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인생의 롤 모델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 소설 [빨강머리 앤] 속 주인공 ‘앤 셜리’이었다. 고아였던 앤이 교사로서의 꿈과 길버트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서 그려진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상상을 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던 당당함이 멋있었기 때문이다. 앤의 상상에 대한 신념은 다음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주근깨 가득한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이 갖고 있던 결핍이 바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 영역으로 이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상의 나래가 실현 가능성이 없으면 공상이며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망상으로 여겨지는 현실, 21세기라는 시공간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소설가, 만화가, 감독 등 흔히 말하는 창작자들은 납득 가능한 상상력을 펼쳐낸다. 창작자의 ‘상상의 나래’는 그들만의 스타일이 되고, 스타일은 서로 응집하면 하나의 사조로서 명명 받게 된다. 사조는 각 시대의 회화 기법과 소설의 문체를 기반으로 서로가 영향을 주며 나타난 현상으로 해당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규정된다. 간단히 풀어 말하면, 당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가 상호작용을 하며 나타난 일종의 문화 유행 코드라고 할 수 있다.

팡팡야 작가의 화풍은 바로 거친 배경에 대비되는 인물들의 간결함이 주는 언밸런스라 할 수 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의 필체가 만화 원고지에서 만났을 때, 도리어 이 둘은 너무나 뚜렷하게 서로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조화가 느껴지는 것은 팡팡야 작가의 화풍의 최대 매력이라 할 수 있다.

화풍에 못지않게 팡팡야 작가의 스토리 또한 일상과 비일상이 들쭉날쭉한 불규칙한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게에게 홀려서’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네 페이지 만화이다. 주인공 소녀가 우연히 마을을 거닐다 우연히 길가에 마주친 살아있는 게. 저녁 식사재료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소녀가 게를 잡기 위해 추격전을 펼친다. 하수구 사각철망에 다리가 낀 게를 소녀를 잡아서 좋아하지만 곧 어디선가 나타난 생선가게 주인(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테트라포드 머리를 한 인물)이 본인의 게라고 주장한다. 소녀는 반박을 하고 싶지만 게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 빼도 박도 못한 채 생선가게 주인에게 게를 구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소녀의 일상이 게를 만난 순간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버린다. 소녀가 게를 쫓는 추격전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시계토끼를 쫓는 앨리스 모습이 겹쳐지면서 비이상적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의 문을 열어보지만, 어느 새 생선가게 주인의 등장과 함께 다시 현실로 돌아와 버리고 만다. 팡팡야 작가의 작품을 ‘꿈속에 빠져들자마자 봤던 세상을 담은 작품’**이라 평하는데, 바로 이점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 밖에 팡팡야 작가를 ‘초현실주의와 일본만화의 합체’*** 등 환상문학적 요소를 가진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작가의 단편집은 현재 총 6권이 출판되었다. 국내에서는 출판사 미우에서 2020년 3월에 팡팡야 작가의 2014년작 [게에게 물려서]와 2015년작 [침어]를, 4월에 2016년작 [동물들]의 한국어 에디션을 발행하였다. 팡팡야(panpanya) 작가의 전작 국내 발행을 기대해본다.

사족. 작가의 개성이 작가의 책표지에도 들어나는데, 민무늬 돌담, 화장실 바닥타일, 일본의 미끄럼 방지 도로를 형상한 이미지가 심플하고 스타일리시하여 북 디자인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도 의미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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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이 만화가 대단해]는 매년 12월에 타카라지마사가 출간하는 만화 소개 무크지로, 만화 종사자, 서점 직원, 출판, 방송, 엔터테인먼트 업계 전문 종사자를 비롯하여 초·중·고등학생 등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해당 남자편과 여자편 등의 분야의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이 만화가 대단해’에 소개된 만화는 작품성은 물론 대중성까지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어 TV애니메이션, 영화화, 드라마화까지 다양한 플랫폼으로 진출하는 판로라고 볼 수 있다.
**[이 만화가 대단해] WEB 페이지 작가 인터뷰 자료 후편에서 게재된 내용
***팡팡야 작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일본 [만화대상 2014] 노미네이트 작품 1차 심사평에서 언급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