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일기를 쓸 거라면 정직하게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 글ㆍ그림 yunsh32, 네이버웹툰 베스트도전 / <플랫다이어리> 글ㆍ그림 임현, 네이버웹툰
최윤주 2020.02.18



일기를 쓸 거라면 정직하게

 여하간 ‘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시대다. 가장 잘 팔리는 책들을 고르고 골라 전시해놓은 대형서점 평대 앞에서 드는 생각이다. 에세이는 물론 자기계발서와 베스트셀러, 인문 분야까지 온통 ‘나’를 내세운 책들로 가득하다. ‘나를 위한 삶’,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나의 행복 추구하기’, 그리고 ‘이기주의’를 추구하겠다는 선언들. 단어의 선택과 표지의 색감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런 기류 속에서 특히나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서정적인 파스텔톤 혹은 심플한 일러스트로 장식된 에세이들이다. 대다수가 약속이라도 한 듯 ‘평온한 일상’을 염원한다. 그런 염원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격려와 위로가 절실한 시대인가 보다, 피로와 불안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니 자기에 관해서만 이라도 확신이 필요한가 보다, 비판과 의심보단 공감이 매력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이해해볼 수 있다.

 하지만 책장이 온통 ‘나’로만 가득한 사람을 상상하면 아무래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지킨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모두가 상처받았을까? 다들 평온을 바라는데 어째서 세상은 자꾸 엉망이 될까? ‘너’와 ‘우리’는 없이 ‘나’로만 가득한 이 책장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 두 편의 만화,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와 <플랫 다이어리>를 소개하고 싶다.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

 먼저 일러둘 것은 <무대에 서지 않지만 배우입니다>(이하 <배우입니다>)가 정식 연재가 아닌 ‘베스트도전 웹툰’으로 연재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개인적인 이유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만화다. 작가는 청소년 시절 뜻대로 되지 않던 그림을 버리고 다소 충동적으로 시작하게 된 배우라는 일에 진심이 되었으나, 개인적 한계와 상황의 압박 속에서 꿈과 삶의 의미가 퇴색되어감을 느꼈다고 한다. 만화는 다시금 의미를 찾기 위해, 무대 안팎에서 성실히 지나왔던 아마추어 배우로서의 10년을 되짚는 과정이다.





 막다른 길에서 시작된 이야기인 만큼, 파스텔톤의 색감과 귀여운 그림체와 달리 <배우입니다>가 그려내는 여정은 결코 가볍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작가 본인이 실제 무대에 올랐던 공연들을 한 편씩 회고하는 과정이 그가 지나온 10대와 20대 시절에 대한 회고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꿈을 묻는다는 것은 그 꿈을 선택한 과거, 책임지는 현재, 그리고 기대하는 미래를 묻는 것이기에 결국 삶에 대해 묻는 일이고, 그 삶을 견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화는 그 물음의 과정을 ‘나’와 ‘나’의 대화로 형상화했는데, 아무리 봐도 ‘평온’해 보이지는 않는다. 작가가 자기 자신과 얼마나 긴밀히 대화해나갔을지, 집요하게 굴었을지가 얌전한 그림을 뚫고 생생히 전달된다. 열등감으로 점철된 자신을 겸허히 인정하고, 남 탓만 하던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인다. 뜻대로 되지 않는 꿈 앞에서 자꾸만 도망치는 자기 자신을 성급히 위로하기보다 철저히 되물어 다시 방향을 정하게 한다. 이 엄격한 과정을 통해 <배우입니다>가 보여주는 진실은, ‘나’를 만나는 일은 우리의 기대만큼 안온한 도피처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만화에서 그린 대로 벼랑 끝에 내몰리는 과정과 가깝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힘들게 ‘나’를 찾는 일의 효용은 무엇일까. 바로 그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야 말로 내밀한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아무도 없는 막다른 곳에서 나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도망치지 않고 정직하게 만난 ‘나’는 훨씬 단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믿음직하다. “취향도 유행을 타는 세상에”(33화) 스스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미로보다 복잡한 인생이란 여정에서 그나마 가장 유의미한 힌트가 될 것이다. 정식으로 무대에 서지 않아도 스스로를 ‘배우’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조명과 관객이 없어도 자신만의 꿈과 삶을 지속할 힘과 용기가 있다면 공연은 계속될 수 있다. 아주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나’가 바로 그 원천이다. 정식 연재를 하지 않고도 근 1년이란 시간을 어김없이 성실히 지켜온 이의 메시지니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플랫 다이어리

