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동년배들이랑 풀문 콘서트 다녀온 썰 푼다
「달빛천사」 ARINA TANEMURA / 서울문화사,DCW
최윤주 2020.01.30


동년배들이랑 풀문 콘서트 다녀온 썰 푼다




 타네무라 아리나의 「만월을 찾아서」, 한국인들에게는 「달빛천사」로 익숙한 만화와 동명의 애니메이션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12살 소녀 ‘루나’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들의 도움으로 건강한 16살이 되어 ‘풀문’이란 이름으로 가수의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 21세기의 5분의 1을 지나 2020년에 들어선 이런 때에 출간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만화를 어째서 언급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신이 200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이라면, 혹은 이 만화에 관해 2019년 하반기에 일어난 일련의 일1)들을 목격한 이라면 어째서 이 옛날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미 짐작할 것이다.

  콘서트에 다녀왔다. 4년쯤 전에 누군가 임의로 만든 듯한 ‘Love Chronicle’ 풀버전(사실상 1절을 두 번 붙여놓았을 뿐인)을 들으며 이 노래의 기승전‘결’을 영원히, 영원히 들을 수 없단 사실에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지난 15년간의 서러움을 기억한다. 이건 가야만 하는 공연이었다.
너무나 어렵지만 콘서트 후기를 한 줄로만 남겨야 한다면…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의 연속이었다.

 이는 ‘투니버스 세대’로 분류되는 젊은 세대가 구매력을 갖춘 주 소비층이 됐기에 가능했다.2)  방구석에서 혼자 TV만 보고자란 내 유년을 가리켜 ‘세대’라 호명하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동의한다. 나 역시 90년대 생 ‘달천이’. 소비 대상은 물론, 그 소비 방식까지도 90년대 생이라면 너무도 익숙한 방식이었다. 영상이 공유된 ‘유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텀블벅’은 며칠 전에도 후원한 바 있고, ‘떼창’과 ‘포토타임’, 좌석 좌우로 주고받는 관객 간의 간식은 매해 찾아가는 아이돌 콘서트에서 일상처럼 경험해본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26억3천6백여만 원이란 엄청난 액수의 펀딩 금액’이나 ‘발매 직후 음원 사이트 상위권에 진입한 곡’ 같은 말로는 이 감격을 환산할 수 없을 것 같다.



1) 2019년 5월 이화여대 축제에 ‘루나(풀문)’을 더빙했던 이용신 성우가 게스트로 등장했고, 축제 영상이 유튜브에 게시돼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용신 성우의 개인 유튜브 채널이 함께 인기를 얻으면서 텀블벅을 통해 OST 정식 발매를 위한 클라우드 펀딩이 진행됐고 성황리에 마무리되며 콘서트까지 열렸다.

2) 웹툰인사이트 이재민(2019. 10. 1.). “달빛천사” OST 커버곡 펀딩 오픈과 동시에 성공, 22일 남기고 12억원 ↑... “투니버스 세대가 왔다”. https://www.webtooninsight.co.kr/Forum/Content/6403



 콘서트의 시작과 함께 재생된 VCR. 혼자 남은 집에서 눈치 보며 초등영어책을 쥐고서도 별수 없이 텔레비전을 향해 리모컨을 들고, 이윽고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주책맞게 눈물을 흘린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일단 동행한 내 혈육도 울었다). 이것은 한 세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기억이자 공통의 감각인 동시에, 한 개인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여전히 지속되는 지금 이 순간의 일(마음), 이라는 거창한 말로도 부족하다.

 누군가에겐 시시껄렁한 추억팔이 정도로 비칠 수 있다. 지나온 시절이기 때문에, 잘 몰랐던 어린 시절이기 때문에 마음껏 미화하고 부풀리는 것뿐이라고. 세계가 작았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큰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만화(따위)에 그렇게까지 애착을 갖는 일은 우스운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자라면서, 우리는 실제로 무언가를 잃었고 망가뜨려 왔기 때문이다. 기대, 인연, 건강 같은 것들. 결코 가벼운 상실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제는 그런 것들이 희망, 사랑, 용기보다 절실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연말은 자주 그 상실을 되짚는 우울한 시간이 되었다. 으레 찾아오는 추상적이고 심상한 감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과 날짜를 가진 상실과 실패여서 어쩔 수 없이 슬프다. 아끼던 이를 떠나보내고 공들였던 일이 수포가 되는 일은 차라리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당장 한 해의 소득과 세금을 따지고 업무와 거주, 건강에 관한 각종 계약을 갱신하며 골머리를 앓아야 하기 때문에, 맘껏 슬퍼할 겨를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수행할 때야말로 ‘어른이 됐다’고 느끼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런 미래를 바라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 말이다. 지금 이 미래를 ‘스포’한다면 반짝이는 만화를 보며 눈을 빛내던 그 시절의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는 않아진다.

