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길이 나를 부른다, 별들의 들판으로
<비바 산티아고> 김용진 지음 / 네이버 웹툰
조아라 2020.01.17

길이 나를 부른다, 별들의 들판으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직역하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스페인의 유명한 성지순례 길이자 치유와 회복의 길로 알려진 이 길은, 작년에 방영되었던 TvN 예능 ‘스페인 하숙’을 통하여 더욱 잘 알려졌다. 주로 프랑스의 생장에서 출발1) 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나 되는 길을 걷게 되는데,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산티아고까지 걷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2013년, 나는 이 길의 일부(레온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까지 약 300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었다.


△ <선천적 얼간이들(가스파드)> 6화 - 삶의 모토 

 고백하건데 나는 ‘3보 이상 택시’를 준수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2층 이상은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며, 계단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내가 300km나 되는 길을 걷기로 결심한 계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어느 밤 우연히 본 아름다운 웹툰, 「비바 산티아고」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1) 산티아고까지 가는 순례길은 여러 종류의 루트가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길은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프랑스의 '생장'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루트'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스토리의 매력

 비바 산티아고는 김용진 작가 자신이 2011년 카미노를 걸었던 경험을 그린 일종의 ‘여행’ 웹툰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잔잔하다. 위기나 절정은 없다. 동행자에게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든가, 빈대에 물려서 가려웠다는 에피소드가 이 작품의 최대 위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첫 날의 인연으로 내내 같이 걷게 된 동료들이나,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심야식당」처럼 그들의 에피소드가 이끌어가는 옴니버스식 구성은 아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오롯이 작가의 걷는 여정에만 집중되어 있다.
하긴, 애당초 카미노를 걷기로 결심한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른 즈음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고민, 내 청춘이 이제 끝난 것은 아닌가 하는 평범한 고민이 이 여정의 출발점이다. 잘 살고 있느냐는 친구의 안부 전화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혼자 뒤처지는 것 같은 평범한 두려움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시한 계기로 출발한 잔잔한 이야기가 나를 꾀어냈다. 3보 이상 택시를 외치던 나를 걷게 만들었다. 이렇게 심심한 스토리가 독자를 홀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조자에서 동행인이 된다.

 독자가 작가와 함께 걷게 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작품에 대하여 아무런 정보가 없는 독자라면 누구나 중립적인 관조자에서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한쪽 편을 들기도 하며, 특정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도 한다. 특히 흡입력 있는 작품을 읽을 때에는 관조자로 남아있기가 더욱더 힘들다. 작품에 몰입한 독자는 작품 안으로 들어가 한편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바 산티아고」를 감상하는 독자의 경우에는 어느새 작가의 동행인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작가와 함께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타고, 작가와 함께 프랑스에서 순례를 시작하며, 작가와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더 나아가서는 이른 새벽 함께 기상하고, 함께 걷다가, 함께 잠이 든다.

 이는 철저하게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된 구성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몇몇의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 작품 내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여행 1일차부터 시작하여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32일차까지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내 공간도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움직인다. 동쪽의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서쪽의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되돌아가는 것 없이 서쪽으로만 차근차근 이동한다. 시간과 공간을 함부로 역행하지 않는 단순한 서사는 독자의 피로도를 낮춰준다. 관조자로 돌아가 뒤엉킨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복잡한 셈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하지 않은 독자는 물 흐르듯이 작품에 녹아들어 작가와 함께 길을 걷는다.

 독자를 동행인으로 만드는 또 다른 장치는 색상의 변화, 특히 하늘 색상의 변화이다. 「비바 산티아고」에서는 다소 과장된 채도 높은 색상을 전반적인 톤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현재 서사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에 관한 정보를 준다. 독자는 과장된 색상을 보면서 지금이 하루 중 어느 때인지, 어떠한 공간이 있는지를 별다른 노력 없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실제의 독자는 지금 한낮의 서울에 있지만, 짙은 남색의 하늘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새벽의 스페인 숲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 시간에 따른 하늘의 색 표현

 하지만 독자를 관조자에서 동행자로 바꾸는 가장 큰 동력은 작가가 매일매일 느끼는 감정을 상세하게 독자와 공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떠올린 기억, 길에서 만난 사람과의 대화에서 작가가 느낀 감정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재창조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사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별다른 노력이 들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모든 에너지를 작가가 나눠준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독자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산티아고로 떠나고 싶도록 만든다. 매일 매일에 충만한 삶, 작지만 확실한 행복감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을 통해서 행복감을 간접 체험한 독자들은 결국 나처럼 길을 나선다. 이 작품이 보여준 행복감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 독자는 동행인으로서 작가와 함께 걷는다. 그리고 걷고 난 후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도 작가와 함께 느낀다.

길이 나를 부른다.

 간단한 스낵처럼 콘텐츠를 소비하고, 잠깐이라도 기대에 못 미치면 가차 없이 소비를 중지하는 지금의 시대에, 어쩌면 이런 잔잔한 웹툰은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진지한 독백과 생각의 편린들, 그리고 약간은 오글거리는 싸이월드 감성을 참아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으로 스윽 보고 빠르게 소비하는 스낵이 아니라, 이유 없이 공허한 삶에 따뜻한 쌀알을 차곡차곡 채우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듯 정성스럽게 보고 싶은 웹툰을 찾는다면 「비바 산티아고」를 추천한다. 이 작품은 천천히 다가오는 만큼 그 여운 또한 길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반드시 이 길을 걷고 싶어질 것이라는 점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여행에 드는 비용과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따져보면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가야할 이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여느 여행보다 볼거리는 적고 몸은 힘든 여정임이 분명하다. 멋지게 차려입고 인생사진을 찍을 수도 없으며, 땀에 절어 추레하게 다녀야 하는 그런 여정,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빈대에 물리기 일쑤인 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산티아고로 향하고야 마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그런고로 –「비바 산티아고」의 첫 화에서도 그랬듯이- 이렇게 허세 가득히 표현할 수밖에.
“길이 나를 부른다.”




<비바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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