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우수만화리뷰]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 앙꼬 만화 <나쁜 친구>
한기호 2019.12.17




만화를 보는 동안 즐겁고 유쾌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견딜 수 없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대체로 만화가 생생한 현실에 기초하고 있을 때 그렇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괴롭고 고달픈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만화가 베풀어주는 환상과 몰입의 세계로 도피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원해 만화를 펼쳤는데 그곳에서 다시금 지옥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된다면 숨이 막힐 듯한 공포를 느끼게 되는 법이다. <나쁜 친구>는 그런 종류의 만화이다. 화면 하나마다 페이지를 넘기기 무섭고 점점 무거워지는 그래서 지독하게 끔찍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그런 만화. 그러나 그 중에 따뜻함을 맛볼 수 있는 그런 만화.


<나쁜 친구>는 흑백 만화이다.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감은 사람들을 일시적인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흑백으로 구성한 만화는 그렇지 않다. 흑백으로 양분된 만화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몰입을 강제하는 힘이 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흑과 백을 나누고 그 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게 하는 힘. 게다가 이 만화의 흑백은 밝은 쪽이라기보다는 어두운 쪽의 채색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어두움의 힘이 너무 강해 밝은 쪽이 겨우 겨우 숨을 이어가는 구성은 만화를 보는 사람마저 숨이 멎도록 만든다. 내용 역시 그렇다. 밝고 희망차고 건강한 색채로 가득해야만 할 열여섯 청소년 시기의 천진한 소녀들은 오히려 끔찍한 폭력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마저 졸이게 한다. 온통 어두움으로 가득한 소녀들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그리는 만화가 독자들을 편하게 해줄 리 없다.


만화는 열여섯 살 진주와 그 친구 정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사람은 흔히 날라리나 불량배 등으로 불리는 청소년 무리에 속해 있다. 흑과 백으로 나뉜 세계에서 밝은 쪽이 아니라 어두운 쪽에 사는 친구들. 하지만 진주와 정애의 어두움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정애의 집에 모여드는 또래들이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웃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모두가 가정적인 문제와 결핍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애 역시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건달이어서 실제적인 보호자가 없는 불행을 안고 산다. 그런 친구들과 달리 진주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 출신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진주가 촉발한 것일 뿐 정애가 겪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애와 진주가 가출하여 생활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진주의 꿈은 6층 빌딩을 사서 살겠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고 정애의 꿈은 소박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둘이 처한 상황이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일탈 상황이지만 진주의 그것은 사춘기 소녀가 누리는 낭만적인 한순간의 꿈이라고 한다면 정애의 그것은 불가피하게 영속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처절하고 뚜렷한 차이. 그것이 흑과 백처럼 혼재하지 못하고 아프게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 정애와 진주가 극도로 친하게 된 까닭과 그럼에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진주에게 있어서 정애는 낭만적 일탈이 현실화된 인물이기에 좋은 것이지만 정애에게 있어서 진주는 자신이 현실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환상을 현실로 살아가는 인물이기에 좋은 것이다. 각자 서로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낭만적인 상대가 되는 셈. 한쪽의 낭만은 실현 의지 없이 일시적인 것이고 다른 쪽의 낭만은 실현될 수 없는 절망적인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이 만화는 두 장면이 오버랩 되는 것으로 끝난다. 둘이 가출해서 생활할 때 지독한 현실을 몸으로 견뎌야만 하는 정애는 기꺼이 밤일을 하려고 어두운 세계로 나가고 낭만적 삶을 꿈꾸는 진주는 밝은 방안에 혼자 남아있는 장면. 이제 성인이 된 진주는 버스에서 정애를 만나지만 모른 척 내려버리고 정애가 탄 버스는 어두움 속으로 떠나고 밝은 정류장에 진주 홀로 남아있는 장면. 이 두 장면이 겹치면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나쁜 친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어두움의 세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정애가 아니라 그 세계에 불행한 친구를 두고 떠나온 진주가 나쁜 친구라는 것을. 만화를 보는 우리 역시 누군가의 나쁜 친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진주는 정애와의 추억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한다.



난 내 과거를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얘기하는 게 즐거웠다. 난 더 이상 그곳에 속해있지 않으니 재미있던 일들은 모두 이야깃거리로 남았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고 난 즐거웠다고,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만족했다. 그래서 그 날 내가 너를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네가 끔찍했다.

   


이 독백의 다음 구절에는 아마도 ‘혼자만 이곳에 살고 있는 내가 끔찍하게 부끄러웠다.’가 생략된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며 산다. 내가 세운 기준, 내가 살아오면서 옳다고 판단한 가치관에 따라 아주 편리하게 어두움과 밝음을 구분하고 산다. 그리고 자신이 구분한 기준에 따라 내가 선택하지 않은 저편은 어두운 편이고 내가 선택하여 살아가는 이편은 밝은 쪽이라 믿으며 산다. 그것은 어쩌면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학교교육이나 종교교육 등으로 인해 어느 사이엔가 고착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이란 살면 살수록 그렇게 간단하게 흑백으로만 나눌 수는 없는 곳이라는 점이다. 나는 늘 밝은 곳을 지향하는 것 같지만 간혹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곳에 몸을 담을 수도 있으며, 내가 어두움이라 비난하던 쪽의 일들을 나도 모르게 스스로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흑백으로 선명하게 가를 수만은 없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세계의 잔혹한 속성이다.


<나쁜 친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그 두 가지가 혼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녀들은 밝지만 어두운 일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어두운 일탈에는 밝고 순수한 것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내재되어 있다. 손가락질을 하며 쉽게 정애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애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끔찍한 현실에 정애를 홀로 버려둔 것은 진주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정애를 정애로 만든 책임은 그 부모를 비롯한 학교와 교사와 사회 모두에게 있다. 어두운 일탈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밝은 세계로 나와 살아가는 진주는 그것을 잘 안다. 자신이 정애를 비난할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음을. 자신은 정애의 세계를 살아갈 수 없으며 정애는 자신의 세계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곳에 정애만을 두고 혼자 떠나온 것이 못내 부끄럽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만화는 모든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내가 지금 밝은 곳에 서있다고 해서 어두운 곳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나의 밝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밝음이 밀어낸 분량만큼의 어두움이 저쪽에 항상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내 안에는 진주와 정애가 모두 함께 거주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곳에 나만 살아남아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쪽에 남은 자들을 잊어버리는 순간 내가 사는 이곳이 곧 어두움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연말이 오면 모두가 조금씩 착한 사람이 된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힘겨운 일상에 함부로 개입하며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연말이 주는 은총이자 또 다른 의미의 아픔이다. 한해가 저문다는 것은 한 생애가 저문다는 것의 예고편이다. 언제든 내 삶이 저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연습의 시기이다. 그러니 작은 선행을 통해 자신의 삶에 오래도록 밀려온 어두움을 조금이나마 밀어내고자 애쓰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속성일 것이다. <나쁜 친구>는 지금 이곳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아직 그곳에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성찰하라는 연말과도 같은 만화이다. 그 강렬한 힘을 그려내기 위해 한 장 한 장 땀 흘려 고된 작업을 했을 만화가의 고통과 그 이면에 담긴 정애를 향한 깊고 따뜻한 애정에 응원과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부디 모두들 따뜻하고 부끄러운 연말이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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