 생각해보면 루나라고 언제나 밝게 빛나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린이용 만화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굴곡이 크고 낱낱의 사건이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꿈이 가수인 소녀에게 성대종양과 시한부라는 설정은 차라리 판타지와 만나 극적으로 극복될 일이다. 하지만 그 판타지가 어디까지나 가수가 될 기회의 제공일 뿐이라는 점에서 역시나 현실적인 것 같다. 유행에 맞춰 팔릴 만한 노래를 부르길 요구받고, 광고를 걸고 동료와 경쟁하고, 스케줄에 쫓겨 없는 기지도 발휘해야 하는 소녀만화라니.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담아”(‘나의 마음을 담아’) 노래하겠다던 결심과도 같은 오프닝 곡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업성이 짙고 갑을의 이해관계가 철저한 세계에서 그건 얼마나 무모한 마음이었는지, 환한 빛 아래 잊고 있던 달의 크레이터처럼, 푹 파인 현실이 시차를 두고 생생히 와 닿는다.

 이 정도면 콘서트가 열린 12월 25일, 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울었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사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운만큼 웃을 수 있었는지 말하고 싶어서다.

 공연이 끝나고 앵콜을 요청하기 위해, 우리는 ‘앵콜’이라는 말 대신 무반주로 ‘New Future’을 합창했다. 1절이 끝날 때 이용신 성우가 다시 무대로 나왔고, 다 함께 멈추지 않고 2절까지 불렀다. 카메라를 들고 감격한 얼굴로 객석을 바라보는 성우분을 보며 이 공연은 서로가 있기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소중한 시간에 대한 애착이 동(童)심이 아니라 동(同)심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운 좋게 보존된 순수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지켜온 것이 되고, 실제의 세계에서 때때로 정말 큰 힘을 발휘하는 무엇이 될 수도 있음을 이번 일을 통해 배웠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라면 가능한 일들을. “내 노래는 너와 함께” 부른다는 가사는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던 12살이면서 16살이었던 소녀의 결연한 약속이 기어이 실현됐으니 말이다.

 <달빛천사>의 OST 6곡은 워낙에 각각의 곡이 두터운 마니아층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Love Chronicle’을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곡이 특히나 선물처럼 느껴졌다. 깔끔한 풀버전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내 삽입곡으로조차 완성된 적이 없는 곡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조각난 마음이 돌아와 맞춰진다는 노랫말처럼, 오래전 중단돼 내내 구멍 나고 잡음 섞여 있던 노래가 15년 만에 비로소 빈 가사를 채워 완성되었으니 오죽할까. 그날 우리는 이 노래를 세 번이나 불렀다. 공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곡의 제목이 하필 ‘사랑 연대기’, 혹은 ‘사랑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나는 오래오래 좋았다. 원 버전과 달리 굵어진 성우의 목소리는 루나보다 풀문을 상기시켰고, 들을수록 강하고 단단해서 한 연대기를 완성하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의 길을 알아요, 이제 걸어갈게요.”라는 가사는 지금이기에 더 좋았다. 이런 미래라면 꽤 나쁘지 않다고, 아니 생각보다도 훨씬 멋지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한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고 약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잊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잊지 않을 수 있고, 그러는 와중에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다가 서랍 속에 남아 혼자 울고 있던 어떤 것들을 간혹,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완성해낼 수도 있다. 미약하지만 이런 것들을 사랑, 용기, 희망으로 치환해볼 수는 없을까. 아주 사소하고 미약한 일상의 일들까지도 거창하지만 절실한 말들로 호명해내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되기까지 우리가 만화를 통해 배운 것이니까.

 2019년 기록된 이 이야기는 과연 이후에 어떤 것들을 남길까.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적어도 10년 후에나 가능할지 모르지만, 같은 노래라도 함께 부르고 버전을 바꿔 부르고, 반복해 부르다 보면 10년이란 시간도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만날 이 날을 내 가슴속에 새겼다. 2020년, 또 한 번 시작된 새로운 미래(New Future)를 당신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달빛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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