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에시리쟈르
만화규장각 2000.01.01
『아라비안 나이트』의 시작을 기억하시는지. 부인의 배신으로 마음이 비뚤어져 밤마다 처녀와 동침을 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끌어내어 죽여버리는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재상의 딸 셰헤라자드는 밤마다 왕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해서 왕이 셰헤라자드를 다음 날 밤까지 살려주는 일이 천일동안이나 되풀이되었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아라비안 나이트』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신일숙의 『에시리쟈르』에 “신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참 어울리는 문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아랍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기에 별 생각없이 붙은 부제겠지만, 이 시대 순정 만화가들 중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신일숙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결국 『에시리쟈르』는 셰헤라자드 대신 신일숙이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인 셈이고, 작품 전체에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나레이션이 깔린다는 점은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해준다. 『에시리쟈르』는 1992년 「미르」에 연재되던 중 잡지 사정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중단되었고, 1997년 「윙크」에서 끝을 맺은 작품이다. 중간에 5년 가까운 공백기간이 있었기에 전반부와 후반부 그림체의 변화도 다소는 눈에 띈다. 가슴에 장미 문신이 있는 『에시리쟈르』라는 여인을 얻는 왕자가 임금이 되리라는 예언, ‘에시리쟈르’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노력하는 일곱 왕자,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는 주인공 쟈라(에시리쟈르)와 라뮤드......라뮤드와 쟈라의 사랑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일곱 왕자의 개성을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개성에 꼭 맞는 반응을 보이게 하는 것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신일숙의 재능은 돋보인다. 『에시리쟈르』의 또 다른 매력은 “반전”이다. 신일숙이 예상외의 결말, 혹은 반전에 아주 능한 작가라는 것은 『1999년 생』과 『카르마』 등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러나 『에시리쟈르』의 반전은 더 색다르다. 운명론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던 “장미 문신의 에시리쟈르”라는 것이 예언자 하킨의 안배라는 것도 그렇지만, 계속 쟈라라고 생각되었던 처음에 등장한 갓난아기가 사실 라뮤드였고, “에시리쟈르”를 얻어 왕위에 오를 사람이 일곱 왕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왕의 사생아였던 라뮤드라는 것까지, 그리고 그 모두가 하킨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독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모든 일이 제자리에 들어맞아 “주인공들에게는 장밋빛 미래만 남아있구나.“하고 독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점에 신일숙은 또 라뮤드와 쟈라가 왕위를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예상외의 결말을 제시한다. 『에시리쟈르』는 신일숙의 작품들 중 비교적 가볍고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축에 속한다. 또한 단행본으로 3권이라는 길지 않은 분량에 비해 “이야기꾼”으로서 신일숙의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때문에 결코 그림 실력이 떨어지는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림 한 컷이나 대사 한 마디로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도 역시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살아있는 만화는 늘 즐겁고, 작가 신일숙의 역량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에시리쟈르』를 보고 있으면 신일숙이 다시 셰헤라쟈드가 되어 또 다른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날을 기대하게 된다.
<에시리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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