 <배우입니다>가 집요히 내면을 파고들었다면, <플랫 다이어리>의 시선은 바깥에 좀 더 무게가 가 있다. 아주 심플하게 말하자면 살면서 만난 사람과 순간들에 관한 일기. 하지만 시선이 바깥을 향하고 있다 해서 ‘나’를 살피는 시선이 무뎌지진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는 예민한 시선이 성찰의 동력이 되는 듯하다. 절묘한 은유, 구체적인 말과 감정으로 펼쳐 보인 만화의 한 컷 한 컷이 그 증거다. 가깝게는 몇 년 전, 길게는 십수 년 전의 일까지도 한결같이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기록했다.


 화려하고 경쾌한 해시태그(#) 대신 밋밋한 플랫(b)을 달겠다는 1화의 선언 그대로 <플랫 다이어리>는 연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약속한 ‘플랫함’을 유지했다. 속 시원한 ‘사이다’ 전개도 없고, “넌 이제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가 아직 안 괜찮다는, 말”(22화)을 건네고, 명쾌한 마침표와 느낌표보다 찜찜한 쉼표와 물음표로 끝나기 일쑤였다. 말 그대로 ‘평평(flat)한’ 이 만화가 조금 시시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세계를 이분해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 성공과 실패 따위를 단정 짓는다면 완전히 다른 전개가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편한 것이 아님을 이 만화는 올곧게 직시한다. 아주 사회적인 일부터 사적인 감정까지 가감 없이 고백하고 기록해낸다. “쓰지도 않은 휴지를 버려대는 삶과 그 휴지를 주워 살아내는 삶”(1화)이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부대 내 서열 다툼을 위해 개에게 농약을 먹여 죽인 이 악마 같은 일과 다를 바 없는 일들이 한 해 “약 8만 2000마리”(8화)의 유기 동물들에게 심상한 얼굴로 일어난다는 사실. 사회적 재난 앞에서 주식 가격을 걱정하고 타인의 고통을 취잿거리로 삼는 비인간적인 짓들을 “자신의 인간성은 절대 가라앉지 않으리라”(29화) 믿었던 작가 본인 역시 저지른 경험이 있다는 사실. 뼈아픈 사회적 진실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기 실수를 고백하는 것이 더 힘들 수 있음을 안다. 담담히 그려낸 만화에 얼만큼의 각오와 마음을 담았는지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자기 사연에만 골몰해 자기 위로와 연민에 빠진 세상만큼 미래가 암담한 곳도 없다. 사건과 사고, 그로 인한 상처와 아픔은 끊임없이 발생하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나빠지지나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틀림없이 더 나빠질 테지만.

 그러니까 이 만화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사소한 일까지 지나치지 않으며 스스로 반성하고 다짐하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본받을 만한 삶의 태도.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쉽게 ‘타인’으로 규정되는 주변의 모두가 저마다의 사정과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이다. 그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거리나 가게에서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인 이들은 물론, 어쩌면 나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을 오늘 만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역시 다른 누구에게 그런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듯이. <플랫 다이어리>가 언제나 ‘타인’으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고, ‘나쁜 그 사람’으로 시작해 ‘우리 모두’로 마무리되는 이유다.


 고르게(flat) 정직한 이 만화를 보며, 잊지 말자고 한 번 더 다짐해본다. ‘나’로 인해 ‘당신’과 ‘우리’의 하루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 내일은 더 나은 일기가 쓰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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