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프린세스 안나
만화규장각 2000.01.01
1999년 10월부터 만화 잡지 「영 챔프」에 연재됐던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는 1996년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출판된 여류 소설가 배수아의 단편집 「바람인형」에 수록된 작품을 만화 화한 것이다. 소설을 만화 화한다는 것(원작이 있는 작품을 그릴 때는 특히 더)은 상당한 부담이 따르기 마련인데, 특히 이 작품의 경우 원작 소설이 “안나”의 우울한 삶을 감각적인 언어로 잘 풀어냈다’는 평을 받았던 만큼, 원작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그에 따른 비판이 만만치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원작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 끝에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고, 또한 공을 들인 모습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다. 그리고 단편 만화를 그리며 쌓았던 내공을 유감 없이 발휘하며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결국 그는 이 작품으로 2000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하는 ‘오늘의 우리 만화 상’을 받았다. 이 작품 『프린세스 안나』는 서울 한복판 혹은 가난에 찌들은 어느 변두리 달동네를 배경으로 안나의 우울한 삶을 담아낸 흑백 사진들, 혹은 그것들로 이루어진 앨범을 보는 듯한 연출을 하고 있다. 작품의 내용이 현실적인 데다가, 작화 역시 안나의 무표정한 모습과 어우러져 일상의 어둡고 우울한 모습들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주인공인 안나의 이모가 언니의 남편 즉 안나의 아버지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생겨난 가족의 불행을 냉담하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풀어가고 있다. 안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린다며 생계수단이 전혀 없는 가족들을 버리고 미국 뉴욕으로 떠나갔으며, 생모 역시 가족들을 버리고 한때 가사 선생으로 일한 일이 있는 대구의 여학교로 떠나버린 상황에서, 이 무척이나 묘하게 구성된 가족은 서로를 간섭하지도 않고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애정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여동생이 겨울 내내 코트 없이 돌아다니고, 남동생이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가고, 야간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의 언니가 한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서른 살 먹은 남자와 결혼을 해도, 고등학생이 된 안나는 화실에 다닌다. 경제력이 없는 탓에 친척 아저씨와 함께 작은 맥주 집을 운영하는 이모, 아니 엄마는 이들 남매를 야단치지 않고, 언제나 맥주를 주며, 이들은 목욕탕에서 모두 옷을 벗은 채로 물을 끓여 목욕을 한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화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지만, 노인 전용 주유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 아버지가 예전에 했던 말에, 마치 화두처럼 매달리고 있기 때문인데,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며 등장 인물들과 읽는 이의 의식을 지배하는 그 말은 다음과 같다. “내 딸들은 다 예쁘고 강하다.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가장 자신있는 여자가 된다. 네 동생들도 마찬가지야.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사는 것이 좋다. 남자를 선택할 때면, 그는 모택동 같은 남자라야 한다. 프린세스는 왕과 결혼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안돼.” 안나의 형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안나의 친구 “노아”, 그리고 한밤에 오토바이를 끌고 지하철역 주변을 서성거리는 아이들의 리더 “핑크”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지루한 일상의 끝을 갈망한다. 등장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의 보풀마저 보일 듯한 세밀한 묘사의 이면엔, 재미없고, 시들하며, 차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길 바랄 정도로 지루하고 숨막히는 일상을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직설적으로 자유를 원하면서도, 오래지 않아 잊혀질, 그런 날들을 살아가는 삶의 모순, 그리고 역설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정적(靜的)이고 압축된 이미지로 전달되는 일상에 대한 증오와 사랑. 변병준의 『프린세스 안나』에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수준에서 뒤섞여 있다.
<프린세스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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