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2018 신인만화평론가 공모전 수상작> 로망과 현실 (여탕보고서 리뷰)
(가작 / 지정평론)
김재훈 2019.01.03



수천 년 전 인류에게 ‘목욕’이란 문화가 생긴 이래로 여인들의 목욕이란 남성들에게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밀하고 성스러운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조는 신화와 동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만화로도 친숙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악타이온’과 전래동화의 ‘선녀와 나무꾼’이 대표적이다. 고의든 아니든 여인들의 목욕을 훔쳐본 두 남자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하다. 악타이온은 여신 아르테미스의 목욕을 목격한 죄로 사슴이 되어 자신의 사냥개에게 물려 죽었으며 나무꾼은 선녀가 목욕하는 틈에 날개옷을 훔친 후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닭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를 보면 옛 선조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함부로 금남의 공간을 침범할 경우 큰 화가 뒤따른다는 교훈을 심어주려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했던가 선조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오랫동안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남성불가침의 영역인 여탕을 마음껏 엿볼 기회가 왔다.

<여탕보고서>는 ‘고렙목욕커’ 마일로 작가가 목욕탕에 다니면서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여탕의 환상을 철저하게 깨부수는 만화’이다. 목욕탕에서 마주칠 수 있는 어린이부터 100세 어르신을 아우르는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목욕탕의 시스템과 서비스, 전반을 자세하게 묘사하면서도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와 적재적소에 활용된 패러디를 통해 ‘일상 만화는 대개 지루하다’는 편견을 타파하였다. 거기에 작가 또한 만화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목욕커’로서의 관점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목욕을 즐기는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여성 독자들에겐 격한 공감을, 남성 독자들에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선사함으로써 연재 초반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다른 매체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화라는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서비스신’이다. 서비스신을 굳이 간단하게 풀이하자면 이야기의 전개와는 관계없이 등장인물의 성적 묘사를 강조하는 장면, 정도로 정의할 수 있는데 특히 일본 만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일본 만화에서 서비스신은 만화의 장르를 막론하고 등장한다. 수영장, 온천은 물론이며 전투 중에 복장이 훼손된다거나, 등장인물이 뜬금없이 넘어지거나, 강풍이 분다는 이유로 팬티를 노출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연출은 사실상 클리셰로 굳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익숙하다. 우리나라는 웹툰을 통해서 일본과는 다른 방향으로 만화산업을 발전시켰으나 일본 만화의 메가히트 작품들이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 만화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심심할 때면 나오는 인기 웹툰들의 선정성과 폭력성 논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비스신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남발한다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겠지만 이를 에로티시즘으로 볼 것인지 프로노그래피로 볼 것인지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소수의 작품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서비스신은 작품 속에서 잠깐 등장하는 이벤트성을 띠고 있다. <여탕보고서>처럼 이야기의 무대 자체가 여탕인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MBC 드라마 ‘숨바꼭질’의 여주인공이 남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 출연자들의 나체가 노출되었고 이를 본 시청자들의 거센 항의에 결국 제작진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처럼 선정성 논란이 생길 가능성이 큰 장소, 더욱이 여탕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는데 작가 마일로가 보여준 답은 너무나도 명쾌했다. 바로 만화답게 그리는 것이다. <여탕보고서>에서는 여성의 알몸이 더는 성적인 의미가 아니다. 마치 낙서처럼 단순화된 몸매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캐릭터들은 작가에겐 모자이크나 안개 등 불필요한 연출 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독자들이 스토리에 집중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도 당당하게 여탕을 훔쳐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이 벌거숭이인 여탕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매체가 또 있을까? 아마 만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탕보고서>는 다른 매체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소재를 만화를 통해 훌륭하게 그려내어 아직 사회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들 또한 얼마든지 만화로 재미있게 다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선구자와도 같은 작품이다. 

목욕탕이라는 곳은 단순히 씻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다. 휴식, 미용, 운동, 사교활동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하나의 테마파크이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 중 하나이며 자연스레 이런저런 문제나 갈등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마 자주 논란이 되는 것은 남자 어린이의 여탕 출입 문제가 아닐까 싶다. 실제 공중위생관리법으로 정해져 있는 남자 어린이의 여탕 출입 가능 나이는 만 5세라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들이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만 5살이 넘었음에도 나이를 속여 여탕에 함께 들어가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작가 마일로도 이와 관련된 경험담을 에피소드로 그렸는데 평소에는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신경 쓰지 않았으나 척 보기에도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기골 장대한 남자아이가 의젓하게 씻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을 정도로 민망했다는 내용과 함께 “당신 눈에는 귀여운 아기일지 몰라도 남들 눈엔 어엿한 남성”이라는 대사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독자들은 해당 에피소드의 댓글 창에 수많은 댓글을 작성하며 공감을 표시했다. 비슷한 경험을 겪었으며 제발 자제해달라거나 집에서 씻겼으면 좋겠다는 여성들의 댓글이 많았는데 재밌는 점은 남탕에도 여아를 데리고 오지 말라는 남성 독자들의 공감 댓글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마일로 작가는 댓글 창이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탕보고서>라는 작품이 더욱 사랑받았던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목욕커’ 작가와 ‘목욕커’ 독자들이 대동단결하였다. 댓글을 통해 여성 독자는 남탕을, 남성 독자는 여탕을 배움으로써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남자 어린이의 여탕 출입이나 탕 온도 조절, 어린 시절 부모님과 때를 밀던 추억 등 목욕탕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공감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은 우리나라 목욕 문화 발전과 더불어 남녀 갈등 해소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방면으로 극찬을 받으며 인기를 얻은 작품이지만 여탕이라는 한정된 주제만을 가지고 연재를 하니 아무래도 소재 고갈 문제는 피할 수 없었던 듯하다. 후반부에서 독자들도 소재가 고갈되는 것을 우려할 때쯤 돌연 마지막 화를 업데이트하면서 약 1년여 동안에 짧고 굵었던 연재를 종료하게 된다. 물론 연재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연재하고자 마음만 먹었더라면 충분히 더 연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인기 작품 중에서도 단기 연재에서 장기연재로 바뀐 경우는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기보다는 박수를 받으며 떠나 유종의 미를 거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며 ‘레전드’라는 말을 듣는 이유일 것이다. 

<여탕보고서>는 남성들이 갖고 있는 여탕에 대한 환상을 없앤다. 이에 실망한 남성들도 있을 것이다. 환상은 환상으로 남아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로망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의 충격이 큰 것처럼 로망이 클수록 현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실망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악타이온이 <여탕보고서>를 읽고 여성의 목욕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까? 나무꾼이 결혼에 대한 로망이 없었더라면 선녀의 목욕을 몰래 보는 일도 없었을까? 모르겠다. 선조들은 이 이야기에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선택지를 만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상상력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상상력이 없는 삶은 메마르기 쉽다. 하지만 악타이온과 나무꾼, 이 두 남자를 반면교사로 삼아 로망과 환상에 발을 들이기 전에 잠깐이라도 좋으니 현실과 마주 보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탕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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