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폴리나>,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
<폴리나> 저자 바스티앙 비베스
최윤주 2020.06.16




<폴리나>,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



 예술가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유로서의 예술적인 삶이 아니라, 예술이 곧 삶인 사람들의 이야기. 일뿐만 아니라 취미, 인간관계, 사소한 습관까지도 예술을 중심으로 구축된 삶을 정교한 세공품인 양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더는 손대지 않아도 될 만큼 삶의 면면이 예술을 위해 조각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스터-피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작품을 넘어 삶 자체에 예술의 자격을 부여해야 할 듯하다.

 찬장에 아껴뒀던 차를 꺼내 마시듯 한 번씩 시간을 내어 <폴리나>를 읽는다. 느긋한 오후,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음 맞는 대화 상대와 원 없이 예술에 관해 주고받는 느낌이다. 자주 ‘현실’이라는 말로 치환되고 마는 일상의 시간에서 진지하게 예술을 논하는 것은 어쩐지 겸연쩍다. 그래서 예술을 잊을 것 같거나 외로울 때면 이 만화를 읽게 된다.
<폴리나>를 읽으며 쌓인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도 풀어놓고 싶다.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대화처럼 이야기 사이사이 미묘한 단절감이 들 수도 있지만 양해를 구한다.


예술과 노력

 마치 계시받은 것처럼 발작하듯 영감을 토해내는 예술가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노력하는 예술가를 주목하는 편이다. 이왕이면 목적 있는 노력이 좋고, 그중에서도 깊이 공감 하는 목적은 ‘투명성’을 노리는 것이다.
 언젠가 라디오(MBC <꿈의 지도> 2016년 4월 25일)에서, 무용수이자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일화를 들었다. 지독한 연습 벌레로 유명한 프레드 아스테어에게 진저 로저스가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죽도록 연습하는 거야?” “어,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예술과 훈련, 넓게 말해 꿈과 성실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익숙한 도식이다. 무섭게 성실한 이들 앞에서 나같이 평범히 게으른 이들은 숙연하고 부끄러워진다. 솔직히는 ‘죽도록’이라는 말이 좀 맹목적인 감이 있기도 해서, 어쩐지 거북한 느낌도 든다. 대가들의 목적이란 사실 나태한 이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체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뭐길래 죽도록 연습하는 것일까. 매일같이 혹독한 연습에 임하는 폴리나의 모습은 프레드 아스테어를 연상시키는데, 끝을 모르고 완벽을 요구하는 선생 보진스키의 말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 같다.

 "동작이 더 가벼워야지. 힘들어 보이면 안 돼.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한 거야.
관객들은 네가 전달하는 감정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봐서는 안 돼.
잊지 말아라. 폴리나,
우아하고 유연해 보이지 않으면 관중들에겐
네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일 거야." 
 <폴리나 33 페이지 중에서>


 내가 문장를 직ᅟᅳᆷ 엉망으로 쓴다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지금 내가 문장을 엉망으로 쓴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의미가 아닌 오류일 것이다.) 틀린 조사, 오타, 맞춤법 실수, 불필요한 구두점, 제멋대로인 어순. 단순한 문장 하나조차 시선이 분산되고 의도가 왜곡된다. 읽는 이에게 가닿지 못한다. 사실은 이렇게 억지로 비문을 만들지 않아도, 이 글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의도가 훼손된 채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솜씨가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계를 겪다 보면, 한계를 통감할수록 도리어 선명해지는 욕망이 있다. 무언가를 보다 온전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예술과 관객 사이를 내가 방해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투명하고 매끈한 통로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보여주기 위해선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술과 선택

 성실히 매일의 걸음을 떼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그 발걸음을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폴리나에게 삶의 국면은 곧 어느 무대에 설지 결정하는 순간들이다. 그는 보진스키 아카데미에서 러시아 발레단으로, 발레단에서 랍타 무용단으로, 거기서도 나와 연극팀으로 무대를 옮겨가면서 삶의 스텝을 이행한다.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함께 춤을 추는 동료들이 교체되고, 추구하는 춤의 형태도 따라서 바뀌어간다. 고전적인 클래식 발레에서 출발해 파격적인 현대무용을 지나 자기만의 창작무용에 도달하기까지. 폴리나의 무용 여정은 교묘한 연관성 아래 고유의 색을 찾아 나가는 한편의 역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서사가 완료된 뒤에나 조망되는 것이지 여정의 한복판에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폴리나의 첫 스승 보진스키는 유소년 시절 내내 도무지 해설을 알아들을 수 없는 불친절한 답지 같은 존재다. 그런데 무엇을 요구받는지도 모른 채로 꾸역꾸역 체득한 뒤 발레단에 입성하자, ‘보진스키로부터 주입된 쓰레기’를 모두 버리는 것이 새 과제로 주어진다. 사소한 춤 동작 하나조차 무엇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고집 센 교사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르치는 춤이 정답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떤’ 춤을 춰야 하나. 결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 오랫동안 폴리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예술에 ‘정답’이란 것이 존재할까.

