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사이다 정의’의 함정, 통쾌함이 놓치고 있는 것들
<나를 바꿔줘> 글 이지호 그림 호띠 / 네이버웹툰
최윤주 2020.05.15



‘사이다 정의’의 함정, 통쾌함이 놓치고 있는 것들

 최근 무섭게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검색하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부부의 세계」 검색 자동완성 구절 중 하나는 ‘「부부의 세계」 고구마’이며, ‘「부부의 세계」 고구마’의 연관 검색어는 ‘「부부의 세계」 사이다’라는 사실이다. 끔찍할 정도로 답답한 불륜 복수극이 어째서 인기를 끄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적금을 들 듯, 독자는 내일 터뜨릴 사이다를 위해 오늘의 고구마를 참는다. 콘텐츠를 질리도록 접해온 현대의 독자들에게 ‘해피엔딩’은 이미 약속된 결말이다. 중요한 것은 고난이 환희로 전환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드라마뿐만 아니라 웹툰에서도 이 ‘고구마’와 ‘사이다’가 질리도록 보인다. 장르와 순위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만화의 댓글에 ‘고구마’라는 말이 달리고, 그 뒤엔 ‘사이다’가 빠지지 않는다. 한창 연재 중인 웹툰 <나를 바꿔줘>의 댓글 역시 ‘고구마’와 ‘사이다’로 도배되어 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이 만화는 매 챕터 불행한 삶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들에게 의문의 여성이 찾아가 생명 보험금을 담보로 얼굴을 바꿔준다는 형식이다. 악의와 가난, 못생긴 외모로 불행하던 인물들이 마법처럼 바뀐 얼굴과 함께 인생까지 달라지는 것이다. 이때 변화의 방향은 오로지 인과응보, 사필귀정, 권선징악. 독자들은 ‘사이다 정의’를 기대하며 이 만화를 찾는다.


 작품 스스로 노골적인 권선징악 서사를 자처한다면 그 의도 자체야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통쾌함 또한 대중문화가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만화를 보면 볼수록 통쾌함을 느끼기에는 어딘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징악’과 ‘권선’의 순간 모두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권선징‘악’? 무엇을 위한 벌인가
 <나를 바꿔줘>가 미심쩍은 이유 한 가지는 권선징악을 논하는 이 만화가 지닌 선악의 기준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바꿔줘>에서는 타인을 속이고, 협박하고 폭행하는 이들만큼이나 ‘게으른’ 이를 추악하게 그린다. 이는 만화보다 독자의 반응을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첫 번째 챕터의 주인공 최보윤과 두 번째 주인공 정현주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두 주인공은 20대 여성이고 가난하며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처지지만, 이러한 유사점은 오히려 두 사람의 성격(인간성)을 대조할 뿐이다. 똑같이 단칸방에 살면서도 게으른 최보윤의 집은 더럽고 공과금까지 연체된 상태인 반면 성실한 정현주는 일어나자마자 이불부터 갠다. 허영심까지 있는 최보윤은 어쩌다 생긴 돈으로 사치를 우선하지만 같은 행동을 한 정현주는 스스로를 검열하는 식이다. 이러한 설정에서 예견되었다는 듯 결말에 이르러 정현주는 행복을, 최보윤은 불행을 맞이한다.
 당연하게도 두 인물을 향한 독자들의 반응 역시 대조적이다. 성실하고 착한 정현주는 모두가 행복을 기원하는 반면, 게으르고 괴팍한 최보윤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망했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압도적이다. <나를 바꿔줘>의 세계에서 인과응보의 교훈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인뿐 아니라 주인공에게조차 예외 없이 적용된다. 최보윤 에피소드의 마지막에는 심지어 이런 댓글도 있다. ‘혹시 황하나라는 사람이 뭔갈 깨우쳐주려고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외모가 아니라 너부터 바뀌고 네가 노력하면 될 거다.’

 만약 그렇다면 혹시 이 만화는 신자유주의 괴담쯤 되는 것일까. 노력이 곧 덕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이제 열심히 살지 않는 이는 실패를 넘어 끔찍한 불행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괴담 말이다. 비참한 죽음을 맞은 주인공을 두고 달린 댓글들이 ‘모든 일의 기본은 자기 관리’, ‘그러니 우리도 운동하자’로 결론 지어진 것은 이 오싹한 신자유주의 괴담의 완성이라 할 수 있겠다.
 나태하고 괴팍한 이가 사랑받지 못할 수야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징벌 대상’이 될 일인가. 나태해서 벌어지는 일이라곤 살이 찌고 방이 더러워지고 구직에 실패한다는 것뿐이다. 괴팍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시기심에 타인을 깎아내려봤자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타인 위에 군림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닌 이가 나태하고 괴팍해서 무언가를 망가뜨린다면 고작해야 그 자신의 삶밖에 더 있겠는가. 도의적으로 안타깝거나 한심한 일이 될 수는 있어도, 벌을 받을 잘못을 한 것은 결코 아니란 뜻이다. 더욱이 사기, 성추행, 협박 등 수위 높고 악질적인 범죄가 그렇게나 많이 나오는 만화가 아닌가. 최보윤에 대한 작품의 시선과 독자들의 평가는 부당할 정도로 가혹하다.


