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파라오의 연인
만화규장각 2000.01.01
절대보편적인 일이라 장담할 순 없지만, 이른바 신작이라 불리우는 것에는 대개 예전의 창작물을 통해 시험되었던 지적 자극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미디어나 매체의 종류를 불문하고 비슷하게 존재하는 일로, 만약 이런 시점을 오랜 세월동안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지속해온 만화가에게 적용시켜본다면, 여러모로 흥미있는 결과를 볼 수 있으리라. 작가가 한 작품 한 작품을 완성시켰을 때마다 발전시켜온 요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르고 쌓여서 일종의 퇴적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를테면 『파라오의 연인』이라는 만화는, 1984년 『라이온의 왕녀』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신일숙이 이루어온 발전사항들이 축적되어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파라오의 연인』은 1998년부터 잡지 「윙크」를 통해 연재되기 시작하여, 현재(2002년 1월) 단행본으로 12권까지 출시되었다. 만약 이 작품을 잘라서 그 단면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실로 퇴적암을 연상시킬만큼 다채로운 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프쉬케(1996)』에서 준비된 신화적인 감성에 덧붙여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래의 운명관이 작품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중간중간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표현은 『리니지(1992)』에서도 사용된 방법으로, 『파라오의 연인』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회상록이나 수기를 읽는 듯한 감상을 가지게 해준다. 『카르마(1990)』에서처럼 환생이 소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붉은 타란티움의 향기(1994)』와 같이 미스테리성도 포함하고 있다. 심지어 『나의 이브(1990)』나 『루딘나이츠-천사가 내리는 숲(1995)』을 통해서 언뜻 비춰보였던 것처럼, 성적으로 다소 개방되어 있는 묘사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파라오의 연인』이라는 만화 안에는 작가로서의 신일숙이 자기 작품 활동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시도했던 다채로운 도전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기존 만화에서 보여줬던 것들을 적당히 짜깁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자이크처럼 경계선이 드러날만큼 어설픈 마무리를 짓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지닌 바 장점들이 잘 계산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신일숙의 만화는 예전부터 세심하고 미려한 화풍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파라오의 연인』에서도 그것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주목을 끌게 되는 점은 스토리 전개상 차례대로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복선들을 치밀하게 구성해놓은 연출력이다. 굳이 언급할 것 까지도 없겠으나, 『파라오의 연인』과 같은 만화에서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요소들을 어떻게 위치시키는가에 따라서 드라마의 폭이 달라진다. 이 작품 안에서 보여준 스토리 전개상의 수법들은 다양하면서도 능수능란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특정 화자(話者)를 둔 표현법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옛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한 『리니지』에서의 연출은 고조된 감정들을 수그러들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야기의 밀도가 높은 『파라오의 연인』의 경우에는, 중간중간 화자를 통해 정리됨으로 인해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가 부여된 것이다. 물론, 다소 아쉬운 점들도 눈에 뜨인다. 예를 들자면 세부 설정에 있어서의 어색함이다. 상류계급의 생활상과 피닉스 재단을 비롯한 비즈니스 사회에 대한 묘사는 이 이야기에서 굳이 중요하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디테일한 부분들에서 현실감을 주기엔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다시 말해 이미지적인 화려함은 눈을 크게 뜨도록 현란하건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굳이 신일숙과 『파라오의 연인』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순정만화라는 장르 전반의 개성이라고 할 수도 있으므로, 그것을 흠으로 잡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일지도 모른다) 피닉시오 아메시스라는 주역 캐릭터의 수동성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는 아름답고, 순수하며, 사랑받기에 족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첩되어온 갈등 구조 안에서, 그는 자기 의지로 행동하기보다 주변의 의지에 이끌리는 면이 강하다. 아름다운 피조물에게 흔히 허용되는 너그러움에 기대고 있다. 그런 점들도 하나의 캐릭터성인 이상 섣불리 폄하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때문에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하고 답답해진다는 인상을 금할 수 없다. 다행히도 연재되는 내용이 점차 클라이막스에 접어들면서, 이런 부분은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 신일숙이 『파라오의 연인』 전반을 통해서 지금껏 보여주었던 연출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파라오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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