"춤은 예술이다. 적도 동지도 없다.
극단적인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이야.
그런데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이 말이 도움이 될 거야"
<폴리나 113 페이지 중에서>


 폴리나의 동료 무용수 윌리엄이 해준 말은 ‘정답’을 찾아 예술을 헤매는 이들을 비추는 환한 등불처럼 다가온다. 춤은 예술이다. 정답도 오답도 없다. 다만 서로 다른 철학과 스타일이 있을 뿐이다. 정답이라 믿고 따랐던 것들이 한순간 낡아 보이는 때가 있다. 성장하는 이가 으레 그렇듯, 폴리나 역시 새로운 무용을 습득해나가면서 한때는 기둥 같았던 스승의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기도 한다. 함께하던 동료들에게 실망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하지만 남기로 결정한 사람이 고루한 것도, 떠나기로 결심한 이가 무모한 것도 아니다. 고전무용과 현대무용이 우위를 가를 수 없듯, <폴리나>가 보여주는 무용은 단일하지 않다. 모두가 자기만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춘다.


예술과 재능

 폴리나는 ‘타고난’ 무용수는 아니다. 오히려 유연성이 떨어지는 편이고, 유연성은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이 스승의 첫 평가다. 예술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진스키는 말한다. 마치 그의 말을 증명하듯, 폴리나가 무용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이야기의 중반부까지, 폴리나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폴리나의 진짜 ‘재능’은, 무용가로서 약점을 타고났음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나가는 힘이 아닐까 싶다.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도, 이론적으로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알아도 쉽게 흐트러지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그런데 폴리나는 한다. 그냥 한다.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도 하루에 14시간씩 춤을 춘다. 하기 싫어 엉엉 우는 장면도, 다그치고 다짐하며 자신을 다잡는 장면도 없다. 어쩌면 연출상 생략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보인 모습만으로 판단했을 때 예술가의 성장을 다룬 것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하다. 엄청난 노력파인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노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토록 무심한 집념이 재능이 아니면 뭘까.

 노력이 재능의 영역이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재능이란 결국 인력(人力) 밖의 영역이란 점이다. 불공평함을 운운하기엔 어쩐지 맥이 빠진다. 짚고 넘어갈 것은 따로 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재능에 연연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재능을 갈망하는 것은, 불확실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왜 내게는 재능이 없냐는 호소보다 빈번히 들리는 것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냐(없냐)는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적어도 할 만큼 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재능의 유무를 점치는 일은 ‘제가 이 길을 계속 가도 되겠습니까’라는 뜻에 가깝다. 있다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선택의 알리바이가 되어줄 계시를 기다리는 셈이다.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인생을 걸고 베팅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하거나 안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끝이 성공일지 실패일지, 행복일지 불행일지 점칠 수 없는 것처럼 예술가의 결말 역시 그러하다. 유연성이 없던 폴리나는 결국 무용가로 성공했으니 말이다.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춤을 계속 춰도 될지, 이 삶을 계속해도 될지,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술과____

 이야기가 길어져 가는데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어차피 이것에 관해서 내가 전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고통, 혼란, 권태, 그런 지독한 것들을 누군가 견디고 있다면 거기엔 응당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성실하고도 과감한 여정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과정에 압도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는 한다.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뛰어난 예술가가 예술과 관객 사이 투명한 통로라면, 과연 그 통로를 통해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도대체 그 너머에 무엇이 있기에, 얼마나 아름답기에 이 춤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폴리나가 ‘춤을 추는 이유’, 책의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수차례 언급되면서도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아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춤의 동작을 익히듯,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근육으로 ‘느끼는’ 것에 가까울 테니까. 시종일관 부루퉁한 표정이던 소녀가 확신에 찬 듯 미소를 지으며 ‘느껴진다’ 말하던 어린 시절의 한순간. 거기에 그가 보는 모든 풍경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손짓을 택했던 폴리나의 춤이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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