사필귀‘정’? 무엇이 옳은 것인가
 <나를 바꿔줘>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불행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주인공의 불행이 심해질수록 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악인들에 대한 서사적 보복 역시 수위를 높여간다. 가령 선인보다 ‘악인’에 가깝게 묘사된 최보윤은 결국 교통사고로 사망하는데, 이때 사고를 낸 운전자는 최보윤에게 사기를 쳤던 남성이다. 선량한 정현주를 괴롭힌 이들은 훨씬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친한 척 정현주에게 접근해 이용하다 루머의 피해자로 만들기까지 한 오수연과 송찬율 커플은 결국 악플 전과로 예정된 입사가 취소된다. 거기에 오수연이 임신하고 송찬율은 택배 상하차를 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무엇보다 도박 중독에 폭행까지 서슴지 않던 정현주의 친부는 결국 사채업자와 얽혀 감옥에 간 뒤 협박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가장 최근의 ‘배선주’ 에피소드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이 자극적으로 내달리고 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해 부모님이 죽고 자신은 히키코모리가 되었는데, 가해자는 그런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금수저로 태어나 떵떵거리며 살고 일말의 죄책감조차 보이지 않는다. 앞선 에피소드들보다도 불행한 상황에서 배선주가 택한 것은 높은 불행 수위에 걸맞은 강도 높은 복수다. 가해자의 얼굴로 자신을 바꾼 뒤 밀폐된 공간에 그를 가둬 불을 피워 질식시킨 것이다.1) 
 더는 무엇이 맞는지 혼란스러울 만큼 선악이 뒤엉킨 전개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당하기만 하는 배선주를 보며 답답해하던 독자들은 미처 ‘큰 그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며 통쾌해하는 것도 모자라, ‘가해자가 더 비참하게 죽지 않아 아쉽다’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을 정말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서사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의를 논할 때는 무언가를 바로잡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과정에 대한 물음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오로지 통쾌함만을 목적으로 하는, 아전인수격의 ‘사이다 정의’에는 이러한 고민이 결여됐다. 이 점이 이 만화가 불편한 두 번째 이유다.



1) 가장 최근 회차(20.05.08) 기준으로 범행 과정까지 나왔으나 아직 시신 확인 과정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이후 회차에서 사실은 죽지 않았다는 등 주인공의 극단적 선택을 막기 위한 전개가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선주가 살인을 결심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이다 정의’가 진짜로 원하는 것
 물론 <나를 찾아줘>가 재현한 가해자들은 극악한 잘못을 저질렀고, 반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태도는 선처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독자들이 지적했듯 현실에서는 더한 악행이 일어나며 뉘우침 없는 가해자들도 많다. 하지만 재현은 어디까지나 재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실이 아니기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그려지고 읽히는 방식에는 언제나 창작자와 독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고 많은 현실 중에서도 그런 현실을 택해 이런 방식으로 그려낸 이유가 무엇인가?
 앞날이 보장된 대학생이던 오수연이 임신을 하고 송찬율은 택배 상하차 일을 한다는 것은, 이들이 지금 당장의 취업만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육아라는 굴레와 내려앉은 계급적 위치를 지고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친부가 감옥에서 사망한 것은 언제 또 터질지 모를 골칫덩어리를 처리하는 간편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통쾌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정현주의 인생을 친부가 방해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만화를 통해 독자가 찾는 것은 화끈한 보복이며, 이때의 보복은 분노의 해소뿐 아니라 주인공의 행복을 끝까지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완벽한 해피, 엔딩이다.
  <나를 바꿔줘>의 추동력이 되는 독자의 분노와 갈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지는 알고 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 되고, 성실함이 기만당하고, 죄지은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만화보다 극악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화나고 억울한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최선일까. 협박에 협박으로 응수하고, 폭력에 살인으로 응징하며, 적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이를 완전히 재기 불능하게 짓밟는 것이 당연한 세계. 오래전 한 철학자는 다름 아닌 이런 세계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이름 붙였던 것 같은데, 오늘날 독자들이 바라는 세계가 정말 이런 모습인지 묻고 싶다. 과연 우리의 현실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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