한다. 시발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복수의 날’이라 불리는 왕궁 테러가 변화의 촉매로 작용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라하트만 가에 복구 불가능한 흔적을 남긴 이 비극은 왕권 폐지가 타당하다는 주장의 첫 번째 근거로 꼽힌다.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 유지해야 할 만큼 왕좌가 중요하냐는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시민의식이 발달하고 계급이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 권력의 대물림은 평등하지 않다는 논리다. 모든 라하트만이 왕족 폐지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어서 속도는 더디지만, 작품에서 다룬 시점까지는 퍽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하트만은 시민과 왕족 사이의 불평등을 의식하여 세금을 많이 내고 국정에는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다.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힘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 큰 힘을 독차지하는 것은 약자와 강자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반은 자의로, 나머지는 타의로 일어난 변화는 비단 왕족뿐 아니라 작품 속 온 세상에 걸쳐 일어나는 추세다. 쓸모가 있든 없든, 역할이 크든 작든 살아있는 모든 것이 변한다. 변화가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멸종하고, 어떤 이들은 좌절한다. 윌과 에릭, 두 주인공의 감각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모험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을 기록하기 위한 여정이다. 해서, 그들의 일은 조금 쓸쓸해 보인다. 큰 흐름을 막거나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라서 더욱 그렇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마음을 죽일 필요는 없다. 윌과 에릭은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수염멜빵에서는 무언가를, 아니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 미래에도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날이 닥쳤을 때 존재가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려면 참고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 선한 의지와 이성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된다면 동화도 좋고 도감도 좋다. 윌과 에릭이 그랬던 것처럼 기록의 힘을 믿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리될지 어떨지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밝혀질 터. 두 기록사의 모험이 정말로 소소했는가에 대한 결론은 작품의 결말 이후 어디엔가 감추어져 있는 셈 치기로 한다.
<수염 & 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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