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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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일간의 유예 (미치 작)
이복한솔 (만화평론가) 2018.07.18

<340일간의 유예>(이하 ‘삼유예’)는 시작부터 불길한 작품이다. ‘유예’의 관련 단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집행’이다. 무엇을 예하겠다는 것인지는 몰라도 선뜻 뚜껑을 열기가 꺼려진다. 필자만 그런가?

삼유예는 “다종 국제사회”를 다루는 고등학교 수업 장면에서 시작한다. “종”은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고 미래를 점치는 데까지 적용되는 개념이다. 평생 단 한 사람에게만 연애 감정을 갖는 것도 종의 특성으로 인정되며, 그런 사람들은 “셧”이라고 불린다. 대중은 셧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화하며 예술의 소재라는 핑계로 그들에 대한 환상을 소비한다. 심지어 어떤 셧은 그것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사이코패스의 변형으로 보이는 “디스트로이”라는 종도 있다. 디스트로이의 특성은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전자는 인격 장애를 지닌 사람을 뜻하는 데 반해 후자는 드물게 나타나는 유전 형질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폭력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그들은 일찌감치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되어 관리의 대상이 된다. 한쪽은 만인에게 사랑받지만, 다른 한쪽은 절대다수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셧과 디스트로이는 상극이다.

화린은 셧, 도성은 디스트로이다. 린은 도성에게 첫눈에 반해 영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전학생이다. 등장하자마자 자기소개와 사랑 고백을 한꺼번에 해치워버리고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목표가 뚜렷하고 요령이 부족한 그는 시종 사랑스럽다. 반면 도성은 린이 “다치지 않길 바라”서 자기 같은 위험 인물에게 “털끝 하나도 닿지 않게” 하려고 상대를 거부하는 듯 차가운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사회의 감시와 차별을 피하고자 자신이 디스트로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 채 살고 있다. 강력범죄를 저질러도 재력과 연줄로 무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선을 넘어 정말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안팎으로 조심한다.
화린이 한발 다가가면 도성은 반 발 물러서는 사건들이 작품 중후반까지 반복된다. 이후 린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관계를 포기하기로 한다. 셧은 실연을 견디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흔하다고 알려져 있고, 린은 그 사례를 직접 목격한 경험도 있다. 상대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셧은 기약 없이 삶을 낭비하고 금세 쇠할 위험이 있다. 이 같은 판단 아래, 린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기 시작한다. 셧으로서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는 힘든 결정을 내린다.

본능을 거스르기는 도성도 마찬가지다. 린은 도성의 파괴 욕구를 자극하는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도록 만드는 복잡한 존재다. 도성은 린의 접근을 막지도 반기지도 않으며 상대가 제풀에 지치는 순간을 기다린다. 절반은 린을 향한 진지한 연심 탓이고, 나머지 절반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의 결과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가능한 한 무해한 삶을 살고자 하는 듯 보인다. 잔인한 장면이 지나가는 꿈을 꾸고 나면 공포인지, 죄악감인지, 자기혐오인지 모호한 어떤 감정에 몸서리치는데, 이 같은 혼란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삶과 존엄을 위하여 불가항력(으로 보이는 “종”으로서의 욕구와 꼬리표)에 굴하지 않는 주인공들의 태도는 약간의 안도감을 준다. 재미는 없지만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린이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두 사람의 노력은 허사가 된다. 린을 구하는 과정에서 도성의 폭력성이 발현되고 만다. 도성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린도 예외는 아닌데, 그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위험을 알면서도 도성을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연인에게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남긴 채 끝나는 결말은 찜찜하기 짝이 없다.

작품에 담겨있는 희망 대부분은 경찰이 등장하는 장면에 담겨있다. 디스트로이를 범인으로 상정했던 수사의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으면서 진전을 보이는 부분이다. 경찰은, 아니 인류는 유전자에 특이성이 없는 “리스”도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례를 산 채로 확보할 뻔 한다. 도성이 범인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다종 국제사회에는 무시 못 할 파문이 일어났을 것이다.
작품의 나머지 희망은 린과 도성이 종의 이면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삽화에서 엿보인다. 화린은 셧의 나쁜 사례를 배운다. 재력과 권력을 지닌 셧은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 관계를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도성은 자기 주변을 부수고 망가뜨리는 “디스트로이”가 아니라 소중한 이를 지키는 사람이 된다. 그 수단이 폭력적이어서 아쉽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하는 태도는 사뭇 고무적이다...

“종”이라는 설정은 인물의 동기와 한계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대신한다. 린이 사랑에 목숨을 거는 이유, 극단적인 폭력성과 인간성을 모두 지닌 도성의 내적 갈등 따위는 정공법으로 다룰 경우 작품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독자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주 생략해버리면 이야기가 작위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초반에 주인공이 어떤 속성을 “타고 났다”고 미리 소개해두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이후가 한결 편해진다. 묘사를 줄이고 재미를 강조하기 위해 쓰이는 이 같은 요령은 예나 지금이나 널리 쓰인다.

삼유예는 자극적인 소재와 간단한 요령만으로 적당히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세계관의 부조리를 강조하여 서사의 깊이를 더한다. 인간의 특성은 타고나는 것이며, 그것이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던 기본 전제, 작품 초반에서 제시했던 다종 국제사회에 대한 의문을 슬쩍 제시한다. 정말로 그게 전부이겠냐며 독자를 감질나게 만든다. “종”은 정말로 태어나는 것일까? 인격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비단 유전자뿐일까? 한국에서 태어나 자신의 노력 없이 권력과 재력을 물려받은 인물은 별도의 종으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해칠 위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해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이럭저럭 린과 도성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순수와 폭력, 일상과 자극, 집념과 단념, 구축과 파괴, 희망과 절망, 린과 도성으로 긴장과 균형을 이룬다. (어디라고 특정하긴 어렵지만 어디엔가 반드시 있을) 적정선을 지키면서 자극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얼핏 보면 좋아하는 소재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주제를 설정한 것인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한 것인지 순서가 헷갈릴 정도다. 어느 쪽이든 좋으니 이 찜찜함을 떨치고 싶다. 작품을 읽은 뒤로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여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차라리 린이... 아니다. 실언할 뻔했다. 머리맡에 모셔둔 다음 작품을 어서 읽어야겠다.
<340일간의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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